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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현대회화에서의 ‘복합성’에 관한 고찰

서영희

현대회화에서의 ‘복합성’에 관한 고찰

_ 단일성에서 다수결합으로



모더니즘의 밑바탕에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중시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따라서 창작의 주체인 작가의 주관이 중시되며, 작가는 이성적이고 통일된 자아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내적 질서와 총체성을 지닌 단일체로 이끌게 된다. 현대회화의 본질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방향타는 결국 데카르트식으로 자기동일성으로만 복귀하는 작가의 이 단일한 자아가 거머쥐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다른 것과 구분되는 단일한 미술이 존재하며, 자신만의 양식을 보편적 준거틀로 삼는 모더니스트 회화가 있다. 모더니즘은 모든 화가들이 회화 매체의 자기동일성을 입증할 수 있도록 회화 이외의 요소들을 버리고 매체 고유의 특수성-평면성-으로 환원되는 양식을 사용하도록 요청한 바 있다. 그래서 지난 세기 동안 현대회화는 단일한 양식으로 단일한 세계를 재현한다는 특징적인 신화들을 연달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모더니즘의 회화는 화면의 균질화로 평평한 화면 그 자체로 물화해버리면서 패턴식 이미지 혹은 오브제로 변하는 자기모순을 낳았다. 그리고 오늘날 모더니스트 회화의 위기를 지나면서 작가의 신성한 권위는 점차 사라지고, 최근에는 작가가 작품에 자기 반영을 해도 확실성 대신 임의성과 가변성을 드러냄으로서, 회의하는 자아, 분열된 다중 자아가 규명되고 있는 상황이다. 후기 현대의 화가들이 작품에서 더 이상 자율성이나 질서 그리고 총체성 등의 가치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작품 자체도 통일된 질서 있는 실체란 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파편화된 상태여서 자기정의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감상자들에게 제시해 줄 어떤 보편적 진리도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마치 그동안 모더니즘이란 질서의 나라에서 ‘타자’로 배제됐던 차이와 무질서·우연·모순 등이 활기를 되찾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카오스 같은 현실에서 다양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구가하려 한다면, 작가는 금방 이 전략의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우선 이성·비이성, 질서·무질서의 대립구도에서 이성과 질서 대신에 비이성과 무질서를 선택하는 점에서 과거 모더니즘이 취한 이성중심주의 전략을 거꾸로 취하는 우를 범할 우려가 있다. 이성을 비판하기 위해 단순히 비이성을 추구하는 일은 흑백논리처럼 위험하다. 그 다음 작가는 각양각색의 현상들이 뒤얽힌 미술계에서 자신이 혼란에 맞서 과연 어디까지 나아가도 될지 가늠할 수 있는 어떤 장치나 원리, 법칙도 갖고 있지 못하다. 자기 분열되고 자기 정의가 불가능한 주체로서 다양성과 우연이 작업 조건이라면, 그 제작은 마치 제동장치 없이 운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성 대 다양성, 질서 대 무질서 같은 양자대립의 구도에서 공존구도를 제시하는 길이 없을까? 혼돈 속에 넋을 잃고 헤매는 대신, 혼돈 속에서 질서, 비이성 속에서 이성을 발견하고 양자들을 함께 포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필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아직 낯선 문명비평가 에드가 모랭의 ‘복합성’ 이론(La mèthode de la complexitè)을 조심스럽게 제시해보고자 한다. 최근의 인문학적 위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등장한 이 이론은 후기 현대회화의 위기에 대응하는 대안으로서도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J.F. 리오타르가 언급한 ‘다수의 논리’(multi-logies) 개념처럼, 모랭은 이성이나 합리성 같은 어느 한 논리가 유일한 참이고 작가의 권위가 지배적이란 믿음을 독단으로 간주한다. 모더니즘의 결정론과 완전한 질서를 환상이라고 지적한 그는 눈먼 이성이 복잡한 세상을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분리·환원함으로서, 다차원적인 것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평면화했다고 비판한다. 리오타르가 거대 서사에 반하는 다중의 작은 논리들로 함께 공존하는 포스트모던의 사회를 주장한 것 같이, 모랭은 이성의 극단적 단순화가 인식의 영역들을 서로 고립시킨 사실을 극복하기 위해, 소통과 ‘다수결합’(unitas multiplex)을 모색하도록 촉구한다. 이를테면 하나 안에 여럿이 있고 여럿이면서 하나가 되는 다수결합은 개인과 전체가 모순없이 관계하며, 그 전체는 다시 그것의 환경과 관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로서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인 양자택일의 논리나 테제가 안티테제를 흡수해버리는 변증법적 통일의 원리가 물러나고, 동양의 음양이론과 같은 평등하고도 유기적인 관계의 사유가 주목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후기현대 회화에 대한 규명을 위해 귀 기울여야 할 모랭의 복합성 이론 중에, 인간을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미친 인간’(homo sapiens/demens)으로 정의한 내용이 있다. 이미 세기말 시인인 보들레르가 자아의 단일성에 대해 이의제기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아와 타아의 ‘이중인’(homo duplex)로 규정한 바 있거니와, 모랭도 이성적 자아 옆에 다른 비이성적 자아가 함께 공존함을 진단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한편으로는 이성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즐기고 놀고 꿈꾸고 상상하며 욕망하는 ‘미친’ 인간이다. 또한 인간은 선의와 함께 악의도 지니고 있으며, 약점과 결점 투성이에 파괴의 잔인함을 안고 있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단순성의 패러다임으로 정의될 수없는 지극히 ‘복잡한’ 존재이다. 이런 결론은 자아중심주의를 해체한 지난 수 십년의 인문학의 노력들이 다원주의를 귀결시킨 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랭의 ‘복합성’ 이론은 다원주의의 다양한 차이들을 그 배후나 그 위에 있는 보편적 근거나 본질론으로 설명해내는 과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관찰된 상이한 현상들을 하나의 큰 동일성으로 끌어안고 그 안에 거느리는 과정을 보임으로서, 결정론·인과론과는 반대로 불확실함·모호함·모순을 거부 없이 수용한다.


이러한 복합성 이론을 예술의 차원에 적용시키면, 모더니즘 이후에 회화가 나아갈 길은 사방으로 열리게 된다. 상이한 매체들과 함께 관계를 형성하거나, 평면의 일루전을 상상력으로 조직함으로서 혹은 환경과 관계함으로서 얼마든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작가가 회화 단위들 간의 상호작용과 간섭을 북돋움으로서, 수백 가지의 질서를 이룬 복잡성의 체계는 생겨날 수 있다. 음과 양이 우주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돌고 도는 것처럼, 회화 체계의 복잡성도 불확실성을 주제로 유기적 변환의 과정을 거듭할 것이다. 덕분에 과거 모더니즘에서 고립된 부분들의 수준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던 다양하고 유연해진 회화 작업들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덜 결정론적이고 더욱더 상관적인 회화의 지평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서영희(1957- ) 프랑스 파리 제1대학 현대미술사 박사. 현 홍익대 미술대학 조교수, 아트타임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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