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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이 필요 없는 세상

전강옥

어느 학술 세미나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대학에서 과를 설치해 조각을 가르치기 때문에 조각이 있는 것이지, 만일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없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조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미 다른 학술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

해마다 1.000여 명의 조각과 학생이 졸업하지만 취업이 마땅치 않다. 실용적인 과를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어려운 마당에 조각과 출신을 불러 줄 곳은 한군데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조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일부 대학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경영대, 의대 등의 실용학문을 집중 육성하고 문리대 등의 '비실용' 학문은 포기하는 변혁을 추진 중이다. 실용성이 없는 조각과가 대학에서 퇴출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몇몇 지방대 조각과는 학생 부족으로 이미 없어졌거나 폐과를 앞두고 있다.

조각의 비실용성을 이제야 새삼 발견한 듯 하지만 2만5.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만들었을 때부터 이 물건이 실용적이었던 적은 없다. 그런데도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이 불필요한 물건에 집착한 것은 실용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정신적 필요성 때문이다. 인간은 조각이라는 쓸모 없는 돌덩어리를 만들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하는 불합리한 본성의 소유자다.

호모 사피엔스는 흙으로 인간을 빚은 신을 모방했다. 신을 흉내 낸 창조 행위는 인간 자신이 동물로부터 분리된 어떤 존재임을 발견하도록 하였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적어도 인간이 무엇인지 답할 수 있는 어떤 물건이다. 조각은 창조하는 인간 존재의 신비로움을 증언한다.

인간은 조각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자기 안의 폭력과 야만을 순화시켜왔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조각가의 망치질이 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폭력성을 창조적 힘으로 변환시킨다고 하였다. '인간이 지금까지 손에 넣은 최고의 윤리적 획득물'은 조각가의 망치다. 조각은 인간 자신을 승화시킨다.

조각이 필요 없는 세상은 인간의 가치와 창의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세계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러한 미래를 그려 보인다. 안정을 목표로 하는 신세계의 가장 큰 위협은 인간의 감정이다. <멋진 신세계>는 불안, 두려움, 슬픔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쾌락을 제공하는 대신 인간의 감정과 개성을 제거한다. 예술은 금지된다.

시장 논리와 실용적 가치에 치중하여 기초 학문을 포기하는 것은 <멋진 신세계>의 영혼 없는 젊은이들을 길러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창의력 없는 인재들은 실업률 해소에 다소 도움이 될망정 국제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한다. 실업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쟁력을 키우려면 대학에서 실용 못지않게 창의력 배양을 더 장려해야 한다.

조소과 졸업생들의 실업 해결도 과를 없애기보다 예술 시장을 활성화하고 예술품 수요를 확대할 수 있는 방안과 예술 관련 산업의 개발에 의한 일자리 창출 방식으로 논의해야 한다. 프랑스처럼 예술가에 대한 정부 지원도 필요하다. 미니어처, 3D 그래픽, 특수 조형물, 캐릭터, 장난감, 영화 특수 효과, 영화 소품 등의 제작과 조경, 건축, 도시 디자인과의 연관성 확대 등을 통해 조소과 졸업생들의 경제 활동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조각의 양식과 형태는 변할지언정 대학에서 조각과를 없애더라도 조각은 없어지지 않는다. 실용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정신적 필요성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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