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소문 포럼] 백남준의 엉덩이, 백남준의 귀환

정재숙

백남준(白南準) 선생이 뭘 해서 유명한 예술가였는지 모르는 사람도 해외 토픽을 탄 그의 엉덩이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 같다. 그것도 미합중국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훌렁 내렸으니 불경죄나 괘씸죄를 걸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1998년 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섹스 스캔들’로 시끄럽던 때 일이다. 그해 6월 9일 저녁,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대중 대통령 내외를 위해 백악관 국빈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 초대받은 백남준 선생은 2년 전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가 된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싣고 만찬장에 들어섰다. 백 선생이 두 나라 대통령 앞에 이르러 예를 갖추려 지팡이를 잡고 일어선 순간, 바지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백 선생의 엉덩이가 노출됐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양국 정상은 예상치 못한 해프닝에 얼굴이 발개졌다.

이날 밤 백 선생의 행동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클린턴 대통령의 부도덕한 행동을 에둘러 꾸짖는 행위예술이었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환자의 실수였다, 장난기 많은 백 선생이 엄숙한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예술가의 기질이었다 등등 시끄러웠지만 정작 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백남준(1932~2006) 선생이 누구인가. 20세기 예술의 지형을 뒤흔든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지구 도시를 연결하는 위성아트의 선구자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1950년 열여덟 살에 일본으로, 이어 독일로 건너가 미학과 철학, 작곡과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나서 당대의 전위예술가로 유럽과 미국을 휘젓고 다녔다. 살아서 한국에 자주 오지 못했던 그는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했다. 2008년 10월 경기도 용인에 문을 연 백남준아트센터에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이름까지 직접 붙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흔네 살에 ‘아리랑’과 ‘엄마’를 흥얼거리며 먼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이래저래 우리는 그를 몰랐다. 엄청난 독서가였고, 독설가였으며, 수많은 글을 남긴 백남준의 책 한 권이 그동안 국내에 출간되지 못했다는 게 기이할 지경이다.

이 사각지대를 뚫고 드디어 ‘백남준 총서’ 두 권이 한꺼번에 발간된 지난 2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장은 ‘백남준의 귀환’을 알리는 잔칫집이었다. 영상으로 돌아온 백남준은 퍼포먼스 기록 필름 속에서도 엉덩이를 깠다. 백악관의 해프닝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엉덩이에 선명한 몽고반점, 황색인종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했다. 서구 백인 중심의 헤게모니를 뒤흔든 백남준의 ‘빅뱅’은 북방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전사를 떠오르게 한다. 몽골 샤머니즘을 행위예술과 미디어 아트로 변주한 그가 남긴 말은 엉덩이 퍼포먼스의 진실을 드러낸다.

“한국에서는 말[言]을 앞세우는 국수적인 애국자가 늘 이기는 것 같다. 세계주의자가 늘 패배하는 나라에서는 문화의 시야가 좁아진다. 이제는 군사독재도 사라졌으니 한번 모두가 뭉쳐 뛰어볼 만하지 않은가. 한민족은 기마민족의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자꾸 뻗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백남준 선생을 단순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한정했던 지금까지의 기억을 지우개로 싹 지워야 할지 모른다. 백남준아트센터 이영철 관장의 지적처럼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세기적인 작가’를 재발견해야 할 의무가 백 선생과 같은 엉덩이를 하고 태어난 우리에게 있다. 오죽 했으면 백 선생 스스로 “황색 재앙! 그게 나다”라고 했을까.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저평가하고 외면하는 서구 예술계를 비판하기보다 한국을 백남준 연구의 발신지로 삼는 전략이 필요한 때다.

백남준 선생은 생전에 “21세기 예술 가운데 뇌에 담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만이 살아남으리라”고 예언했다. 콘텐트의 중요함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상식과 틀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때문에 수시로 파괴되고 변해야 마땅하다고 본 그에게 삶은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글로벌 그루브(범지구적인 한판 놀이)’였다.

말년에 이르러 당뇨병 후유증으로 한쪽 시력까지 잃은 그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백 선생은 특유의 윙크에 해학을 담아 말했다고 한다. “일목요연(一目瞭然), 외눈깔이라 더 잘 보인다네.”

<<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