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문화예술위 ‘구로동 시대’

노재현

서울지하철 신도림역 2번 출구. 역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3층짜리 아담한 갈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외벽에는 ‘예술현장의 동반자 ARKO(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새로운 문화예술의 시대를 열겠습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6일부터 나흘간 5t 트럭 50대 분량의 짐이 대학로에서 여기로 옮겨진다. 1976년 10월 동숭동의 옛 서울대 본관 건물에 자리 잡았던 문화예술위원회가 33년6개월 만에 구로동 청사로 이전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위 ‘구로동 시대’의 개막이다.

개인적으로 구로동이나 인근 가리봉동은 기자 초년병 시절의 기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80년대의 구로동은 노사분규·노동운동의 대명사였다. 1986년 3월 19일 가리봉 오거리에서 벌어진 ‘모세미용실 점거사건’은 지금도 가슴 아프다. 미용실을 점거해 창밖에 대고 구호를 외치던 노동운동가들 중 한 명이 경찰의 체포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다. 알고 보니 고향 후배였다. 전북 정읍에서 자란 작가 신경숙은 70년대 말 상경해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저녁에는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에 다녔다. 그의 잠자리는 가리봉동의 속칭 ‘벌집촌’이었다. 신 작가의 체험은 소설 『외딴방』에 그대로 녹아 있다. “자꾸 공순이, 공순이, 캐샇지 말어예. 어디 뭐 대학생이 씨가 따로 있어예?”…. 이문열이 87년에 발표한 작품 『구로 아리랑』의 주인공은 여공(女工)이다. 2년 뒤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산업화 과정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구로공단은 그러나 600여 개의 IT(정보기술)·영상 관련 업체가 자리 잡은 ‘서울디지털 산업단지’로 이미 변신했다. 강남의 테헤란로에 있던 IT 기업들 상당수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구로공단역’이던 지하철역 이름도 2004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변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기억만 80년대의 벌집촌 시절에 머물러 있을 뿐, 구로동 일대는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화예술위가 새로 자리 잡은 구로5동 부근만 해도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하고 테크노마트·서부금융센터가 우뚝 솟아 있다. 내년 9월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잇는 ‘디큐브 시티’는 42층짜리 호텔과 문화쇼핑몰·아파트로 구성된다. 쇼핑몰에는 1270석의 뮤지컬 전용극장과 450석 소극장이 들어선다. 여기에 연 800억원의 예산으로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문화예술위원회가 이사를 온 것이다. 산업화의 상징이던 구로동이 예술의 메카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인 셈이다. 예술위 한 간부가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단순한 장소의 이전이 아닌 가치(價値)의 이전”이다.

나는 서울 시내에서 그동안 문화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로 비쳐졌던 구로구·영등포구·금천구 등이 문화예술위 이전을 발판 삼아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30여 개의 소극장이 들어서 있는 대학로는 진작에 공연예술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홍대앞은 인디음악의 성지(聖地)다. 구로동은 이들과 차별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디지털단지의 첨단기술과 가리봉동·대림동·가산동에 몰려 있는 수만 명의 외국인 근로자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다원·퓨전 예술과 다문화(多文化)의 중심축 역할을 구로동이 맡아야 한다. 구로동발(發) 디지털아트·미디어아트가 전국으로 세계로 발신되고, 아시아 각국 문화가 구로동이라는 용광로에서 녹아내려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작년 9월 구로디지털단지 일대에서 아시아 최초로 열렸던 ‘국제 초(超)단편영화제’ 같은 행사가 좋은 모델이다. 3분 안팎의 영상작품들이 극장은 물론 지하철·마을버스의 모니터, 건물 외벽에서도 상영돼 ‘도시가 영상을 입다’라는 주제를 실감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문화예술위는 최근 인원·조직을 줄이고 임금을 깎고 노조전임자를 줄이는 등 군살빼기를 단행했다. 내친 김에 서울의 ‘문화지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보라. 70~80년대 구로동이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모두가 느끼도록 말이다.

- 2010. 04. 09 중앙일보<<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