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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시회 풍경

성혜영

설치미술일까, 퍼포먼스일까? 지난 주말,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의 사후 400주년 기념 전시가 막바지에 이른 교토 국립박물관에는 굽이굽이 노란 양산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노란색을 좋아한다던가? 황금색은 절대권력의 상징이라지. 대지미술의 설치작가 크리스토도 노란색 파라솔을 애용하곤 했는데….

푸른 5월, 박물관 정원을 휘감고 있는 노란 물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이상기온 탓에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뙤약볕이었지만 ‘입장까지 90분’ 쯤이야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다.

초입의 티켓 판매기 앞에서 지갑을 열고 있는데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한 노부인이 말을 걸어왔다. 초대권이 한 장 남았으니 그걸 주겠단다. 어리바리한 외국인이라는 걸 들켜버린 게지. 순간 일본인의 ‘혼네’(속마음)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지만, 밑질 것도 없는 일이라 그러마고 했다. 그러나 표 값을 주려고 하자 “아닙니다. 그걸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고는 한사코 사양했다.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이상의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일본어도 짧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노부인은 총총 사라졌다.

티켓을 손에 쥐고 긴 줄의 꼬리를 찾아가는데 한 쪽에 노란 양산들이 정연하게 꽂혀 있는 스탠드가 눈에 들어왔다. ‘볕이 뜨겁습니다. 필요하면 사용하고 반납해 주세요’라는 친절한 안내문과 함께. 나를 유혹했던 노란 물결의 정체는 설치미술도, 퍼포먼스도 아닌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고 있던 노란 양산이었다. 아니, 박물관이 후원하고 익명의 관객들이 즉석에서 캐스팅된 아주 특별한 퍼포먼스였다.


나는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야 했다. 그 진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양산을 들 수 없었고 또 종종 대열에서 이탈함으로써 퍼포먼스의 질서를 망치고 말았으니. 덕분에 뙤약볕 속 90여분은 쉬 지나갔다.

명성대로 전시는 장관이었다. 하세가와 도하쿠가 누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천하를 호령하던 사무라이의 절대권력 속에 꽃핀 모모야마 문화. 그 정점에 있는 그의 장벽화는 곧 ‘일본의 마음’으로까지 추앙된다.

그러나 네 마음 내 마음 할 것 없이 마음이란 게 어디 한 가지던가. 고요하고 담백한 흑백 수묵화와 역동적 화려함의 극치인 금빛 장벽화 사이를 거니노라니, 권력과 예술의 빛과 그림자 속에 수천수만 갈래의 마음들이 일렁이는 듯도 했다.

전시의 경험은 그 안팎의 풍경으로 달라진다. 이번 전시도 그랬다. 본의 아니게 박물관의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대가는 내 얼굴에 다소의 거뭇거뭇한 기미를 남겼고, 노부인의 친절은 두툼한 화집을 남겼다. 거의 티켓 값의 두 배가 들기는 했다. 무엇보다도 하세가와 도하쿠의 그림은 친절한 노부인, 노란 양산 퍼포먼스와 함께 ‘일본의 마음’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했다. 그게 뭔지는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

성혜영(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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