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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를 꿈꿨지만, 삶은 추상화일 수 없더이다

도종환

‘플랜더스의 개’ 주인공 소년처럼 가난으로 붓을 놔야하는 현실이 술 마시게,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걸 ‘문학의 끼’로 본 선배들이 저를 문학 서클로 불러들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시인이 되었어요?”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길을 잘못 들어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저는 어릴 때 나중에 크면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며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도화지가 부족하면 신문지에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나 중학교 때는 만화에 폭 빠져 있던 때이기도 해서 만화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제가 그린 만화를 동네 애들이 5원이나 10원을 주고 사가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은 재미있는 분이셨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도 재미있게 하셔서 미술시간에는 늘 웃음이 넘쳐났으며, 실력도 좋아 아이들이 잘 따랐습니다. 수업 중에 설명을 하시면서 힘들이지 않고 칠판에 슥슥 그림을 그리셨는데 분필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에 감탄하며 공책에 따라 그리곤 했습니다.

방학 숙제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오는 숙제를 내주신 적이 있었는데 외사촌 형들이 사용하고 쌓아둔 미술교과서나 잡지 같은 데서 그림을 모아 스크랩을 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모네의 <수련>, 고갱의 <타히티 여인들>, 고흐의 <자화상>이나 <해바라기> 그림 등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 주는 묵직한 사실주의 그림의 무게나 자코메티의 조각이 주는 가늘고 긴 인체로 형상화한 독특한 아름다움도 좋았지만 고갱의 그림이 주는 원색의 강렬함과 원시성에 더 끌리곤 했습니다.

황토색이나 붉고 노란 원색으로 처리한 타히티 여인들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여 그려보기도 하고, 미술 선생님께 배운 대로 화학염료를 사용하여 유리판을 얇게 파 나가며 그 선들 위에 채색을 입힌 타히티 여인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김홍도의 <맹호도>를 유리판에 새겨 보기도 했습니다. 귀를 자른 채 얼굴 한쪽을 흰 붕대로 싸매고 있는 고흐의 눈빛과 자화상의 바탕이 된 붉은색은 강렬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미술선생님이 한번은 수업중에 인상주의 선구자인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이란 작품을 출품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는데 그 작품들로 낙선자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낙선자 전시회라는 이름이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기존의 체제나 구조에 편입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지켜나가는 배짱이나 불온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역사적, 신화적 배경이 없는 인물 그림을 그리거나 데생이나 색채나 원근, 명암 같은 기본을 지키지 않고 미완성 초벌 그림처럼 희미한 순간의 인상만을 그려 놓았다고 조롱당하고 멸시를 받았음에도 그 경멸의 언어를 기꺼이 자기들의 이름으로 삼은 인상파 화가들의 자세가 멋있어 보였습니다.

겨울에는 미술 시간에 그린 성탄절 카드와 연하장을 모아 문화원 전시관에서 바자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그린 그림이지만 선생님들과 어른들이 많이 사 주셨습니다. 대개 카드 한 장에 오백원에 사 주셨는데 제 그림만은 삼천원에 팔렸다고 미술선생님이 좋아하셨습니다. 그때는 성탄절이나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보내는 것이 큰 인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때부터 해마다 12월이 되면 저는 직접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서 친구나 어른들께 보내곤 했습니다. 녹색의 색지에 한 척의 정박한 거룻배나 장승의 토속적인 아름다움, 겹쳐지며 뻗어나가는 산의 능선과 그 위를 나는 몇마리의 학을 채색으로 그려 흰 카드지에 붙이면 예쁜 카드가 되었습니다. 도시락 곽을 만드는 얇은 직사각형의 나뭇조각을 불에 달군 쇠로 지져 다양한 모양을 만든 다음에 그걸 붙이고 간단한 삽화를 곁들여 새로운 연하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작은 소품들이지만 정성을 들여 직접 만든 작품들이라서 받는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린 그림 중의 한 점은 원주시와 자매결연한 미국의 어느 도시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 화가를 꿈꿨지만, 삶은 추상화일 수 없더이다

그러나 정작 대학 진학을 해야 할 때는 미대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미대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미대가 아니라 대학 자체를 갈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 보내 줄 수 있는지 상의할 부모가 옆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상태로 있다가 결국 국가에서 등록금 전액을 대주는 국립사범대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학과를 정할 때도 돈이 제일 적게 들어 보이는 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그게 국어교육과였습니다. 대학은 고향에 있는 국립사범대를 선택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도시 빈민이 되어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다시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월세 이천원짜리 단칸방에 식구들은 오글오글 모여 있었습니다. 그 윗목에 저도 제 고단한 영혼을 부려놓고 차갑게 앉아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물감을 팔레트에 짜서 몇 점의 소품을 그리다가 저는 천천히 붓을 놓아야 했습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위다의 작품<플랜더스의 개>를 생각했습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 소년 네로를 생각했습니다. 콩쿠르에 출품한 작품은 낙선하고, 사랑하는 아로아는 만날 수 없고, 눈발은 몰아치는데, 의지할 단 한 사람 할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뜬 뒤, 그렇게 보고 싶던 루벤스의 그림 밑에서 쓸쓸히 얼어 죽어가던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도 가난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삶을 생각했습니다. 마을공동체에서 소외당하고, 정직해도 그 정직함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 순진한 사랑의 마음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계급의 벽 앞에서 배척당한 뒤, 죽고 나서야 동정을 받는 한 소년의 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외롭고 가난해서 화가가 될 수 없던 주인공 소년을. 지금도 그 소년은 내 가슴에 남아 차가운 눈발 속을 혼자 걸어가고 있습니다.

화가가 되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좌절이 저를 술 마시게 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자괴감이 저를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 절망과 좌절이 폭음과 만행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책가방에 소주병, 소주잔을 넣어 가지고 다니다 교수님이 칠판에 판서하는 동안에 그걸 꺼내 따라 마시기도 했습니다. 교정 어디에 쓰러져 있는 저를 친구들이 발견해서 자취방에다 끌어다 놓았다는데 전혀 기억이 없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문학에 끼가 있어서 그러는 줄 알고 선배들이 문학 서클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그때 그만 길을 잘못 들어 문학의 길로 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서툴고 미숙하고 되바라지고 대책 없는 채 객기로 충만한 이십대가 지나가던 어느 날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전시회를 한다는 포스터를 길에서 보았습니다.

선생님, 모래밭이 있는 당신의 화폭을 지나 물방울 모래 한 알 버리지 않고 소중히 걸어가신 당신의 맨발을 만났습니다.


졸업식날 선생님께서 주신 만든 꽃 세 송이를 한 해가 멀게 옮기는 이삿짐마다 꾸려 넣은 것은 저도 아름다운 화가가 되리라는 소망이어서 먼지 덮이는 삶을 늦도록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 배운 밑그림으론 자화상을 그리기가 가장 좋아 빛과 어둠 목탄으로 새기며 오래도록 여백에 넣을 정지된 풍경을 떠올리곤 했지요.

(……)

선생님, 삶은 추상화일 수 없고 어느 아름다움도 사람의 일과 떨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외곬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삶의 방울일 때 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십오 년 가까이 못 뵈온 선생님을 오늘 화랑에서 그림으로만 뵈옵고 물러갑니다.

-졸시 <화랑에서> 중에서
» 도종환 시인

미술 선생님은 그때 물방울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극사실주의로 그리는 물방울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화가의 길을 가고 있는 선생님의 그림이 불온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아 했습니다. 저의 생각도 삶도 불온하기 짝이 없는 때문이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그림 이철수 -한겨레 20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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