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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여백] :미술

김만석

전화가 온 것은 집 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나서였다. 불길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당혹스러움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나는 어디냐고 물었고 그는 '일광'이라고 답했다.

혹시 원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실 앞 일광 해수욕장 한쪽으로 보이는 '바위'가 폭파하기라도 한 것일까라고 물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건'을 일으키고 이리저리 수습을 하는 청년처럼, 가쁜 호흡으로 핵과 바위가 문제라는 말을 했다. 아니, 그는 절대로 핵과 바위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통화하는 내내 핵과 바위가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가 일으킨 '사건'에는 핵과 바위가 핵심적이었다.

사건은 '대안공간 반디'의 디렉터이자 작가 김성연의 개인전('섬') 전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광 해수욕장 앞 바다의 바위를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바위 이미지를 변주하는 것이 작업의 주요한 형태였다. 그러니까, 바위를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대상으로 보여주지 않고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인 방식으로 처리해 바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요컨대, 그의 작업은 바위를 '위기'에 빠뜨림으로써 오히려 '바위'를 보존하는 기획으로 전시를 꾸릴 예정이었다. 관객들이 화면 앞으로 다가가면 바위 이미지를 작아지게 만들고 관객이 멀어지면 바위 이미지를 커지게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관객이 가까이 다가올 때 바위가 사라지는 게 더 좋을 거 같다는 말을 했다.

원자력발전소가 인근에 있고 해수욕장의 바위는 이른바 절멸의 위기에 항상 노출되어 있으니 말이다. 절멸의 위기와 공포에 응답하는 미술적 응답이라고 할까? 그러나 정작 전시 당일에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을 구성하지 않았다. 한 시간여 통화가 도루묵이었지만, 그게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당일 전시장에서 나는 상시적인 절멸의 위기를 돌파하는 예술적 방식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시를 열기 위해 다른 동료 작가들이 달려와 밤새 빔 프로젝트와 모니터를 배치하고 전선과 전원을 정리하는 등 에너지를 무상으로 투여했던 것이다. 전시 자체보다 전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 예술이었고 그 무상의 에너지와 일종의 연대야말로 예술이 갖는 고유한 원천임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달리 말해, 예술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달리 그 전시는 고독한 작가에 의해 '창조'되는 작업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구성한 공통으로 생산한 전시였다. 그 전시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의 '소유'도 아니고 그저 모두가 함께 지속적으로 구성해내는 작업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터이다. 자본으로 전환되지 않는 열정과 무상으로 나누는 미술적 실천은 그 누구에게도 귀속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절멸의 위기가 늘 공통적인 것이라면, 그의 작업은 그리하여 우리의 작업은 핵이라는 공포와 바위 파괴에 정면으로 맞서는 작업을 수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로부터, 그와 더불어 우리는 모두 예술가가 되었다는 것. 이제 핵과 바위는 우리 앞에서 떠날 수 없다.

-부산일보 20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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