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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이성계 御眞(어진)

의학계 원로인 이성낙 가천의대 명예총장은 일흔 넘어 명지대 미술사 박사과정에 들어가 조선 초상화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 옛 초상화는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 얼굴만 보고도 그 사람이 겪었을 갖가지 질병, 심지어 사인(死因)까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영조 때 대사헌을 지낸 송창명의 초상화에서 피부 멜라닌 색소가 줄어들어 생기는 백반증 흔적을 찾아냈다.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오명항의 초상화에선 유난히 검게 칠한 얼굴을 보고 간암 말기 증상을 읽었다.

▶조선 초상화의 무서운 사실 추구 정신은 지엄하신 임금을 그린 어진(御眞)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기록들을 보면 태조 이성계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큰 귀가 특이했다고 한다. 전주 경기전에 모셔놓은 이성계 어진이 딱 그 모습이다. 그림 속 이성계는 큰 몸집에 양쪽 귀가 유난스럽다 할 정도로 크다. 오른쪽 눈썹 위에는 지름 0.7~0.8㎝ 크기 사마귀가 그려져 있다.

▶조선 초 그렸던 이성계 어진이 낡고 빛 바래자 고종 때인 1872년 옮겨 그린 것이 경기전 어진이다. 조선 왕실 최고 어른의 이마에 난 사마귀는 흠으로 비칠 수 있다. 그걸 곧이곧대로 그리는 것은 이성계나 그 후손인 왕들에게 무엄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털끝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고 믿은 조선 초 화가의 붓끝에서 태조 이성계의 사마귀도 벗어나지 못했다. 500년 뒤 후배들 역시 그 정신에 따라 선배 그림을 옮기면서 국조(國祖) 얼굴에 사마귀를 남겨놓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 철저했던 것은 초상화를 미술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물 자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진을 그릴 때는 당대 최고 화가들이 보통 6~7명, 많게는 13명까지 참여했다. 화가들은 화폭에 임금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작업실을 들고날 때마다 그림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외적이 쳐들어와 피란을 가면 국왕과 관리들은 함께 피란 온 선대(先代)의 어진을 앞에 두고 통곡하기도 했다. 어진을 모신 전각에 불이 나면 왕이 소복을 하고 사흘간 곡을 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이 보물 931호 이성계 어진을 국보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26점이나 되던 이성계 어진 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한 점이다. 전해오는 조선 왕들의 공식 어진 중에서도 완전하게 남은 유일한 전신상이어서 더욱 소중하다. 거짓과 왜곡이 판치고 번지르르한 포장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 사실을 생명처럼 여겼던 조선시대 초상화 정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조선일보2012.4.2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26/20120426031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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