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취임 100일을 맞은 권영빈(69) 제4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비교적 연령이 높은 미술 담당 일간지 기자 몇 명을 오찬에 초대했다. 2년마다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운영에 대한 의견을 듣고 내년 행사 계획을 세우기 위한 자리였다. 위원장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예술위의 전신인 문화예술진흥원을 포함해 역대 기관장이 공식 기자간담회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스스럼없이 언론과 의견을 주고받는 기회를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각자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다. “전시 기획자인 커미셔너의 성향에 따라 작가 선정이 다소 편중된다.” “전시 진행 과정 일체를 기록으로 남겨 다음 행사 때 매뉴얼로 삼아야 한다.” 권 위원장은 이런저런 의견에 귀 기울이며 적극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권 위원장은 “문화예술은 우리가 심고 가꾸어야 할 나무”라면서 ‘예술나무(Arts Tree) 심기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예술나무를 뿌리 내리고 키우기 위한 방안으로 ‘예술나무 브랜드 론칭’ ‘예술나무 포럼 발족’ ‘예술옹호 1000인 선언’ ‘개인·기업·예술가 참여 예술나눔 기부캠페인’ ‘1인 1예 및 1사 1예 운동’ ‘민·관·재계 컨소시엄 프로젝트형 기부사업’ 등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아름다운재단이 밝힌 ‘2010 기빙 코리아(Giving Korea)’ 자료집에 따르면 개인이 각종 단체나 기관 등에 기부한 전체 액수는 1조4000억원에 달한다. 기부 대상별로 보면 자선단체가 9300억원(66.4%)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종교단체로 3472억원(24.8%)을 차지했다. 하지만 문화예술 분야는 겨우 28억원(0.2%)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권 위원장은 ‘예술나무 심기 운동’을 통해 문화 기부를 확산시키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술위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정부 기금을 지원하는 기존의 업무 스타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 위원장은 그 일환으로 ‘시멘트 도심에 예술의 꽃 피우기’ ‘문화나눔으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기’ ‘한류, 기초예술로 뒷받침’ ‘차세대 예술인력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확대’ ‘대학로에 융·복합 예술창작 공간 조성’ ‘지역 고유문화 브랜드 발굴·지원’ 등의 계획을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2월 발표한 국가브랜드지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경제, 과학 등 하드파워는 평균(100)을 넘어섰지만 문화예술 등 소프트파워는 평균 이하(97)로 나타났다. 일본(143) 독일(136) 미국(135) 프랑스(127) 등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다. 문화예술의 경제적·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이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예술위는 그동안 정치적 간섭에 시달려온 것이 사실이다. 김병익 1대 위원장은 ‘월드뮤직페스티벌’ 개최를 두고 내부 갈등이 빚어지면서 도중하차했다. 김정헌 2대 위원장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시절 이른바 ‘찍어내기 인사’로 해임된 후 소송을 통해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아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오광수 3대 위원장과 함께 ‘한 지붕 두 위원장’이라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위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권 위원장이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사실 권 위원장은 내년에 정권이 바뀌면 자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애써 심은 예술나무가 꽃 피기도 전에 꺾여버린다면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국민일보 201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