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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중국내 고구려 유적지 유감

정혁훈

습하고 어두컴컴한 무덤 내부는 찌는 듯한 바깥 날씨와 달리 냉기가 서늘해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화강암 벽돌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좁은 격실에 여행객 20여 명이 촘촘히 자리를 잡자 마침내 가이드의 손전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비추는 불빛을 따라간 곳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난생 처음 고구려 벽화 `사신도(四神圖)`를 접한 한국인 관람객들 입에서는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1500년이 지났음에도 색상마저 선명한 `선조의 숨결`이 온몸으로 느껴지자 분위기는 어느새 숙연해졌다. 

바로 그 순간, 분위기를 확 깨는 괴성이 쩌렁 울렸다. 입장 순서를 기다리며 밖에서 대기하던 한 중국인 관광객의 거친 목소리였다. '시간이 됐으니 그만하고 빨리 나가라'며 다그치는 그의 목소리는 오만과 무례로 가득했다. 조선족 동포 가이드는 '잠시 기다려 달라'며 그를 다독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들 언짢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에 겪은 일이다. 중국에 살다 보면 가끔 예기치 않은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고구려가 400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국내성 터에서 당한 봉변이어서 기분은 더 나빴다. 그러나 정작 이날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고구려 귀족의 묘로 추정되는 오회분 5호묘 내에서 겪은 봉변이야 몰상식한 인간이 빚어낸 해프닝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지만 중국 당국에 의해 방치되듯 관리되고 있는 고구려 유적지의 현실은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5호묘만 하더라도 행패를 부린 중국인이 홧김에 벽화를 손으로 문대도 막을 수 있는 보호장치가 전혀 없었다. 몇 년 전까지 내부를 비추던 강한 조명은 치웠다고 하지만 사람 손길에는 완전 무방비였다. 숨 쉴 때 내뿜는 이산화탄소가 색을 바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조차 궁금했다. 

그나마 유리벽 건물을 씌워 보호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도 허점이 있었다. 비와 바람은 막고 있었지만 관람객이 만지고 사진 찍는 것을 적절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경비원이 한 명 배치돼 있었지만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관리 수준은 참담한 지경이었다. 축석과 봉분이 상당 부분 유실돼 왕릉의 위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무너져 내리는 봉분 사이로 관광객이 오르내리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었다. 짓밟히는 무덤을 보고 있자니 마음까지 짓밟히는 심정이었지만 마땅히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더욱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남의 땅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더라도 유적지에 대한 보존권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 길을 돌아 애써 찾아간 우리 국민 마음에 더 이상 상처가 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했으면 좋겠다. 


- 매일경제 2012.08.06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4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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