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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시선]만화책을 펼치자

박인하

1990년대 중반, 만화가 좋아 만화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글을 쓰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일간지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순전히 ‘운빨’이라고 생각한다. (신춘문예 만화평론은 다섯 해인가 지속됐다가 사라졌다.) 햇병아리, 얼치기 평론가이지만, 다른 글쟁이들의 만화에 대한 비유는 영 거슬렸다. 특히 영화평에 자주 등장한 문장이었는데, 뭔가 이야기 전개가 느슨하거나 황당한 연출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만화 같은’이라는 수식이 등장했다. 난 이 수식을 참 싫어했다. 만화를 무시한다고 분개하기도 했고, 그런 표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자본과 비평이 만나 활짝 피어나던 영화산업, 영화문화가 부러웠고 배아팠다.만화 같은 영화, 만화 같은 드라마, 만화 같은 뮤직 비디오, 만화 같은 인생…. 리얼리티가 떨어지거나, 스테레오 타입이거나 아무튼 뭔가 좀 부족한 모든 것들을 전부 만화 같았다고들 했다. 그게 정말 싫었고, 만화 안에 내재한 가치를 찾으려 동분서주했다.

 만화 같은 것들을 경계하며 세상은 만화가 꿈꾸던 21세기가 됐다. 요즘은 만화 같다는 표현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그만큼 만화의 시민권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 시절 만화 같다고 한꺼번에 정의된 사람, 이야기, 사건, 표현 등은 뭔가 유사한 맥락에 존재했다. 그건 조금은 부족하지만 악의적이지 않은, 어수룩한 낭만과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만화 같은 것들을 광속으로 밀어냈다. 빠름 빠름 빠름!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재빨리 아파트를 사고팔았고, 주식이 오르면 얼른 주식과 펀드에 돈을 넣었다. 만화 같은 것들을 밀어낸 자리를 차지한 건 빛나는 돈의 아우라를 두른 욕망. ‘부자 되세요’ 따위의 카피가 CF에 지겹게 나올 때부터 우리 삶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휘황찬한한 돈의 아우라는 모든 추악한 걸 감추어 버렸다. 그렇게 어떤 이는 대통령이 됐고, 1% 살찌고 99%는 야위어갔다. 심지어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누구는 폐쇄된 직장을 지키고, 누구는 그 직장을 빼앗고 노조를 깨기위해 소화기를 뿌린다. 시끄러운 컨택터스 사건을 보라. TV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에 나오는 용역들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이유는 ‘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난 10여년간 우리가 밀어낸 만화 같은 것들이다. 1970~1980년대에 만화를 본 40대들이라면 명랑만화를 기억할 것이다. 꺼벙이의 어리숙함, 고집세의 밉지 않은 고집, 두심이의 모험, 요철발명왕의 황당한 상상력, 번데기 야구단 주인공들의 끈기, 오학년오반 삼총사의 우정. 아마 하나하나 기억날 것이다. 

1980~1990년대에 만화를 본 30대들이라면 아마 이런 만화가 기억날 것이다. 새엄마를 오해하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오늘도 달리는 소녀 하니, 낯선 이방인들의 짓궂음이 함께하는 고길동씨네, 말썽꾸러기 학동들을 달래기 위해 늘 선대왕 이야기를 해 주는 맹꽁이 서당의 훈장님, 저 멀리 그린우드에서 이 세상으로 온 요정 핑크. 덧붙이자면 수도 없이 나올 그 시절의 만화들이다.

꺼벙이처럼 어리숙해지면 삶이 행복해진다. 고집세의 밉지 않은 고집은 공동체의 가치를 지킬 것이다. 두심이의 모험은 새로운 창의로 미래를 개척하게 할 것이고, 요철발명왕의 황당한 상상력은 놀라운 벤처정신과 다를 바 없다. 번데기 야구단 주인공들의 끈기는 좌절하는 당신의 오늘을 이길 힘이 된다. 오학년오반 삼총사의 순전한 우정은 경쟁이 아닌 협업의 사회를 만들 것이다. 소녀 하니와 새엄마의 화해는 무너지고 있는 가정을 새롭게 돌아보게 할 것이고, 모든 이방인들을 품어주는 소시민 고길동씨는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다름없다. 맹꽁이 서당 훈장님의 모습에서 공교육의 모델을 보고, 그린우드에서 온 요정 핑크를 통해 환상과 만난다.

우리는 이런 만화 같은 것들을 모조리 내 삶에서 밀어내고 팍팍하게도 살았다. 만화 같은 것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만화를 보자. 어떤 만화라도 좋다. 만화를 통해 내 삶을 느슨하게 풀어보자. 증오와 분노를 잠시 내려놓고, 허망한 키보드질도 그만두고, 만화를 보자. 가족이 있다면 가족과 함께 만화를 보자. 어느 순간, 내가 밀어냈던 만화 같은 것들을 다시 만날 때, 우리 삶은 행복의 길로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경향신문 2012.8.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0211529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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