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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라 시청자는 왜 구경꾼밖에 될 수 없을까

이진숙

이번 런던 올림픽에 여느 때보다 열광적이 됐던 것은 0.00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과학기술의 정밀함과 수없이 돌아가는 비디오 판독기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시각적 풍요로움 때문이었다. 100m 남자 결승에서 1위인 우사인 볼트와 2위의 차이는 0.12초였다. 이 0.12초를 우리는 어떻게 체험했는가? 만지지도 듣지도 못하고, 물론 냄새로 맡을 수도 없었다. 시간의 차이는 오직 슬로 모션을 통해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각이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순간이었다. 양학선의 체조경기 장면은 여러 카메라가 동시에 찍은 화면을 합성해 영화 ‘매트릭스’ 같은 영상으로 방영됐다. 마린 보이 박태환의 경기에서는 선수의 의지에 저항하는 물의 표면장력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장면들이 쏟아졌다. 스포츠가 쇼비즈니스에 가까운 볼거리가 되는 순간들이었다. 
나폴리 바닷가에서 격렬한 파도를 열심히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런 장면들을 보았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었을까? 수증기와 하나가 된 물을 그린 터너, 빛이 철렁대는 물을 그린 모네, 인공 수영장의 물을 장식적으로 표현했던 데이비드 호크니 등 많은 작가가 저마다 물을 그려 왔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본 것을 보지 못했다. 매개론의 주창자 레지스 드브레는 이런 신기술이 선보이는 새로운 시각적 체험은 새로운 이미지의 등장에 중요한 자극이 된다고 설명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예술가는 없다면서. 

드브레는 저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글항아리)에서 시각 이미지의 역사를 기술의 발전, 철학·역사·비평·심리학·사회학·기호학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해 설명한다. “태초에 이미지가 있었다”라고 선언할 만큼 저자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소통 방법으로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이미지는 인류의 탄생부터 존재했으며, 어떤 문자 문명보다 먼저 등장했고, 또 인류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르네상스와 19세기 말의 인상주의 시대는 시각 이미지가 시대의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낸 시기며, 심지어 글로 쓰인 사상사보다 더 앞서서 시대정신을 형상화했다. 

소위 ‘위지위그(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보는 대로 얻는다)’ 사회인 현대는 시각 이미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그는 사고방식, 과학적 패러다임,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는 징후를 알고 싶으면 도서관보다 차라리 현대미술관으로 가라고 주장한다. 매개론이라고 일컫는 다층적인 설명방식으로 방대한 이미지의 역사를 다시 기술하면서 그는 우리의 ‘상식’을 아예 바꾸자고 제안한다. 자율적인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오래된 착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미술사라는 허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예술’이라는 관념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이미지 역사의 한 형태일 뿐이다. 상당히 오랫동안 ‘예술’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특권을 누리던 미술사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서구 위주의 편협한 사고에서도 벗어난다. 

문화적 주도권을 가진 서구 소수 국가의 체험을 보편적인 원리인 양 주장하고 공격적으로 수출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미술사나 미술이론이라는 말이다. 동양권과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의 시각문화는 다른 궤도를 밟아 발전한 것이며, 서구에 견주어 미발전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미덕은 보편적인 예술사라는 환상을 깨고 각각 공동체의 고유한 예술사가 들어설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드브레는 서구 열강의 이론적 제국주의를 거두어들일 시동을 건 셈이다. 

그렇다면 동·서양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는 현대의 시각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현대사회는 1960년대 이후 TV의 보급과 더불어 본격적인 영상시대에 돌입하게 됐다. 이에 대해 그는 여러 가지 우려를 쏟아놓는다. 이미지는 어느 시대보다 넘쳐나지만 대부분 피상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프랑스 학자답게 강력한 자본을 앞세운 할리우드 문화를 정면으로 공격한다. 

인류 탄생 이래 이미지는 늘 공동체의 염원 속에서 태어나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제작 과정과 수용 과정에서 간접화되고 공허한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미지에 자기 공동체를 위한 자리는 없다. “가난한 나라도 훌륭한 시인과 소설가, 훌륭한 신문은 가질 수 있지만 좋은 텔레비전은 가질 수 없다”고 드브레는 말한다. 거대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생산 앞에 가난한 나라의 시청자는 무기력한 구경꾼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미국적 시각의 유포를 세계화라고 착각하는 상황에서는 지역의 특수한 역사와 자기 삶의 구체성을 상실한 ‘살균처리된’ 이미지들만이 양산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작국 자본의 이해가 표현된 이미지를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어리석은 추종자들만이 존재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피상적이고 공허한 이미지의 양산은 영상시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 변화를 타락으로 읽어버리는 지나친 조심성을 드브레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자기 공동체 발전에 유의미한 이미지라는 윤리를 내세우는 한 우리는 여전히 이 인문학자의 꼼꼼한 잔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과학의 질주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인간 공동체의 윤리는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 중앙선데이 2012.8.26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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