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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론을 재검토한다(9) 삼불 김원용의 자연미론

편집부


美醜를 초월한 아름다움...'자연' 개념 모호
한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김원용의 ‘한국의 미’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이 글은 1962년 ‘민족예술에서 본 한국의 미’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던 글의 일부를 수록한 것이다. 1980년대 초까지 교과서에 자리 잡았던 이 글은 미려한 감성적 언어로 당시 많은 고교생들에게 ‘한국의 미’라는 문제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해주었다.
“한국의 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자연의 미’라고 할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한국의 온화한 자연환경을 예찬하고 그 속에서 창출된 한국미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세상 또 어디에 흰구름 날아간 뒤의 맑은 한국 하늘 같은 어여쁨이 있을까. 이 맑은 하늘 밑, 부드러운 산수 속에 한국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의 세계요, 이 자연의 미가 바로 한국의 미다…美醜를 인식하기 이전, 미추의 세계를 완전 이탈한 미가 자연의 미다. 한국의 미에는 이러한 미 이전의 미가 있다.”
이 이래 김원용은 ‘한국 예술미의 성격’(1966), ‘한국 미술의 특색과 그 형성’(1973), ‘한국미술사’(1968), ‘한국 고미술의 이해’(1980) 등 여러 글에서 한국미의 성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고고학자이면서 미술사학자이기도 했던 그의 한국미론은 전적으로 한국 미술에 드러난 양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글을 풀어간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나 그 핵심은 ‘한국의 미’에서 밝혔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글에 서술된 그의 자연미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김원용은 시대나 지역을 무시하고 한국 미술의 특색을 공식화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일단 지역적 시간적인 분할고찰이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갖고 있었다. 또한 이전 다른 학자의 많은 저술들이 그러했듯이 고려나 조선의 미술, 그 중에서도 조선의 도자기를 염두에 두고 한국미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고고학과 미술사학 전문가로서 실증적 자세를 견지했던 그의 학풍에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한국미에 대한 논의는 늘 선사시대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미술의 특징에 대한 상세한 탐색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김원용은 한국 미술에 시대나 지역(혹은 매체)에 따른 차이가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결국은 전시대를 통관하는 특성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그의 다른 학술 논문에서 볼 수 있던 엄격한 실증적 자세가 직관적인 일반화로 급격히 전환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미술사학보다는 고고학계에 더 큰 업적을 남겼고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김원용은 실제로는 엄밀한 실증적 학풍의 外皮 안에 섬세한 예술적 감성이 內燃하고 있던 인물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餘技로 수묵화를 즐겨 그린 20세기의 문인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논의가 직관적인 일반화로 급격히 돌아서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한국 미술의 특색과 그 형성’에서 시대적 특성을 살펴본 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한국 고미술의 특색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금 차이는 있으나,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 재현하려는 자연주의요, 철저한 我의 배제이다.”
셋째, 김원용의 한국미관은 위의 인용한 글들에 제시된 바와 같이 ‘자연의 미’, ‘자연주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자연미론은 야나기 무네요시에서 고유섭 등으로 이어진 기존의 한국미론과 요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그는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김원용의 자연미론이 야나기의 한국미론에서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한국의 미’가 발표된 같은 해(1962)에 그가 쓴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관’에서 야니기의 미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데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한국 고미술의 이해’(1980)에서는 야나기와 고유섭 외에 디트리히 제켈 등의 한국미관을 거론하고 있는데, 특히 제켈의 견해에 주목한다. 세부적인 면에서는 이견을 밝히나, 결국은 여러 사람들의 소견이 제켈의 견해인 ①생명력 ②자연성 ③무관심으로 집약된다고 하며 스스로도 이에 공감을 표한다. “이러한 특성을 돌이켜 보면 결국 한국미술은 인공을 회피하는 자연에의 순응, 자연적인 것에의 기호로써 특징지워진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결국 자연적인 것에 미의 규준을 두는 자연주의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넷째, 김원용의 한국미론에서는 한국미술에 드러난 그러한 미적 특성이 어떤 배경에서 형성된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미술의 특색과 그 형성’(1973)에서 그는 “우리에게 더 문제가 되고 누구나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특색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특색이 어떻게 어떠한 배경이나 이유로 형성되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미’에서는 그것을 한국의 자연에서 찾았다. ‘한국미술의 특색과 그 형성’에서는 이것을 더 체계화하여 ①자연환경 ②경제 ③사회 ④종교사상의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온화한 자연환경에서 한국인이 자연에 대해 느끼는 행복감, 만족감, 친밀감이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가식 없고 순수하며 평화롭고 천진난만함이 생겨났고, 소수의 지배계급이 부를 독점한 사회에서 민간의 장인들이 소박하고 오염되지 않은 미술 표현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재래의 샤머니즘의 바탕 위에 뿌리를 내린 불교가 현실도피적인 체념의 철학을 알려주고 究極에는 그것이 해탈과 낙천 사상으로 발전해 장인들이 자연을 직시하고 안심입명하는 해탈자적 경지를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김원용 특유의 감성이 넘치는 자연미론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이론적으로는 논박의 대상이 될 만한 문제를 적잖이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가 한국미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즐겨 사용한 ‘자연주의’라는 용어의 문제가 있다. 서구에서 비롯된 문예 및 미술 사조로서 ‘자연주의’라는 용어는 현실이나 대상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경향이나 방법을 지칭한다. 이때 ‘자연’은 김원용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반드시 편안하거나 순진무구한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김원용이 이야기하는 ‘자연’은 오히려 도가적인 의미의 ‘자연’에 가깝다. 따라서 김원용이 사용한 ‘자연주의’는 기존의 이 개념의 통상적인 용례에 비추어 볼 때는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할 소지가 크다.
용어의 적절성과 별개로 ‘자연주의’(혹은 ‘자연의 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비판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인공이 끼어들 수 없는 자연의 미가 어떻게 인간이 만든 미술품의 미로 거론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자연의 미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작업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기법상 자연의 미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려 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작품에 임하는 정신세계가 무위자연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탁석산)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개념 정의상의 문제는 한국미를 거론한 대부분의 논자들에게 해당하는 문제이고 김원용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김원용의 여러 글에서 그가 한국미에 관한 거창한 혹은 엄밀한 이론을 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다만 그에게는 전문가로서 한국의 미술품을 많이 접하고 애호하며 해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그가 경험적으로 느낀 특성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의무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언어로의 표현은 필연적으로 개념화를 수반하고, 개념은 그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한국미나 한국 미술의 특성을 논리적으로 하자 없는, 보편타당성을 지닌 개념으로 추출하는 것이 과연 본질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또 그런 것을 과정상의 논리성이나 개념의 타당성만으로 따진다면 과연 한국미나 한국미술의 특성에 관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가 현재적으로 ‘한국’이라는 범주를 인정하는 한, 한국의 전통 미술품을 익숙하게 접하는 사람들은 역사 속의 한국 미술에서 뭔가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적인 특성(그것이 예외 없는 포괄성을 지니는 것은 아닐지라도)을 느끼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김원용은 나름대로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자연미론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단순한 수사적인 예찬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가 남긴 ‘자연의 미’라는 키워드는 한국미를 느끼고 성찰하는 많은 이들의 심중에 깊은 여운과 공감으로 남아 있다.

이주형 서울대 미술사학
필자는 버클리대에서 인도불교미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간다라미술’,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한국 불교조각의 자생성론을 위한 소고’, ‘한국 고대 불교미술의 불상관’ 등이 있다.

김원용(1922~1993)
삼불 김원용은 국내의 고고학의 기틀을 마련한 고고학계의 태두다. 1945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한후 국립박물관에 들어가 고고학과 미술사 연구를 시작했다. 1958년부터 문화재 위원을 맡으면서 국내의 거의 모든 유적발굴을 이뤄냈고, 문화재보존에서 힘썼다. 특히 전곡리 발굴을 통해 남한에 전기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음을 확인했고, 무녕왕릉 발굴로 벡제사를 재조명하는 학술적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이후 뉴욕대에서 신라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후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를 창설했고, 고고학의 학문적 기초를 세웟으며 미술사를 독립된 학문으로 정착시켰다.
주요 저서로 ‘신라토기연구’, ‘한국고고학개설’, ‘한국미술사’, ‘한국미술소사’, ‘한국문화의 기원’, ‘한국미의 탐구’, ‘한국벽화고분’, ‘신라토기’, ‘한국고고학연구’, ‘한국미술사연구’ 등이 있다.

『한국미술의 역사』 김원용.안휘준 지음| 시공아트 刊| 703쪽| 2005
한국미술의 본질을 인공을 꺼려하는 자연주의적 양식으로 규정하는 이 책은 선사시대미술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시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암각화, 조각, 공예, 회화, 건축을 총 망라해 다뤄가고 있다. 특히 저자는 조선조의 미술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인식해 이 시기 작품들을 통해 ‘한국미’적 감상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원래 1968년 김원용이 ‘한국미술사’란 이름으로 초판을 내놓았으나, 이후 1973년 한 차례 증보됐고, 1986년 전면적인 개정을 거쳐 ‘신판 한국미술사’란 이름으로 재출간 되면서 안휘준 교수와의 공저가 됐다. 2005년 판은 제자들이 김원용 타계 1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으로 증보해 내놓은 것이다.
김원용을 사로잡은 한국예술

윤두서 ‘자화상’, 조선 17세기 후반, 지본담채, 38.5×20.5㎝
“통상적인 초상화와 달리 몸을 생략하고 얼굴만을 역점을 두어 표현한 점에서 우선 특이하고 유일한 작품인데, 눈에는 화가의 정신세계가 미묘하게 배어나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에는 화가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나 생각이 맴돌고 있으며 인간의 복잡한 생각과 느낌을 가득 머금고 있다…초상화의 역사는 길고 자화상도 고대부터 그려졌지만,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시각적 긴장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518~520쪽)

허목, ‘애민우국’ , 조선중기, 53×156㎝
“조선 중기의 서예에서 또한 특기할 일은 미수 허목의 전서체다. 그는 행서의 필법을 전서에 응용하여 독자적인 서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서체는 ‘미수체’라고 불리워진다. 그의 ‘愛民憂國’을 예로 보아도 그의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서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글자들의 독특한 형태, 자획의 개성적 구사, 飛白을 빚어내는 운필법 등이 한결같이 허목만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559~560쪽)

‘분청사기상감모란양류문병’ , 조선 15세기, 높이 30.3㎝.
“이 감화분청에서 더욱 조선적인 개혁과 신선미를 느낄 수 있으며, 그 점이 감화청자야말로 진실한 조선도자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白花의 寶相花는 힘차고 자유롭게 전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려시대 회청자의 공간공포증이 없어지고 어디까지나 신선한 조화와 여유가 있어서, 고려로부터 조선에의 도자혁명은 이 감화분청에서 이루어진 감이 있다.” (574~575쪽)

‘철화백자호취문항아리’ , 조선18세기, 높이 30.2㎝.
“일반 도공이나 지방요에서 만들어진 철화적인 그림들은 신라토기에 나타나는 線畵를 연상시키며 그 돌발적인 충동에서 그린 듯한 치기 만만한 동화적인 세계는 고금을 통한 한국인의 기본적인 천성인 것 같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선들이 이루는 구성의 기발함과 무한한 필력에는 감탄 섞인 미소를 금할 수 없다. 민화풍인 호랑이의 얼굴은 사람을 닮았고, 자세는 엉거주춤하며 표현은 어설프기 그지없어 저절로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591쪽)

종묘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과 관련하여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묘다. 화려하게 단청을 하고 장식성이 두드러진 전형적인 다른 궁궐 건물들과는 달리, 나지막해 보이면서도 장중한 건물, 간결한 구조와 꾸밈새, 군더더기 없는 주변의 정리 등 모든 면에서 동양 최고의 대표적 祠廟 건축이라 하겠다.” (607~608쪽)
이암, ‘화조구자도’ , 조선16세기 전반, 지본담채, 86×44.9㎝.
“봄날 활짝 핀 꽃나무를 배경으로 검둥이, 누렁이, 흰둥이 세 마리의 강아지들을 묘사했다. 강아지들은 털의 색깔만이 아니라 동태와 성격에서도 서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천진난만함에 있어서만은 차이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강아지들이 가장 한국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주변의 바위는 단선점준으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산수화풍을 부분적으로 드러낸다. 배경의 꽃나무에는 새와 나비와 벌이 맴돌고 있어 당시 화조화의 면모도 엿보게 한다.” (461쪽)
ⓒ2005 Kyosu.net

교수 신문 200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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