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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론을 재검토한다: (10)이경 조요한의 미론

편집부



한국미에 관한 논의는 지난 세기 동안 국내외 인사들에 의해 다각도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전문적인 학술연구라기보다는 논자의 직관적 판단이나 개인의 인상을 서술하는데 그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한국미론이라 해도 거의 모두가 미술 즉, 조형예술을 대상으로 삼아 그 특질을 논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미론은 한국미술사 연구의 부산물이라는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怡耕 조요한은 그러한 연구자들과는 기본적으로 노선을 달리 한다. 그는 근대적 학문의 개념을 바탕에 깔고 이론적 체계적인 서술을 시도했다.
그의 한국미에 관한 논의는 1999년에 출판된 ‘한국미의 조명’에 포괄돼 있는데, 이 책은 1968년에 발표한 ‘한국 조형미의 성격’으로부터 그 후 30년 동안 쓴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앞시대의 연구자들은 거의가 한국의 전통 미술을 중심으로 한국미론을 전개했으나, 조요한의 경우 서구의 후마니타스 정신이라는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한국미 논의의 연구영역을 미술 분야만이 아니라 음악 무용 시가 조원 등 다방면에 걸쳐 폭을 넓혔으며, 또한 불교 유교 도교 무속 등 다양한 사상적 종교적 이념과의 연관 속에서 논했다. 그리고 기존의 국내외 인사들의 연구를 충실히 수렴해 가면서 자신의 논지를 체계화 했다.
그는 민족해방과 더불어 대학공부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우리 문화의 특징을 학문적으로 해명하는데 관심을 지녔다. 『한국미의 조명』은 당시까지 선학들이 연구한 한국미에 관한 논의를 총체적으로 수렴하는 가운데 한국미의 기본성격을 규정하고, 그 바탕을 이루는 원동력과 정신을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의의가 있다. 그는 일찍이 ‘예술철학’(1973년)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지만, 시대정신(Zeitgeist)이라거나 예술의욕(Kunstwollen)과 같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한국미와 한국예술을 사유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인상이나 감상을 서술하는 식의 수필이 아니라 한국미의 논의를 어디까지나 서구의 근대 미학이라는 학문적 토대 위에 접목시켰다. 바로 이 점에 그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자성이 있다. 이를테면, 최순우는 자신의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과 심미안으로 한국미에 대한 애호로 일관했고, 김원용은 역사적 고고학적 연구로부터 파생된 한국미의 인상을 서술했으며, 이동주는 서화 감식가로서 안목이 빼어난 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념화 작업에 그다지 주력하지 못했다. 조요한의 경우 서양의 철학과 미학이라는 학문적 기반에 입각하여 한국미론을 굳건한 교양서로 구축했다.
우리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한국미의 이원적 구조, 비교연구의 시각, 예술해석의 시도라는 세 가지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한국미에 관해 언급한 논자들은 거의 모두가 한국미의 원리를 일원적인 관점에서 조명했다. 이를테면 한국미를 비애의 미, 멋, 자연주의, 등과 같은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에 반해, 저자는 한국예술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비균제성’과 ‘자연순응성’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규정하고, 양자의 원리가 역사적으로 공존하면서 서로 보완해 간다고 봤다. 그가 말하는 비균제성은 일찍이 고유섭이 제시한 개념이고, 자연순응성은 김원용의 자연주의라는 용어를 수정 보완한 개념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비균제성은 북방 유목민의 삶 속에서 형성된 무교적 영향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신나면 규칙을 무시하면서 도취하는 기질과 연관돼 있다. 가야금 산조에서 볼 수 있듯이 진양조와 중모리 같은 느린 장단에서 시작해 자진모리와 휘모리 같은 빠른 가락에 진입하면 신들린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예인들의 감성에서 발휘된다. 그리고 자연순응성은 남방의 농경문화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지모신을 섬기면서 형성된 자연신의 숭배에 따라 항상 자연을 주격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의 발로다. 이러한 토대에서 ‘신바람’과 ‘질박미’라고 하는 한국예술의 양대 특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미를 이원적 구조로 파악한 점은 의미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서구 예술사의 전개를 줄곧 고전성이라는 단일 원리로 설명해 오던 것을 20세기 초에 독일의 예술학자 빌헬름 보링거가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두 개의 원리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으로 설명함으로써 예술사 이해의 폭을 넓혔다. 조요한의 관점은 보링거의 사고의 틀을 충실히 인식한 위에 한국미의 이원적 구조를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비균제성을 한국예술의 특성으로 간주했다고 해서 한국예술에 균제성이 결여됐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는 금동용봉봉래산향로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같은 섬세한 기교와 정성들인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다만 균제성 보다는 비균제성이 더욱 우세하다는 것이다. 비균제성은 弄絃의 아름다움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에 따르면 한국 음악에서는 연주자의 개성적 표현이 어떤 범위 안에서 자유로이 허용되는데, 소위 농현적 특색이라는 것이 있다. 농현이란 동양음악에서 音高의 흔들림으로 맛을 더해주는 것으로, 연주자의 감정 표현수단이 된다. 사물놀이나 각종의 산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성이다. 그는 성덕대왕신종에 표현된 향로를 받들고 유려한 천의를 날리는 飛天像의 우아한 곡선미는 한국미술의 특유한 농현미라 했다. 이것은 중국양식에서 벗어난 자유스러운 정취이며, 이같은 농현미가 추사의 서체에도, 대원군의 묵란에도 또 오늘의 미술에도 흐르고 있다고 봤다.

조요한은 비교 연구라는 관점을 줄곧 의식하면서 한국미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논하고 있다. 즉 거시적인 관점에서 동서 예술의 대비를 논하고, 세부적으로는 한국 중국 일본 각 나라 예술의 특성을 논하는 가운데 한국미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한국미를 언급했던 일본 학자들과 서양의 연구자들의 견해를 항상 함께 고려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사고의 지평을 수렴하고 있는 그의 열린 학문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간 많은 한국인 학자들이 한국미의 고유성을 논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도리어 폐쇄적인 편향된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동양의 직관적 철학과 서양의 과학적 철학이 상보적인 관계에 있음을 전제하면서, 동서 예술의 비교고찰을 시도했다. 이를테면 재현과 표현이라는 예술이념의 상위, 서양화의 원근법과 동양화의 삼원법, 동적인 활력성을 갖는 서양음악과 정적인 명상성을 갖는 동양음악 등을 논하면서 비교라는 관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동양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졸, 소박, 기운생동과 같은 동양미학의 이해가 뒤따라야 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한국의 정원미를 중국 및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는 가운데, 중국정원처럼 인공에 의하여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정원처럼 자연을 주택의 마당에 끌어들여서 주인행세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한국정원의 이상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미의 세계는 이처럼 노자가 말하는 '소박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바로 그 위대한 자연미를 실현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에는 17세기에 이미 ‘園冶’와 같은 원림 설계의 기술적 문제를 다룬 저서가 출간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 점에서 한국정원은 한 발자국 뒤져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그는 예술철학과 예술사 방법론을 강의하면서 ‘해석’이라는 문제를 특별히 중요시했다. 흔히 미술사가들이 타성적으로 행하고 있던 연대기적 서술이라거나 무미건조한 실증적 연구를 비판하고, 그들의 문제의식의 결여를 아쉬워했다. 그가 미술사학연구회를 조직하여 19세기 말 이후 서구에서 형성 발전되어온 미술사 방법론을 철저하게 연구해 한국과 동양의 미술 연구에 적용하려 했던 노력은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딜타이와 가다머의 해석학을 집중적으로 강의했으며, 예술작품의 ‘現前化’라는 한스 제들마이어의 해석으로서의 미술사학을 하나의 모범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했다. 조요한의 저술은 이러한 학문적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몸소 행한 한국미와 한국예술에 대한 해석이다. 앞서 거론한 바 있는 한국 정원미를 논한 글에서, 그는 비원을 비롯해 소쇄원과 부용동 원림을 단순한 유적이라거나 볼거리로서가 아니라 한국미의 텍스트로서 받아들여 훌륭하게 해석하고 있다.

조요한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리버럴리스트의 면모를 지녔다. 서구의 위대한 예술세계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동경하고 거기에 심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미를 논한 국내의 다른 학자들과 구별된다. 예컨대 그는 성서와 그리스 비극시의 세계로부터 삶의 지혜를 찾고,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세계에 심취했으며, 현대 연극공연과 음악연주회에도 항상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양의 고전과 한국의 예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 지혜를 사랑하는 열린 마음이 항상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미의 조명’은 책이름이 말해 주듯이, 그간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묻혀 있었거나 또는 희미하게 그 일면만을 드러내고 있었던 한국미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다. 생전에 그는 우리의 문화수준을 아직도 계몽(Erklarung)의 단계라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그의 저술도 전문적인 학술 연구서라기보다는 교양인을 위한 지침서나 계몽서로서의 역할이 더욱 크다 하겠다. 한국미론을 넘어서서 한국미학의 본격적인 정립을 위해서는, 우리의 고전문헌을 일차적인 자료로서 독해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다음 세대가 수행해야 할 과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민주식 / 영남대 미학
필자는 도쿄대에서 ‘한국고전미학사연구 -풍류사상의 전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름다움, 그 사고와 논리’, ‘한국미학시론’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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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조요한(1926~2002)
조요한은 1926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서울대 문리과대학 예과부 문과에 입학했다가 1948년 철학과로 옮기고 동대학원을 마쳤으며 1956년부터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지냈다. 희랍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예술철학에 정진하던 중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숭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환기 화백과의 만남에서 시작된 예술에 대한 이론적 관심으로 일찍부터 홍익미대에 출강하여 미학, 예술론 강의를 맡았으며, 이후 예술론은 철학자로서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남았다. ‘예술철학’은 이런 관심을 통해 이 땅에 미학 예술학을 정초시킨 책이며, ‘한국미의 조명’(1999)은 이런 예술철학을 한국 예술작품에 적용시킨 작품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현실참여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그로 인해 유신시대, 1980년 봄과 같은 험난한 시절을 거치며 해직교수로서 고난을 겪기도 했다. 복직 이후에는 숭실대 총장, 환기재단 이사장, 한국철학회장, 미술사학연구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5년 미학 분야 최초로 대한민국학술원 정회원으로 활약했다. 저서로 위의 두권 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1988), ‘조요한 철학에세이’(1996), ‘철학하는 삶을 위하여’(1986) 등이 있고, 유고집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2004) 등이 있다.

『한국미의 조명』(조요한 지음, 열화당 刊, 374쪽, 2004)
이 책은 이곳저곳 발표된 조요한의 美論을 어느 정도 정리된 모습으로 선보인 저작이다. 개론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한국미에 대한 저자의 독서와 박학다식이 놀라움을 줄만큼 종합성과 포용력을 자랑한다. 한국예술의 성격에 대해 고유섭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 말했고, 김원용은 가능한 한 인공의 흔적을 줄이려는 '자연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저자 조요한은 이 두 가지 관점에 동의하며, 한국예술의 성격을 '비균제성'과 '자연순응성', 두 개의 축으로 규정짓고, 이러한 성격의 유래와 한국미의 원형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제 1장 ‘한국미의 탐구를 위한 서론’에서는 기존 미론가들의 미론을 멋, 한, 질박 등으로 훑어오면서 그 특징과 한계를 설명하고 제 2장 ‘동양의 아름다움과 서양의 아름다움’에서는 동서예술의 비교문제, 미술과 음악에서 동서의 차이를 검토한 뒤 동양미학의 길을 제시했으며, 곧이어 3장과 4장에서는 한국인의 미의힉을 음악미, 조형미, 생활미로 나눠서 살펴보고 한국인의 해학미, 정원미, 한국미의 전통과 그 계승의 문제를 차례로 짚는다.
조요한을 사로잡은 한국예술

●양산보의 소쇄원,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
“한국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 전라남도에 있는 양산보의 소쇄원과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을 꼽는다. 이 두 정원은 다 현실에서 뜻을 펴지 못한 선비가 은거하면서 마련한 苑이다. 둘 다 계곡의 흐르는 물을 막아 연못을 만들고, 못가에 나무들을 심어 경관을 이룬 민간의 원림이다. 이들이 이루어 놓은 정원은 유교와 도교의 자연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쇄원은 계단식 매대들과 앞뜰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고, 부용동 원림은 계담 속의 바위들이 인상적이다.” (91쪽)

●서산마애삼존불상, 백제 7세기
“중국과 일본의 것에 비교해 우리 불상의 얼굴표정이 얼마나 소박하고 친근감 있는 미소를 띠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친근한 미소를 짓는 인간적인 얼굴표정은 한국불상의 초기부터 그 근저에 이르는 하나의 특색이다. 한국불상의 친근한 미소는 많은 쟁론이 和하도록 하는 원리(十門和爭)를 말하면서, 민중 속에 파고들었던 원효대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이겠는가.” (126쪽)

●김정희의 ‘부작란도’
“‘글자를 쓰는 예술(書藝)’은 유교권 특유의 것이다. 서예가 사람의 품격과 정신을 거짓없이 나타내기 때문에 유교권에서는 서예를 무게있는 조형예술로 생각한다…유교 입국의 조선조에서는 서예의 기상이 자못 높았다. 서예의 전무후무한 대가라고 일컫는 阮堂 김정희의 예서는 서법의 종주이다…가슴속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이 없으면 손재주로써 예술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추사의 정신이 비록 서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132~33쪽)

●담배피우는 호랑이. 수원 팔달선원 벽화.
“민화는 감상용 회화와는 달리 이름없는 화공들에 의해 낙관 없이 그려진 그림이다. 그것은 문인화처럼 품위있고 담백하지는 않지만, 기교를 부리지 않고 어리숙하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매력이 있다. 민화의 특징중 하나가 색채인데, 중국의 唐彩보다는 엷고 밝은 색감을 지닌다. 우리는 그것을 진채라 한다…우리가 곧잘 아득한 옛날을 ”호랑이 담배피울때“라고 표현하듯이 담배 피우는 호랑이는 한국 해학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호랑이를 의인화한 것도 재미있지만, 유난히 긴 한국의 담뱃대가 해학미를 더해주고 있다.” (177~178)

●소면와당, 통일신라시대.
“신라인의 미소를 아로새긴 와당은 지름 14㎝의 손바닥만한 막새인데, 왼쪽 아랫부분이 아깝게도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미소 띤 두 뺨이 부풀어올라 두 눈가에 주름이 잡히면서 보는 이에게 다정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의 미소를 통해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미소는 무엇을 뜻하는가. 미소란 폭발성을 지닌 웃음의 성격을 완화해 소리없이 조용히 웃는 웃음이다. 서양인의 너털웃음보다 동양인의 미소에 더 짙은 농도가 있을 수 있다.” (186~187쪽)
●청자상감
“고려자기가 11세기 중엽 북송문화에 접촉하고 자극을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12세기에 들어오면서 고려인의 기호와 풍토에 맞게 작은 모양과 우아한 색조를 보여주었다. 또 송나라의 것과는 비례미가 다르고 한층 자연스러운 모양을 나타낸다. 그 맑고 조용한 푸른 빛의 아름다움은 아무도 재현할 수 없다. 항아리, 淨甁, 주전자에서 향로, 연적, 베개에 이르기까지, 그 기품있는 곡선미와 회청색에 엷은 연두색이 감도는 고요한 비색은 한국미술의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273쪽)

●김득신의 부취도
“한국미술에는 동양음악에서 말하는 弄絃的 특색이 있다. 도양음악에서 音高의 흔들림으로 음악의 멋을 더해주는 것을 농현이라고 한다. 동양음악은 동시음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음고의 흔듦을 허용해 음악의 멋을 나타낸다…긍재 김득신의 ‘부취도’는 거의 직선과 곡선으로 또 자유스러운 호선으로 술에 취한 흔들림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의 우리가 자랑하는 작품들에 이같은 농현적 특색이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279~281쪽)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 16세기.
“분청사기는 무명옷을 입은 농촌의 한국인을 연상케 한다. 조선 초기에 한글이 만들어지고,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그어지고,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했던 무렵에 분청사기가 성행했다. 분청사기 중 가장 두드러진 창의성을 보여주는 것이 扁甁이다. 편병은 좌우대칭에 얽매이지 않는 어수룩한 원형의 묘미가 있을뿐더러 익살스러운 무늬그림들이 재미를 더해준다.” (288~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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