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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론을 재검토한다_(11)이동주의 미론

편집부



전통 동양화론에 입각한 '명품의 감별사'
2005년 05월 25일 유홍준 문화재청장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아직도 정치학자 이용희가 미술사가 이동주와 동일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설혹 알더라도 정치학자로서 이름이 워낙 높아 그의 미술사 활동을 한 정치학자의 딜레땅뜨적 취미정도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생의 한 부분을 미술사와 함께 살았으며 그가 남긴 한국회화사의 저술들은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징검다리로 남아 있고 지금도 미술사학도와 애호가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동주 이용희를 과연 미술사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엇갈린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또 동주 자신으로 볼 때 당신이 사후에 미술사가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수긍할지에 대해서도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동주의 몇 안되는 미술사 제자중 한사람으로, 누구보다 당신과 미술사에 대해 대화를 나눴던 나로서는 동주가 아마 밖으로는 ‘아니다’라고 답하고 속으로는 ‘그렇다’고 답했을 것으로 판단한다. 단정적으로 말해 동주는 그가 입문하고 활동한 방식이 정통 미술사가와 달랐고 미술사를 업으로 삼지 않았을 뿐, 그가 원하든 원치않든 동주는 분명 미술사가였다.
이용희가 이동주란 필명으로 한국회화사에 대해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건 1969년 3월에 창간된 ‘아세아’지에 ‘우리나라의 옛 그림’을 연재하고 부터다. ‘단원이라는 화원’,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 ‘완당 바람’ 등 희대의 명문으로 당시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이 연재는 잡지의 폐간으로 5회만에 중단됐고 훗날(1975년) 박영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출간됐다. 이때부터 동주의 한국회화사 저술활동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간히 이어진다.
1971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가 기획한 ‘한국문화사대계’에 기고된 ‘한국회화소사’는 이듬해 서문문고 제1권으로 출간됐고, 1973년에는 일본에 있는 고려불화와 조선시대 회화를 조사하는 2주일간의 탐방기를 한국일보에 연재하고는 이듬해 ‘일본속의 한화’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1970년대 초에 연이어 출간된 이 세 권의 책은 마치 정치학자 이용희에서 미술사가 이동주로 변신한 듯한 인상을 주는 왕성한 한국회화사 저술작업이었다. 그러나 동주는 학계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으며 단 한번 1972년 12월에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회화 특별전 때 초청강연에 응해 ‘조선 시대의 산수화’에 대해 희대의 명강의를 보여준 바 있다. 이 강의 내용은 그의 ‘우리 나라의 옛 그림’에 실려 있다.
한동안 열정을 보였던 동주의 회화사 저술작업은 일단 여기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1975년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로 부임하면서 본업인 정치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동주는 1979년 국토통일원 장관을 사임할 때까지는 미술사 분야에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다만 1978년 10월, 일본 나라의 야마도분카간에서 열린 고려불화 특별전에 초청 연사로 초대돼 ‘主夜神의 제작연대’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 강연 내용은 그의 ‘한국회화사론’에 실려 있는데 이 글에서 보여준 양식 분석과 해석은 동주가 얼마나 치밀한 미술사가적 시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유감없이 말해 준다.
그리고 동주가 다시 미술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2년 ‘계간미술’에서 발행하는 한국의 미 시리즈에서 ‘고려불화’편의 감수를 맡고 또 고려불화 전반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부터다. 이후 동주가 ‘계간미술’을 통해 발표한 미술사에 관한 글과 대담은 1987년 ‘한국회화사론’으로 출간됐다. 그리고 1989년에는 연세대 국학연구원에 설치된 다산강좌에서 한국회화사 공개강좌를 맡았으며 이는 7년 뒤인 1996년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그리고 이듬 해 12월,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미술사와의 인연을 버리지 않은 셈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동주는 80평생에 5권의 한국회화사 저서를 남겼으며 이는 그의 주 전공인 정치학 관계 저술활동과 비슷한 양이었다.
동주는 이처럼 적지 않은 미술사 저술을 남겼지만 미술사가로서는 어떤 활동도 보여준 바가 없었다. 그는 한국미술사학회와 어떤 인연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저술작업 외에 논문을 기고하거나 발표한 바가 없었다. 단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리고 1978년 일본 야마도분카간에서 한 차례씩 강연한 것이 전부다.
이처럼 그는 생전에 미술사가라는 의식은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술사에 입문하는 길부터가 여느 경우와도 달랐다. 이 점에 대해 동주는 1988년 5월 미술사학연구회에 초대돼 회고한 ‘미술사와 미술사학: 나의 한국 전통회화 연구와 관련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나는 미술사나 미술사학을 학교에서 배운 일도 없고 또 어느 선생에게 지도받은 일도 없습니다. 순전히 제 흥에 겨워 미술작품, 그것도 주로 전통회화를 소년시절부터 보고 다니고. 좋아서 미술사 사료나 미술서적을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방면을 학문의 전공분야로 생각한 일도 없고, 더구나 이 방면에서 장차 직업을 택하려는 성심 같은 것은 아예 한 번도 품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동주에게 미술사란 무엇이었는가. 동주의 미술사에 대한 관심은 취미에서 출발했다. 동주는 스스로 회고하기를 자신의 미술사에 대한 관심은 소년시절 일종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확인을 위해 선인들의 간찰이나 묵적을 수집한 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과 우리나라 그림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감상하며 미술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것이 미술사적 관심의 확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시 마음 속에는 당시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우리 회화가 중국의 강력한 영향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한국 회화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주장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문제의식으로 갖고 있었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동주는 서양의 미술사학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본래 동주는 남다른 독서열과 강렬한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6개 국어에 능통한 어학실력을 지녔었다. 그는 일찍이 언어학, 역사학, 동서고전철학, 현대상징주의문학과 심지어는 만주 몽고 거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동주의 폭넓은 독서편력은 T. E. 흄의 ‘명상’을 계기로 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독일의 미술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돼 보링거의 정신사로서 미술사. 하인리히 뵐플린의 형식사로서 미술사.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도상학으로서의 미술사 등 서양미술사의 방법론을 두루 섭렵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동주는 특히 보링거가 주장한 미술사의 문화권 이론, 즉 문화가 다르면 美의 성격이 다르고 미의 기준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크게 깨달았으며 여기에서 비로소 한국 미술이 지닌 지역적 성격 내지 민족적 정체성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동주는 이처럼 독일의 미술사학을 통해 미술에도 문화권적 권역이 있다는 점, 같은 권역 내에서도 지역문화에 따라 미적 표현과 미적 향수가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같은 유럽의 르네상스라도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차이 나듯, 같은 동양화라도 중국 명나라 청나라의 회화와 조선시대의 회화가 다른 미적 가치를 보여 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동주로 하여금 겸재 일파의 진경산수나 한국적 서정을 극명하게 담아낸 단원에 대해 그토록 찬사를 아끼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서양미술사학의 이론을 맹신하거나 그것을 우리나라 또는 동양화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동주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미술사적 관심은 명백히 다른 두 방향에서 전개됐다고 했다. 하나는 미술작품의 감상과 실체는 동양과 한국 회화로 들어간 길이고, 또 하나는 이론을 서양, 특히 독일의 미술사학으로 들어갔는데 서양의 미술사학이 아무리 발달했다하더라도 동양화의 독특한 미학을 포괄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동주는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서양의 미술사학은 동양의 전통적인 회화 감상법에 들어 있는 鑑識의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즉 미술사를 한다는 명분은 미술작품이 우리에게 감흥을 준다는 점, 즉 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전제인데 독일의 미술사학은 거시적인 양식의 유형과 흐름을 내재 요인에서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작품의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그것은 경험사로서 미술사를 경시한 독일 미술사학의 치명적인 결함이기도 했다.
동주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주장하기를 미술사의 출발은 당연히 실제 작품에서 출발해야만 하고 작품의 해석에는 반드시 미적 우열의 평가가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감흥의 대상으로서 작품이 중요하고 감흥의 주체로서 인간의 心意가 소중하다는 입장이었다. 즉 작품에 대한 우열, 우열의 기준, 기준과 연관된 철학적 미학적 근거, 그 근거에 연관된 가치의 성격을 논하는 것이 미술사의 본령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동양화의 역사와 함께 해온 目錄學의 진정한 의미라고 했다. ‘선화화보’, ‘패문제서화보’ 등은 단순히 시대별 작가별 작품을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선택적 목록 작업에 이미 미술사적 평가가 들어있음을 강조했다.
이런 전통적 동양화론의 감식안적 비평에 입각해 동주는 미술사를 논하고 서술했다. 그의 ‘한국회화소사’를 보면 겸재(정선)는 ‘인왕제색도’와 같은 진경산수의 대작을 그렸고, 능호관(이인상)은 ‘설송도’와 같은 문인화의 본령에 육박하는 명작을 남겼고, 고송(이인문)은 ‘단발령 망금강’같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작품을 그렸다는 식의 표현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그 화가의 대표작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명백한 미술사적 평가를 말한 것이었다. 그가 화가를 말하면서 항시 이름이 아니라 아호를 쓴 것까지 전통적인 목록학의 자세였다.
물론 그는 ‘우리나라의 옛 그림’에서 그런 명화들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고 그 명작의 형식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논하기도 했다. 단원(김홍도)의 ‘총석정도’에 서려있는 아련한 한국적 서정의 세계는 단원의 공간운영과 공기표현법, 필법 그리고 대상을 파악하는 시각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 경우에도 동주는 다른 미술사가들이 취하는 양식분석의 입장이었다기보다는 명화의 조건을 탐구한 자세였다.
그런 의미에서 동주는 미술사가라고 부르기보다 한 시대의 뛰어난 감식가였고 탁월한 眼目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생전에 동주는 감식안이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아무리 단원의 진품이라도 명작이 아니면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대가의 반열에 들지 않는 화가에 대해서는 그런 화가도 있었다는 식으로 거의 무시했다. 그래서 동주가 다룬 회화사의 범위는 아주 좁았다, 이 점은 동주가 여느 미술사가와 다른 점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젊어서 사숙했던 위창 오세창 이래로 마지막을 장식한 전통 목록학적 입장의 미술사가였다.
나는 동주 선생 생전에 수없이 많은 미술 전람회를 함께 감상했고 수없이 많은 미술사적 대화를 나눴다. 그와 연관해 동주 선생의 미술사학을 생각해 보면 동주는 미술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미술사를 즐겼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것은 선생의 미술사적 업적을 결코 낮춰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공자가 도에 대해 말하면서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한 뜻에서의 즐김이다.
동주가 생전에 “미술사 연구에는 자신처럼 예외적인 존재도 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 말한 것이었으리라.

유홍준 / 명지대.문화재청장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朝鮮後期 畵論 硏究: 傳神論과 寫實論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산기’, ‘화인열전’, ‘완당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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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1917~1997)
본명은 이용희다. 원래는 국제정치학자이지만, 한국화에도 조예가 깊어 양쪽 분야에서 활동했다. 국제정치학 쪽에서는 ‘권역이론’, ‘전파이론’이라 불리는 학문적 성과를 남겼으며, UN총회 한국대표, 국제정치학회장, 국토통일원장관 등의 활동을 했다. 한편, 한국회화사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겨 일본, 중국의 시각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한국화 연구에 맥을 형성하면서 한국미술사학을 한단계 끌어올린 안목 높은 원로학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한국회화에 대한 연구성과는 특히 일본에 있는 한국 작품들에 대한 철저한 실증적 추적이나 조선 초기의 화풍으로 대변되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생각, 겸재·단원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화풍의 발흥에 관한 해석 등을 들 수 있다. 저서로 ‘국제정치원론’, ‘일반국제정치사상’, ‘한국민족주의’, ‘한국회화소사’, ‘한국회화사론’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옛그림』 이동주 지음| 학고재 刊| 1995| 436쪽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지음| 시공사 刊| 1996| 383쪽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은 1989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했던 강의를 옮겨놓은 것이다. 정통회화를 분석하는데 있어 현학적 문구 쓰기를 지양하고 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에 주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올바른 그림 감상은 그림의 아름다움을 결정한 작품의 그 무엇을 알아내고 그 무엇에 감동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림은 고분벽화부터 시작해, 고려, 조선전기, 중기, 후기 순으로 시대별로 짚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옛그림’은 1975년 첫 출간됐다가 20년후 증보된 것. 미술사와 미술사학, 단원 김홍도, 겸재일파의 진경산수, 속화, 완당 김정희, 조선의 산수화, 장면과 화면 등 각 주제별로 한국화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점을 펼쳐내고 있다.
이동주를 사로잡은 한국예술
●김홍도, ‘마상청앵’, 117.2×52.0㎝. ‘負錢圖’, 27.0×38.5㎝, 조선 18세기
“단원 속화의 진수는 역시 그의 후기에 완성되며 그 시기도 그의 산경산수의 성숙과 더불어 되는 것 같다. 이러한 예로서 속화 두 폭을 들겠다. 하나는 고 간송 선생의 소장인 ‘여상청앵’의 작품이다. 봄길을 가는 기려의 나그네가 홀연히 들령는 꾀꼬리 소리에 잠깐 길을 멈추고 돌아보는 광경인데, 역시 老 화원다운 완숙한 구도와 공간의 묘미를 살려 筆簡意心의 묘경을 그렸다. 이렇게 되면 이미 속화의 경지를 넘어서 시정이 화면을 뒤덮게 된다. 다음 ‘부전도’라는 속화가 있다. 무거운 돈짐을 지고 城 밑을 가는 광경인데, 화면의 한 가운데로 완만한 사면을 지으면서 인물과 그 배경을 집어넣고 상하좌우를 비워놓았는데, 역시 화면구성의 완숙이 눈에 띠며 동시에 彎曲하는 성벽을 수목 하나를 붙여서 악센트를 주는 등, 간단한 소폭이지만 그림으로서 감상할만하다.”

●이인상, ‘송하수업’, 조선 18세기, 28.7×27.5㎝.
“이 그림은 보다시피 늙은 소나무, 큰 바위를 배경으로 하고 사제가 마주앉아 학문하는 엄숙한 장면을 그린 것인데, 여기에는 화상?구도?필의에 일점의 俗塵도 용서하지 않는 기백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다…그림은 전체적으로 음양과 대기의 光感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며, 그림 상반부에 집중한 거암, 노송의 중량감을 스승되는 인물의 상반체를 거암쪽으로 올림으로써 경감시키고 있어서 그림에 안정감을 준다.” (285~86쪽)

●김홍도, ‘총석정’, 조선 1795년, 23.2×27.3㎝.
“정 겸재 같은 화가는 한국의 진경을 사경화로 또는 사생으로 예술화한 대가였거니와 단원도 후기에 오면 풍속?인물?영모를 때에 따라 사경풍속에 하나로 엮어서 얼핏 보면 남송 원체풍의 공간감각이 있는 새로운 독자적 산수의 사경산수를 창조했다. 말하잠녀 청조 화원풍의 법식에 잡힌 것도 아니요, 또 과거의 남본에 의거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자기 시대, 자기 주변, 평범한 산천을 날카롭고 현실적인 감각으로 회화화하였다.” (131쪽)
●조씨삼형제상, 조선후기
“‘조씨삼형제상’이라는 것도 아주 독특하고 재미있는 군상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1911년 채용신이 그린 ‘황매천초상’도 있습니다. 아주 잘 그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초상화라고 하는 것은 아주 독특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철저한 사실주의에 의한 그림들입니다.”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279쪽)

●김정희, ‘세한도’, 조선 1844년, 23.7×70.2㎝.
“‘세한도’는 그 필선의 고담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마치 高士의 인격을 대하듯 하여 心意의 그림으론 과연 神品이라고 할 만하다.” (337쪽)

●조희룡, ‘홍매대련’, 조선 19세기, 127.5×30.2㎝.
“이 홍매는 아마 그의 대표작이 될만한 것으로 일견 청조의 畵人의 꽃잎과 같이 보이나 나뭇가지와 줄거리의 처리, 각이 있는 직선 비슷한 선으로 화면을 구축하고 나가는 구도와 묵법의 농담은 화제의 도가풍과 어울려 얼핏 古梅의 精氣 같아서 인상깊다.” (340쪽)

●이인상, ‘설송도’, 조선 18세기 중엽, 117.2×52.6㎝.
“능호의 ‘설송도’를 보면 그림이 담박하고 고아할 뿐 아니라 그림의 기술 면이 그림 속에서 조금도 강조되지 않고 무슨 묘한 심회랄까 하는 인상이 풍깁니다. 원래 이 능호의 그림은 ‘설송도’ 같은 고담하면서 심의를 표시하고, 가볍게 그린 것 같으면서 기교가 눈에 띄는 소위 능한 그림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품위를 지닌 그림으로 우선 눈을 익혀야 합니다.”(3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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