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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Ⅱ(6) 화인열전②

편집부

<문화유산을 보는 눈> 겸재 정선감동 녹아있는 풍경화 ‘진경산수’ 완성

조선회화의 전성기인 18세기의 문을 연 것이 공재 윤두서냐 관아재 조영석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저는 윤두서가 문을 열어놓았고 조영석이 그 길을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석(1686~1761)은 함안조씨 집안의 문인으로 겸재 정선보다 10세 연하이면서도 서울 순화동에 함께 살며 서로 존경하는 친구이자 그림과 시의 벗으로 지냈어요.
원래 조영석 자신보다 당대에는 큰형인 조영복이 역사상 훨씬 더 유명했는데 나중에 예술로 이름을 크게 남겨 우리들에게 ‘조영복은 조영석의 형이다’라는 식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조영복이 영춘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1724년 조영석이 찾아 뵙고 형의 초상화를 그렸지요. 선비화가가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에 평상복에 두 손을 모두 표현해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등 화원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나타나는 공식적인 룰로부터 벗어나 있는 게 특징이에요.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그림을 그려 먹고 사는 것은 환쟁이의 일이었어요. 따라서 지식인들이 시·서·화를 함께 즐기는 교양의 하나로 할 때는 그 그림의 가치가 올라가지만 이것을 쟁이의 것으로 보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확실하게 구별해 놓는 게 당시 조선시대 사회의 분위기였고 딜레마이기도 했습니다. 예술과 기능을 천시한 당시 선비들에게 이쪽에 종사하거나 그러한 재주를 보이는 것은 흠이 되기 때문에 조영석도 그 점에서 상당히 조심했지요. 결국 세조와 숙종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1735년 의령 현감으로 있던 조영석은 영조가 세조 어진 감동(감독관)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지체하며 올라가지 않아 의금부에 하옥됐다 풀려났으며 1748년 숙종의 어진을 모사할 때도 끝까지 붓을 잡는 것을 거부했지요. 당시 조영석의 이런 행동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이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선비로서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며 취미로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환쟁이가 하는 일을 하고서 어떻게 사대부들과 이빨을(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해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함안조씨 집안에 조영석이 그린 스케치 14점을 모아 엮은 ‘사제첩(麝臍帖)’이 전합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을 의미하지요.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배꼽에서 나오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배꼽을 물어 뜯는다는 사향노루처럼 이 스케치북이 조영석 자신에게는 향기로운 것일지 몰라도 남에게 책을 잡히게 될 소지가 있다는 뜻에서 썼던 것이에요. 제목 바로 옆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물시인 범자 비오자손·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라는 준엄한 경고를 해놓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스케치 중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새참’이에요.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오순도순 새참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보는 애정이 느껴집니다. 양반들이 작당해 소젖을 짜고 있는 ‘우유짜기’는 모성애를 자극해 어미소의 젖이 나오게 하기 위해 송아지를 붙잡아와 어미 얼굴에 들이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요.
조영석의 명작 중 ‘설중방우도’는 눈 덮인 겨울날 방한모를 쓰고 찾아온 친구와 서재에서 고담준론을 하고 있는 선비들의 품위있는 모습과 머슴들끼리 반가워하며 손님이 타고 온 소를 끌고 가는 서민들의 풍경이 조화를 이룬 그림입니다. 환쟁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법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고아한 품격이 함께 담겨 있지요.
이규상이 지은 18세기 인물지 ‘일몽고(一夢稿)’에서 화가를 원법(院法·화원의 화법)과 유법(儒法·선비들의 화법)을 구사하는 두 파로 나눈 뒤 “조영석은 원법을 갖고 유화(儒畵)의 정채함을 제대로 펼쳐내고 있다”며 “우리나라 그림은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 같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지요.
금강산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지만 실제 금강산을 모티브로 조선 산수화를 정형화한 것은 시작도 끝도 겸재 정선(1676~1759)의 몫이었습니다. 그가 1711년 처음 금강산에 갔다 온 뒤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의 그림들은 헬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본 것 같은 부감법(俯瞰法)에 의한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로봉·혈망봉·월출봉 하는 식으로 봉우리마다 이름도 써놨지요. 그러다가 이것을 더욱 세련되게 하고 중국의 화법들을 자기화해 59세때(1734년) ‘금강전도’를 그리는데 같은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동주 이용희 선생이 진경산수와 실경산수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실경은 있는 것을 사진 찍듯이 그린 거라면 진경산수는 그 산에서 봤던 감동까지 회화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가들은 실경에 얽매여 정작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선과 금강산에 동행했던 시인 사천 이병연의 얘기를 들으면 그는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갔으면서도 붓은 하나도 안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가슴 속에 진경을 담아서 화폭에 펼쳐낸 것, 아마 이 점이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는 요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몰락한 양반출신의 선비화가인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우위를 비교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60세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김홍도와 달리 정선은 60세가 될 때 비로소 진경산수의 경지에 오른 뒤 이후 84세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노필(老筆)로 무르익은 그림들을 그리는 게 특징이에요. 낙관 자체를 겸재 노인이란 뜻으로 겸로(謙老)라고 한 ‘정양사도’를 보면 근경의 정양사와 원경의 일만이천 봉우리가 대비되면서 사실상 ‘금강전도’가 됐습니다. 섬세하고 치밀힌 필치를 보여주는 중년과 달리 노년으로 갈수록 정수만 묘사하고 색채도 밝은 것 몇가지만 사용하지만 원숙한 경지와 함께 중년의 작품을 능가하는 감동을 주지요.
사실 저는 정선이 젊은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김홍도처럼 타고난 화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고 닦고 훈련하고 자기의 혼을 집어넣어 환갑이 됐을 때 자기 형식을 만들어낸 뒤 다시 20년 동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원숙한 그림을 그려낸 대기만성의 모습이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 낳게 하는 것이지요. 먹의 번지기 등이 막 그린 것처럼 보여도 디테일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정선 그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부친 발문에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해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라고 평한 조영석의 찬사가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산수를 그리는데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무색케 하는 ‘노백도’‘함흥본궁도’등의 소나무 그림과 70대 중반에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정선의 원숙한 기량이 십분 발휘된 대표작입니다.
현재 심사정(1707~1769)은 정선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를 하나도 배우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개척한 분인데 참 불우했어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만사 심지원의 증손으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심익창이 과거부정 사건과 왕세제였던 연잉군(후에 영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에서 하루 아침에 패륜가에 대역죄인의 집안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할 길은 막혔지만 그림 재주가 있어 이로 이름을 남겼는데 자신의 처지처럼 어두운 분위기에 애잔한 그림을 많이 남겼지요. ‘강상야박도’ 같은 산수화나 ‘파초와 잠자리’ ‘딱따구리’ 등의 화조·조충도 등이 모두 이런 분위기를 전합니다. 심사정의 그림을 모화사상에 젖어 있다고 하며 폄하한 때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수준에서 봤을 때 심사정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18세기 우리 조선 화단이 갖고 있었던 건강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은 당대의 명문 중 명문인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었지만 증조부가 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조부인 이경여가 노론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당대 일류 문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지요. 43세때 음죽 현감을 그만둔 뒤 단양에 은거하려다 노친의 반대 때문에 지금의 장호원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덮인 낙랑장송을 그린 ‘설송도’를 보면 그림이 담박하고 고아할 뿐만 아니라 기교는 조금도 강조되지 않는 묘한 인상을 풍깁니다. 선비 그림의 본도(本道)는 그림에 기량·솜씨가 보이면 속하고 천하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그림에 능하면서도 절대 기교가 능하지 않은 인상을 줘야 하는 것이지요. 문인화가 화풍이 아니면서 문인화의 경지를 완전히 자기 삶 속에서 녹여서 만들어낸 것이 이인상이었다고 보입니다. 최고의 높은 경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호생관 최북(1712~1786)은 당대의 기인으로 ‘공산무인도’와 ‘풍설야귀인’처럼 기이하고 개성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중인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인 북녘 북(北)자를 둘로 쪼개서 칠칠(七七)을 자로 삼아 스스로 ‘칠칠’이라고 했던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성격이 모질어 싸움도 자주 했습니다.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스스로 지은 그는 말 그대로 그림을 팔아먹고 사느라 작품을 남발했어요. 그러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사러오면 팔지 않는 등 그의 비위를 맞추기도 참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한 귀인(貴人)이 부탁한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다고 최북을 협박하자 자기 문갑 위에 있는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돋보기 안경도 한 알만 사서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여행하고 만주벌 너머 흑룡강까지 들어갔다 오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적을 보인 그는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서 잠들었다가 폭설이 내려 그만 얼어죽고 말았어요. 도저히 세상이 갖고 있는 룰 속에 못들어간 것이 그의 인생이었지만, 미술사에서 이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재미도 있고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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