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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Ⅱ(7) 화인열전③

편집부

<문화유산을 보는 눈> 산수·인물·풍속 망라··· 장르 초월한 ‘神筆’

공재 윤두서에서 겸재 정선까지 그동안 얘기해온 18세기 영조 때의 기라성 같은 화가들은 전부 화원 출신이 아닌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었습니다. 동양화를 보면 선비화가와 직업화가란 화가의 두 줄기가 있지요.
그런데 중국의 경우,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 선비화가였고 이를 일반인들이 공유하게 됐을 때 직업화가들이 나와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을 해놓고 이것이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곤 했습니다. 회화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베껴서 그리는 손놀림 솜씨가 아니고 그 속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고차원의 인문정신의 소산이라고볼 때 당연히 그것을 창출하는 사람들은 선비화가일 수밖에 없지요. 산수화라는 장르 자체를 만든 곽희나 원나라 때의 조맹부, 명나라 말기의 심석전(심주)과 동기창 등은 대학자였고 이를 나중에 직업화가들이 받아갔던 것입니요.
중국과 마찬가지로 선비화가들이 만든 조선시대 회화를 화원들의 세계로 넘겨준 역할을 한 인물로 표암 강세황(1713~1791)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림보다는 시와 글씨로 더 유명했던 표암이 역사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단원 김홍도(1745~1805?)라는 화가를 발견해냈기 때문이지요. 단원이 어린 나이에 궁중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간 것도 표암의 추천으로 이뤄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명나라 화가인 심석전의 그림을 모방해 벽오동 밑에서 더위를 식히는 ‘벽오청서도’와 개성 영통동을 실경산수로 그린 ‘영통동구도’ 등이 표암의 대표적인 그림들입니다. 특히 둥근 바위에 양괴감을 표현한 ‘영통동구도’는 서양화법으로 그린 것으로 전통 동양화법에선 전혀 없었던 시도를 한 것이에요.
북인계통으로 출세에 뜻이 없어 처갓집이 있는 안산과 서울 회현동에서 시·서·화를 하며 지냈던 표암은 두 아들이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고 국가에 공을 세운 덕분에 영조의 배려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여주 영릉참봉으로 첫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늙은이들을 위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해 지금의 서울특별시장격인 한성부판윤으로까지 일약 승진하지요. 청나라 건륭제가 칠순을 맞아 주변 나라의 축하사절로 70세가 넘은 사람을 요구하자 뽑혀서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뒤 이곳 성당에서 벽화를 보고 서양화법에 대한 유명한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김홍도는 1781년 37세 때 비로소 ‘단원(檀園)’이란 호를 스스로 짓게 됩니다. 단원은 원래 김홍도가 좋아했던 ‘개자원화보’의 밑그림을 그린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화가인 이유방의 호였어요. 김홍도가 가져온 단원이란 호를 보고 표암이 그대로 하면 좋겠다고 하니까 김홍도가 이를 현판으로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표암이 생각해보니 김홍도가 ‘단원’이란 현판을 달 정원은커녕 집도 없는 무주택자이기 때문에 큰 글씨로 현판을 써주기보다는 작은 글씨로 단원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가 누구인가를 써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단원기(檀園記)’란 글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이를 써놓고 보니까 좀 고치고 싶어서 ‘단원기 우일본(又一本)’을 다시 썼는데, 두 글이 단원의 37세 때까지의 일생을 얘기하는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은 글이 됐지요. 두 글에서 표암은 단원을 지칭해 ‘근대의 명수(名手)’ ‘무소불능의 신필(神筆)’이라 하고, 인물·신선·화조·산수·풍속 등 어떤 장르를 갖다놓아도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려낸 고금에 드문 화가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단원은 정조 어진을 제작한 공로로 안기찰방으로 나가기 전 궁중의 채마밭을 관리하는 사포서에서 표암과 함께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 표암은 단원을 세 번 다른 형태로 만났다는 글을 남깁니다. 7~8세 때 이를 갈 무렵에 나에게 와 그림을 배웠으니 처음에는 사제지간으로 만났고, 훗날 뒤늦게 출사해 사포서의 책임자(별제)로 있을 때 단원이 임금의 초상화를 잘 그려 내 부서에 와 근무했으니 중간에는 직장의 상하관계로 만났고, 세월이 지나서 단원의 화명(畵名)이 높아지자 사람들이 그에게 그림을 부탁한 뒤 다시 내게 가져와 여기에 시(詩) 또는 제(題)를 써달라고 했으니 나중에는 예술로써 만났다는 내용이에요.
이렇게 사제간에 합작한 작품 중에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송호도’란 작품이 있습니다. 소나무는 표암이 문인화풍으로 그리고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것인데 수만 번의 붓질로 호랑이의 털 하나하나를 표현한 것을 보면 프로정신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지요.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얘기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통합니다.
단원은 32세 때 정조의 명을 받아 기록화인 ‘규장각도’와 ‘군선도’ 등을 그렸는데, 사실 단원이 처음 이름을 날린 것은 신선그림 때문이었지요. 지금도 교과서에 단원은 조선시대 풍속화가라는 식으로 소개돼 있는 데,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표암의 얘기대로 단원은 시대가 요구하는 모든 장르를 다 소화해낼 수 있었던 분이었어요. ‘군선도’에서 선녀의 옷을 표현하며 거칠게 획을 그은 것이나 붓의 운필(運筆), 강약이 들어가 있는 박진감 넘치는 필치 등이 천상이라기보다는 지상의 현실 속에 있는 선녀를 그린 느낌을 줍니다. 이처럼 어떤 소재를 주어도 자기식으로 소화를 하고 당시 현실이 요구하고 있는 수준보다 더 높은 차원 속에서 제시를 했기 때문에 정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단원에게 관심을 갖고 여러가지 일을 시켰던 것이지요.
단원의 그림 중 유명한 ‘속화첩’은 공재 윤두서에서 관아재 조영석을 거치며 50여년 동안 꾸준히 개발돼온 우리들의 삶의 표정을 담아놓는 그림 장르가 단원에 와서 드라마틱하게 꽃을 피운 것입니다. 카메라로 찍힌 재미있는 사진을 보고 웃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의 찰나를 포착한 그림을 보면서 그 상황을 추체험하며 즐거움을 찾는 효과가 단원의 그림 속에 있는 것이지요. ‘속화첩’ 중 ‘새참’을 보면 치열하게 밥을 먹는 사람들과 이를 하염없이 부러운듯 바라보는 개의 모습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가지런히 줄지어 앉아 새참을 먹는 조영석의 ‘새참’과 비교가 되는데, 관아재가 지식인으로 애정을 갖고 농민의 삶을 표현한 것이라면 단원은 농민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민중미술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단원이 훨씬 민중미술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식인에 의해 관조적으로 봐오던 새참 장면이 농민의 심성에 들어가 그린 것으로 바뀐 것은 50년 동안 세월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며, 그것이 관아재와 단원 그림의 어떤 차별성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춤사위를 역동적으로 포착한 ‘무동’이나 혜원 신윤복의 주특기인 빨래하는 여자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훔쳐보는 ‘빨래터’, 관중들의 표정으로 누구를 응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씨름’ 등을 보면 신문지 반면도 안되는 크기의 그림 속에 시각도 정면이 아닌 부감법으로 그리면서 이처럼 작은 인물들을 극명하게 표현한 솜씨에 놀라게 됩니다.
우람한 가슴을 풀어헤치고 물 한바가지를 달라는 나그네와 물을 떠주면서 내외하느라 고개를 살짝 돌린 아낙의 모습 등을 표현한 ‘우물터’ 등에서 보이듯 단원이 그린 속화(풍속화)는 연극의 한 장면, 또는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 큰 감동을 주지요. 대상에 대한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속화에 배경을 그리지 않은 것도 단원 그림의 특징입니다.
반면 단원과 속화에서 쌍벽을 이룬 혜원은 완연히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춘화를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혜원은 당대나 후대 사람들이 그에 관해 증언해 놓은 것이나 그림을 평가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림의 도상을 가지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 단원은 필치가 거칠고 주변 배경을 생략한 데 비해, 혜원은 부드러운 필치에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한 점 등에서 정반대입니다.
1788년 44세 때 단원은 정조의 명을 받아 복헌 김응환과 함께 40여일 동안 관동팔경과 금강산 등의 스케치여행을 다녀옵니다. 이 때 정조에게 바친 수십 m되는 장폭의 두루마리 그림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이를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금강사군첩’ 70폭 중 60폭만 전하고 있지요. 이 중 ‘구룡연’ 등의 그림에 대해 단원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여러가지 제작여건이나 나이를 감안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동주 이용희 선생은 “김홍도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으로 꼼꼼하고 치밀한 그림”이라며 “아마도 임금의 명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자기의 불성실한 것 같은 개성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평가를 내렸습니다. 반면 50대 중반에 그린 ‘구룡폭도’는 단원의 필치를 한껏 맛볼 수 있지요. 단원의 작품은 30대에서 60세 무렵까지 계속 변하고 있으므로 50대 그림만 본 사람들은 30대 후반의 작품에 대해선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얘기할 소지가 있습니다.
수원 용주사의 ‘후불탱화’를 그리고 정조 어진 제작에 참여한 단원은 1791년 12월 연풍현감에 발령받아 부임했지만 1795년 을묘년 정월 만 3년 만에 “남의 중매나 일삼고 겨울에 사냥한다며 군정을 징발해 원성이 자자하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합니다. 상경하자마자 단원은 ‘능행도’로 알려진 ‘원행을묘정리의궤’ 삽화와 8곡 병풍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지요.
그러나 이런 불명예 제대를 계기로 평민으로 돌아온 50대의 단원은 이후 궁중의 화사(畵事)에 차출되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후원자였던 대부호 김경림의 집에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을묘년화첩’의 ‘총석정도’는 실경산수가 갖고 있는 박진감과 남종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그윽함이 동시에 한 화면 속에 들어가 있는 명작입니다. 을묘년 다음 해인 병진년에 단원이 그린 ‘병진년 화첩’에 산수화 10폭, 화조화 10폭이 들어 있습니다. 이중 충주댐으로 허리춤까지 물에 잠긴 옥순봉을 그린 ‘옥순봉도’와 헬기를 타고 가며 사진 찍은 듯 그린 ‘도담삼봉도’ 등이 단원의 산수화를 대표하는 명작이지요.
나귀를 타고 가다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우는 꾀꼬리 소릴 듣기 위해 멈춰선 나그네를 표현한 ‘마상청앵도’는 한국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서정을 표현한 그림이며 60세인 1804년 9월 개성 노인 64명이 옛 고사에 따라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에서 계회를 벌인 장면을 그린 ‘기노세련계도’는 단원의 마지막 대작입니다. 연꽃 대좌에 앉아 서쪽 극락세계로 염불을 외며 입적하는 노승의 뒷모습을 그린 ‘염불서승도’는 단원이 자기의 바람을 표현한 듯합니다.조선후기에 오면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신선화 외에 책거리 그림도 많이 유행했는데 단원은 이 방면에서도 아주 뛰어난 기량을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남종문인화와 진경산수, 속화 등 세 줄기의 그림이 표암을 통해 단원이란 호수 속에서 종합됐기 때문에 이후의 모든 화가들은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원의 위대함보다 바로 단원 같은 화가를 낳은 정조 시대가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인 화풍이 단원 이후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1830~40년대 국제주의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나와 청나라의 고증학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면서 ‘세한도’ 같은 고담한 문인화가 유행합니다. 추사의 8대 제자들이 퍼져나가면서 조선화단은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닌 문인화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소치 허련이나 자하 신위, 우봉 조희룡 등이 이런 경향을 대표했지요. 북산 김수철과 흥선대원군 이하응 등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그림들이 유행하면서 진짜 옛날 그림처럼 리얼리티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없을 때 등장한 것이 오원 장승업이었지요. 오원의 신화는 바로 거기에서 생겨났던 것인데, 노비 출신으로서의 신분적 제약과 자기관리를 못한 탓에 타작을 많이 만들어낸게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왕실과 양반뿐만 아니라 여염집에서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집안 장식을 하게 되고 각 지방에서 그림을 그려 파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민화들이 나오게 됩니다. 단원의 ‘총석정도’나 ‘소상팔경도’를 민화로 옮겨놓은 것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술의 세계를 접하다보면 그것이 갖고 있는 미적 가치의 척도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 수 있는데, 민화가 갖고 있는 매력은 어린애의 그림이 갖고 있는 천진성이나 단련된 천진성을 추구했던 대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애시당초 창작 동기에서부터 모든 정서가 그저 있는 그대로, 기량 그대로 그려도 이를 개의치 않을 수 있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가들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프리카 원시조각을 보고 피카소나 마티스가 거기에 매료된 것도 자기네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별도의 예술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臣禮義廉恥)’ 등의 한문자와 그 의미를 형상화한 그림인 문자도(文字圖)와 까치와 호랑이 그림 등의 민화에서 지배층의 문화를 본받으면서 피지배층이 갖기 시작한 자기만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정리〓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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