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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인간 삶의 근본 조건

이선영

공포, 인간 삶의 근본 조건
이선영(미술평론가)

1.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것
죽음이 삶의 이면이듯, 공포 역시 삶과 함께 간다. 공포는 죽음과 고통이라는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위험과 더불어 무의미와 공허라는 추상적인 차원까지 포괄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공포증(phobia)은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정의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공포증이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신경증이라고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공포와 불안이 외상(外傷)에 대한 예상이자, 그 외상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이드(id)에 비해 조직화된 자아(ego)는 공포의 실질적인 중심이 된다. 공포는 조직화된 자아가 억압하지만 억압이 느슨해지면 언제든지 복귀한다. 공포감을 일으키는 원형적인 사건은 바로 인간의 출생이다. 출생을 통해 모성에 감싸여 완벽한 균형 상태가 단절되고, 새로운 조건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자극이 태아에게 몰려든다.
아기가 출생을 떠올리는 상황을 맞을 때마다 그 불안한 정서를 반복해서 느끼게 되고 이것이 출생 이후에 생겨나는 모든 위험 상황의 원형이 된다.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거세공포 역시 어머니에게서 영원히 분리되는 두려움과 연관된다. 공포는 개체발생 뿐 아니라 계통 발생, 즉 인류의 역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자연과 투쟁하여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포의 극복이라는 주술적 목적으로 그려진 원시시대의 동굴벽화부터 공간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토기 위에 노동의 율동을 그려넣었던 농경의 시대, 그리고 중세의 묵시록적인 비전부터 현대의 그로테스크한 미술양식에 이르기까지 공포의 미학은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거치면서 이어져왔다. 그러나 미학이나 미술사에서 공포가 이론적인 틀로서 명확히 정립된 것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구별한 칸트의 저작을 통해서이다.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1764년)에서 우선 쾌와 불쾌의 느낌은 외부 사물의 성질에 기인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두가지 감정의 상태인 숭고함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을 구별한다. 칸트는 ‘구름 위로 솟아오른 눈덮인 봉우리의 산악 풍경이나 성난 폭풍에 관한 묘사, 혹은 밀턴의 지옥에 관한 묘사는 만족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소름끼치는 공포도 불러온다. 이와 달리 꽃들로 가득한 들녘이나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고 풀을 뜯는 가축들로 뒤덮인 계곡의 풍경 등은 기분좋은 느낌을 불러온다’고 말한다. 칸트의 미학적 가설을 통해 낮의 원칙이 관철되는 세계인 고전주의와 밤의 원칙이 관철되는 세계인 낭만주의의 구별이 분명해졌다. 낭만주의 미술은 높고, 깊고, 거대한 것과 관련되는 숭고미를 통해 공포에 가까운 전율을 대중에게 선사했다.
19세기의 낭만주의 미술은 자연에 투사된 숭고한 감정으로,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배나 천년 유적지의 폐허를 표현하곤 했다. 그것은 자연의 파괴적인 힘에 휘둘리는 인간의 취약함에 관련된 공포이다. 자연과 영겁의 시간성에 투사된 이와같은 공포는 불가사의한 산비에 대한 종교적 감정이 세속화된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공포를 초자연적인 형상들 속에 기괴하게 새겨넣은 미술 작품들은 신과 악마가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라는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왔다는 정신분석학의 가설을 예시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낭만주의는 보다 내면화되어 상징주의를 낳는다. 낭만주의의 숭고한 풍경 대신에 산업화와 더불어 사적(私的) 영역으로 밀폐되기 시작한 부르주아 가정이 주된 무대가 된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이 탄생한 것과 동일한 문화적 토대였다. 19세기말 미술의 기괴한 양상들 역시 공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괴한(uncanny) 것이란 ‘섬뜩하게 하는것,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독일어로 ‘기괴한 것(unheimlich)’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 용어는 ‘소박하고 친근하며 상냥하며 편안한 것, 친밀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낯설고 불편하고 이질적이고 알지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기말의 상징주의는 단지 환상과 퇴폐의 세계로 매몰되지 않고, 친숙했던 것에 대한 섬뜩한 느낌을 드러냄으로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에 걸맞는 공포를 표현했다. 20세기 표현주의로 이어지는 세기말의 공포와 환상은 초자연주의와 관련되기 보다는, 일상에 편재하는 불가사의한 힘과 관련된 것이다. 반인반수의 괴물과 흡혈귀가 출몰하곤하는 세기 말의 미술은 기괴함을 위한 기괴함이라는 경향도 낳았으나, 그것은 현대 대중문화나 하위문화의 주된 코드의 하나인 대중적 공포물의 기원으로 주목할만하다.
정상 속의 이상(異常)을 표현하는 시각적 공포물의 이미지는 복합성이 특징이다. 그것은 단독성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것의 가장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공포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과 관련을 맺을 때 더욱 강력하게 다가온다. 현실 이면의 것을 드러내는 환상으로서의 공포는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하기 때문에, 통일된 현실에 대한 재현을 교란한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기괴함이 관계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대개 합성물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물의 단일성에 균열을 내고 거기에 스며들며 그 간극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부재나 죽음처럼 간접적으로만 제시된다. 그러나 시각예술 경우 육체적 표현의 압도적인 직접성 때문에, 보다 그로테스크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필립 톰슨은 [그로테스크]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기쁨과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에서 맛보는 재미는 비정상의 정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친숙하지 못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로 바뀐다고 지적한다.
관심이 가는 것은 바로 이 두가지 반응이 엇갈리는 가느다란 경계선이다. 그로테스크는 대립되는 것들이 격렬하게 충돌함으로서, 조화롭지 못한 혼합이라는 기본 요소를 내포한다. 마치 괴물 프랑켄슈타인처럼, 자아에 의해 창조된 타자는 조각난 시체들이 합성된 살아있는 주검같은 양상을 가진다. 여기에서 타자로서의 자아는 그자체가 공포스러운 존재이다. 로즈메리 잭슨이 [환상성]에서 개진한 환상에 대한 특징이 시각적 공포물에도 적용된다. 환상은 실재에 대한 공식적으로 인정된 상징적 범주와 그 통일성을 거부한다. 환상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은 친숙함과 안락함과 친밀함을 낯섬과 불안함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타자이며, 은폐된 어떤 것의 암흑세계, 즉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한정된 틀을 벗어나고, 언어와 시선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간을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상성은 공포스러운 것과 결합한다.
예술의 상상력은 현실을 도려내고 거기에 부재하는 것, 타자, 요컨대 말해질 수도 없고 보여질 수도 없었던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현대미술에서 공포는 유사(類似) 종교적 관념이라 할 수 있는 기괴함의 미학을 넘어서, 보다 형이하학적인 수준인 체액까지 내려왔다. 배설물 내지 배설적 행위와 현대미술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지저분한 체액이 등장하는 최근의 미술경향이 아니더라도, 가령 현대미술에서 물감을 쏟고 안료를 으깨고 그 위에서 뒹굴고 하는 카니발적인 행위에는 그자체로 배설적인 그 무엇이 있다. 현대미술에서 배설물, 시체, 전염병의 빈번한 출몰은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육체적 경계선들에 대해 불안하게 파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기괴함과 금기에 대한 생각을 비천함(abjection)으로 발전시킨다. 비천함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경계를 알지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비천한 것은 불가능한 대상이며, 여전히 주체의 일부이다. 그것은 주체가 몰아내려고 애쓰나 없앨 수 없는 대상이다. 비천함에 대한 표현은 내면이면서 외면인 것,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 그자체로 존재하면서 휘말려 들어가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비천함에 대한 느낌은 조직하고 기능화시켜서 자기것으로 흡수한 영양을 주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그래서 문명은 비천함을 정화시키고 체계화시키고 사유함으로서 거리를 두려하였다. 현대미술의 주류가 그 무엇으로 흘러갔든, 재현되는 대상의 안정성이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주체도 객체도 아닌 애매한 것이 경계를 넘나들면서 부재와 퇴행, 죽음의 이미지를 낳는다. 유출과 흐름이 빈번한 현대미술에서 몸은 더 이상 고유의 통일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2. 예술을 추동하는 힘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예술가란 겁에 질려죽지 않기 위해 그리고 기호들 속에 부활하기 위해 은유화 작업을 성공시키는 공포증 환자라고 정의한다. 공포증 환자는 은유성이 부족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공포증 환자의 치료는 명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새로운 은유들로 전환시키는 놀이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치료라기 보다는 공포증에 대한 유일한 거래가 된다. 예술의 언어는 공포증의 전개 과정에서 덧없지만 필수불가결한 구원의 장, 곧 물신이 된다. 예술가에게 있어 의식의 뒤켠에 존재하는 것들을 작품으로 끌어내는 것은 출산과도 비교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코라 세미오티크’, 즉 ‘기호계’라는 용어를 쓰면서 임신처럼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모호한 상태를 규정한다.
아이는 원초적인 어머니와의 결합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아 분화와 언어 습득의 과정을 거치면서 억압된 충동 에너지가 생겨나고, 그것은 상징언어에서는 배제된 몸짓이나 구문파괴, 아이러니 등의 형태로 분출한다. 이러한 분출을 통해 상징 언어의 주체는 그 단일성이라는 위상이 도전받고 교란당한다. 시각 이미지 역시 혼돈을 분절적인 기호들로 전환하고 질서화하고 명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언어적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조형 언어 역시 인간의 모호한 정서를 명명하려는 시도의 하나인 것이다. 모종의 불확실함과 대면할 때 의미는 침식되고 파기된다. 공포증의 대상은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고, 주체로 하여금 가능한 한 오랫동안 결정내리기를 미루게 하려는 것이다. 무(無)에 대한 환각을 보여주는 많은 현대미술처럼 공포증의 대상은 무를 반복하면서 대상 관계의 불안정함을 연출한다.
라캉이 모든 기호, 의미, 담론의 뚜껑을 여는 열쇠로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때, 아버지의 이름은 단일성, 또는 유일한 구성작용에서의 필수조건을 지칭한다. 부성적인 기능, 이를테면 단일한 특성을 밝혀주는 종(種), 또는 유형학에까지 이른다. 기호란 음성적인 기호와 시각적인 기호(사물의 재현적인 면) 사이의 압축관계이다. 기호를 구성하는 압축기능이 실패하였을 때 분열이 일어나며, 분열을 가로질러 청각과 촉각 및 신체 운동과 시각, 즉 전신감각을 통한 직접적인 의미작용의 시도가 나타난다. 크리스테바는 환각이 시선이나 재현의 중개를 통해서 유지된다고 지적한다. 시각적 환각은 다른 것들, 이를테면 청각적, 촉각적인 환각들을 집결시키고 주체의 욕망을 재현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인 약호를 부인하는 새로운 조형언어가 탄생한다. 기표와 기의 간의 분리는 재현을 붕괴시킨다. 가령 환상이나 공포는 타자로서, 이에 대한 적절한 재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 자리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은 적당한 재현물을 가지지 못하고, 부재, 비의미, 죽음을 끌어들인다. 명확한 이름과 형태가 없는 어떤 것이기에 더 위협적이며 쉽게 추방되지도 않는다. 로즈메리 잭슨에 의하면 공포는 익명의 존재, 형태가 없고 형식이 없으며, 이름이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된다. 명료한 형태는 사라지고 흘러내린다. 공포의 이미지는 욕망과 금지 사이에 위치한다. 묵시록이나 카니발적인 문화전통을 계승한 현대 미술 역시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흔들리고 안팎의 경계조차 불확실하다. 나와 타자, 무와 전체 사이의 벌려진 상처가 말하는 심연이 존재한다. 현대미술에서 물질의 덩어리처럼 심하게 뭉개진 인간의 형상들은 공포와 더불어 시체애호증적인 쾌락을 전달한다. 살육과 죽음의 장소는 그리기의 출발점을 이룬다. 공포는 현대미술의 창조성과 새로움 뿐 아니라, 공격성, 공허함, 무질서, 해체적 경향의 근간을 이룬다.
근대에 오면 전해져오던 의미의 패턴을 상실하고, 그 결과 실재와 인간본성, 총체성의 개념이 분해된다. 기호는 초월적인 의미을 갖지 않는다. 의미는 사라지고 화폭은 공간 공포증을 야기하는 텅 빈 캔버스로 변화한다. 모더니즘은 의미화의 상실을 말하는 작가들에 의해 발전될 수사학을 확립한다. 모더니즘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확산에 대한 반응으로, 부르주아 문화의 변방에 위치하면서 부르주아 문화와 대화적 관계로 기능하였다. 불안정함, 무질서, 파편화된 구조, 비통합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더니즘은 기존의 문화가 규정한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서 그 극단의 영역, 곧 정체성이 무의미해지는 지점까지 밀고나가려는 충동의 산물이다. 현대미술은 인간의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는 모호한 그것, 부정적인 범주로만 개념화될 수 있는 거대한 타자의 영역에 자리잡고자 한다. 그것은 이국적이거나 악마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등으로 재현되곤 하였다. 이러한 부정적인 재현에 여성적인 것도 추가할 수 있게 된 것은 현대 페미니즘 미술 연구의 진척 덕분이다.
공포에 성(性)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인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의 외음부가 기괴한 느낌의 주요 원천이다. 그것은 남성으로 하여금 거세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기괴한 것은 재현의 구조 속에 내장된 남성성(masculinity)의 부호를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 후기 구조주의, 예술이론, 페미니즘 등에서 주목받아왔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동일성을 굳히지 못하고 주관적인 경험과 대결하는 이름없는 타자로 간주될 때, 여성성의 이질적인 국면에 대면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 국면은 공포와 비천을 가로지르면서 황홀경으로 묘사된다. 크리스테바는 매혹적이고도 비천한, 양육하는 동시에 죽이는,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무시무시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가설을 인용하는 앨퍼드는 안도 바깥도 위치도 없는 느낌과 경험에 대한 패러다임은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라고 지적한다. 유아는 자신의 표면이 어디에서 끝나고 어머니의 표면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모른다. 유아 자신의 경험인 동시에 타자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상, 곧 틀이 없는 상태이다. 여기에서는 상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육체적 경험, 여러 모양에서 느끼는 인상, 형태, 리듬이 상징을 대체한다. 출산 장면은 안과 밖, 나와 타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크리스테바는 어머니에 대한 공포는 곧바로 그녀의 출산능력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고유한 것’의 부재와 같은 비천함을 동반하는 것, 고유한 한계에 대한 위반이다. 누군가가 한계에서 비천함을 인격화하면서 정화작용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인 것이다. 남성은 비천함을 인식하고 폭로함으로서 그것을 정화시킨다.
현대미술 속에 범람하는 육체적 폐기물은 상징질서의 취약함을 재현한다. 신체에 뚫린 구멍들은 오염된 대상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배설물과 그것의 등가물들(부패, 감염, 질병, 시체 등)은 동일성의 외부로부터 온 위험을 표상한다. 즉 비(非) 자아로부터 위협당하는 자아, 외부환경으로부터 위협받는 사회, 죽음으로부터 위협받는 삶처럼 말이다. 그러나 더러움와 깨끗함을 구별하는 기준, 죽 오염의 의식화 과정은 성별의 엄격한 구별과 위계에 대한 강박관념적 관심과 연결된다. 이 다른 성, 여성은 사회가 억압하려는 근본적인 악과 동일시되곤 한다.

3. 사회의 견고한 상징적 질서와 공존하는 공포
현대미술에서 강력한 시각적 공포를 낳는 비천함의 미학은 사회의 질서를 구성하는 필연성으로서의 금지의 나약성을 예시한다. 근대 이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예술가들은 이 금지의 영역에 기거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생산해왔다. 그러나 사회의 견고해 보이는 상징적 질서, 곧 순서 매겨지고 위계화된 기초는 단단한 지반 위에 올라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동일성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단순논리는 고유성과 정체성을 형성하지만, 금지는 곧잘 그렇듯 위반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영감을 준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에 의하면 오염이란 상징체계의 부산물이다. 오염이란 질서의 한계나 가장자리와 관련있는 요소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사회적인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의 사회적 합리성이란 그것의 논리적인 질서 위에 사회적인 총체가 기초한다.
공포는 매혹적이면서 위협적인데, 그것은 비대상처럼 윤곽을 드러낸다. 공포는 비천함 처럼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질서에 공존한다. 공포는 더러움, 음식물 터부, 죄와 같은 비천함의 변이체들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한계와 관련된다. 즉 가장자리인 한계의 전락한 대상이다. 오염이 가져오는 위험은 인간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이념들의 구조에 내재하는 힘이다. 공포 역시 주체에게 있어 영원히 상징체계 자체, 그것이 구별들과 차이들의 세계인 한 언제나 짊어져야 하는 위험을 표상한다. 공포는 결국 상징질서의 취약성으로부터 온다. 말하는 존재가 경계의 내부, 혹은 외부를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공식들로부터 공포는 온다. 공포는 주관성의 체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공포는 폭력, 잔혹 등을 통해서 마비된 현대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자극제로 등장한다. 그것은 절대적 폭력에 대한 공포과 관련된다. 과학주의 흉내를 내는 형식주의의 빈약함을 넘어서 마술과 제의를 닮으려는 현대미술의 일단은 피로써 피를 씻는 듯한 가장 폭력적인 제의의 방식을 동원한다. 물론 그것은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폭력이다. 그것은 불경함, 금기 위반, 정화 등의 원시종교적인 패러다임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현대미술에 다시 연극을 불러들인다.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형식주의에서 그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는 물마루에 연극성(theatricality)이 등장했다. 연극성은 대상이 불확실한 가운데 강력한 현존과 몰입, 각성 등을 요구한다.
앙토넹 아르토가 [잔혹 연극]에서 주장하듯이, 영혼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일종의 총체적 푸닥거리 등은 절정에 달한 힘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파괴없이는 획득되지 않는 최상의 균형으로, 예술을 본래의 진정한 차원으로 다시 돌려놓으려고 할 때 공포가 가장 영향력있고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라는 점을 예시한다. 단순히 눈과 두뇌가 아니라, ‘신경과 심장을 각성토록 하는’(아르토) 예술이고, 이러한 예술은 육체의 내부를 진동시켜 온몸으로 작품의 현실에 몰입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재현적 현실은 완전히 해체하고 생성의 무대를 만들고자 한다. 여기에서 공포는 이성과 논리의 체계를 넘어서 원시 상태의 꿈을 통해 영혼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술은 공포 자기 안의 타자로서 내면화함으로서 사회와 인간의 정신의 정화를 시도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사악한 힘을 불러들여 악마를 쫒아내는 푸닥거리와도 비슷하다.
크리스테바 역시 [공포의 권력]에서 오염을 정화하고 공포를 쫒는 의식과 예술이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육체에 대한 최초의 지형도를 이원론적 논리의 하나, 즉 그녀가 상징계(le symbolique)의 반대편에 자리한 기호계(le sémiotique)라고 부른 곳에 펼침으로서, 완전한 사실도 철저한 사상도 부인하고, 모든 체계에 내재해 있는 나머지의 존재를 강조한다. 공포를 비롯한 억압된 타자는 이 잉여의 영역에 속하면서 모든 형태의 전제조건이 된다. 공포는 인간의 조건 그자체에 내재해 있으므로 완전히 쫒아낼 수는 없다. 현대사회는 자신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범죄가 만연한다. ‘세계를 영원한 공격의 근원으로서 경험한 사람에게는 선제 공격이 가장 훌륭한 방어’(앨퍼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를 추상화시키고 상징화시켜 그것에 창조적 형태를 부여하는 계몽주의적 방식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공포 자체가 상징질서를 위반하는 충동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동을 통해 예술은 미지의 것과 접속하게 된다.

*도판 캡션 및 설명
(1) Hieronymus Bosch, [Garden of Earthly Delight](부분), 1500년; 쾌락과 공포는 같은 기호를 가진다.
(2) Hieronymus Bosch, [Garden of Earthly Delight](오른쪽 날개 세부), 1500년; 새의 머리를 한 괴물이 새를 배설하고 있는 족속을 먹어치우고 있다.
(3) Hieronymus Bosch, [Last Judgment](오른쪽 날개-지옥 부분), 1504년; 화가들은 천상의 장면보다 최후의 심판이나 자옥의 장면에서 더욱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들은 묵시록적 세계관과 친숙하다.
(4) Henny Fuseli, [The Nightmare], 1781년; 꿈을 통해 억압된 타자, 곧 섹슈얼리티와 공포가 회귀한다.
(5) O. Redon, [Eye-Ballon], 1878년; 수수께끼처럼 파편화된 몸은 세기말의 공포와 환상을 표현하는 물신이다.
(6) O. Redon, [Smiling Spider], 1881년; 그로테스크한 변신은 시각 예술이 공포를 표현하는 주된 방식이다.
(7) Edward Munch, [The Scream], 1893년; 주변의 생활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근대인의 공포를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8) Arnold Boecklin, [The Plague], 1898년; 공포는 페스트처럼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후 순수한 상태를 남겨놓는다.
(9) Frida Kahlo, [Henry Ford Hospital], 1932년; 출산의 광경은 비천함(abjection)의 결정체이다.
(10) Francis Bacon, [Study after Vala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1953년; 종교의 바탕을 이루는 선과 악, 신성함과 불경함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에 기대고 있다.
- 2005년 서울예전 교지에 발표했으며 2005년 제1회 석남젊은이론가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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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 웹진 미술과 담론에 발표한 전시리뷰 84건 -2004년
(전시 한편 당 200자 원고지로 평균 30매-40매 분량, 지면에 발표한 글과 내용이 완전히 겹치는 글의 경우 괄호로 표기함.)
우리들의 기호, 선물, 이정승원, 이주영, 백재현,Wall Works, 박용석, 김상길, Emerging V, 한기창, 이준구,Bernd Halbherr, 지니 서, 권기수, 류인, 이장원, 이야기하는 벽, 백치들, 이형구, 김재일, Spirit, 신영미, 권여현, 조성준, 권터 위커, 톰리, 이한수, 이주연, 강상빈, 냉장고를 열다 #2-훗, 노진아, 박소영, 안규철,Wall Works 2, Mix Max, 장지아, 이부로, 김은주, 피에르 & 쥘, out the window, 충돌과 흐름, 김수지, 홍성민, (혜자), 멕시코 전통가면, 빗살무늬에 대한 추억, 노재운, 혁명은 비로 연기되었다, 토마스 루프, 강홍구, 정세라, 박원주, Rolling Space-구름, 임자혁, Eugene Atget, 전준호, 이형주, 프로젝트 대기중 000, 주효진, 내부공사-호주영상 작가, (경지연), 상상이상, 함진, 방명주, 김보중, (밤 속의 또다른 밤), 신예선, 이현우, 차소림, YYShim, 변재언, 정미영, 고석원, (김석), 김재홍, (허진호), 고경호, 박용식, 김영진, 문자향, 우창훈, 서울-브리스번 작가 교류, 이순주, 제임스 터렐 展
2005년
한수지 작가론--2005년 봄 이탈리아에서 전시
한국의 아트페어-서울 아트가이드 2월호
천민정 리뷰-월간미술 3월호
한국의 페미니즘 미학의 방향성-미술세계 3월호
김창겸 작가론-아트 인 컬쳐 3월호
전시회 문제-문화예술 5월호
쉼표 전 리뷰-월간미술 6월호
2004 미술연감 통계 및 총론-문예진흥원에서 6월 발간
문화예술 위원회의 방향성-마로니에 미술관 강당에서 발표한 세미나 원고
미술 정보화-문화예술 6월호
밀레 전 리뷰-월간 아트 플러스 7월호
작가의 의무-문화예술 7월호
김인태 론-경기문화 재단 발간 책자 10월
팜므 파탈을 보는 두가지 시각(리뷰)-미술세계 7월호
미술정보지의 현황-문화예술 8월호
공포의 미학-서울예술 전문대학교 교지 8월 발간
어린이 미술전-서울 아트 가이드 9월호
최수앙 작가론-11월 초 전시예정
신치현 론-고양오픈 스튜디오 워크샵에서 11월 초에 발표 예정
* 현대미술 웹진 미술과 담론에 발표한 전시리뷰 38건 -2005년
새로운 과거, 서현석, 상상유희, 최두수, 천민정, 조영아, 노진아, 오상욱, 시각서사, 공성훈, 도윤희, 쉼표, 이해민선, between, 김미형, Nano in Young Artist, 김준, 이윤태, 피터 핼리, 이윰, 임국, 음현정, 미술과 수학의 교감, 이부록, 고헌,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 guraphic science, GRAF 2005, 김춘자, 쌍쌍 Pair, 미식가, 차민영, 이수경 展
10월 중 업데이트 예정--최진욱, 홍경택, 정정주, 최인선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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