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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팝’ 유생儒生들, 실경實景을 얻다

반이정

글 ㅣ 반이정

올 들어서만 줄잡아 다섯 군데가 넘는 수도권 소재 미술관과 화랑이 청년작가 발굴을 기치로 기획전을 내놓았다. 무릇 조직의 정상 운영과 발전적 변화는 세대교체라는 진통을 통과할 때 보장받는다. 이것이 진통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선발세대가 구축한가치와 이권을 후발 세대가 이양받는 과정 때문이기도 하고, 그 과정상에서 불가피한 과거청산이 세대간 갈등을 촉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 역시 그러한 세대교체와 항상 직면한다. 신진작가 발굴 작업은 미술계 스스로가 세대교체의 적자嫡子를 모색하는 공적 후 절차 중 하나다.
지난 미술언론의 보도 양태를 살펴보노라면, 미술판이 마치 원로들에게만 창작과 발표를 허용한것 같은 인상마저 받는다. 당시라고 청년 미술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닐 텐데. 그것이 불과 10여 년 전 사정이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미술잡지도 일부 청년작가 기획보도에 눈 뜨지만 많은 지면이 할애된 건 아니었다. 1981년에 시작하여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이 당시 몇 안 되는 세대교체 준비용 전시였다면, 그저 신진작가 발굴용이 아닌 기획안의 핵심부에 청춘남녀 일색으로 채워진 전시와 평론, 그리고 토론회들로 홍수를 이루는 오늘의 분위기는 당시의 그것과 비교될 수준이 못 될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주류는 20~30대다. 이것이 지난 신진작가와 작금의 이머징 아티스트an emerging artist 사이의 차별화된 처우다.
3~4년 전부터 주요 기획전 출품자 명단에 오르내리는 작가군의 면면을 보면 이제 30대 중후반에 접어드는 70년대 초반 태생이 여전히 주류를 차지하는 걸 알 수 있다. 이건 왜일까? 이들은 대학으로 치면88~94학번 대인데, 이 무렵 정치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발표 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미술계는 야전野戰의 전사 민중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갑연을 치룬 의미심장한 해이다. 그것은 형식주의 대 참여주의라는 양립 불가능한 구도의 종결을 의미했고, 우연히도 미디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그리고 우리가 근자에 주목하는 이머징 아티스트는 바로 그 무렵 미술대학을 다닌 세대이다.
새롭게 조명되는 작가군을 다시 유형별로 쪼개 그것을 전시 기획안으로 연결시킨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 중 단연 최고 유행어는 한국적 팝아트Korean Pop Art이다. 이제는 블루칩 작가로 후배 작가의 귀감이 되어버린 최정화를 필두로 ‘팝’자 들어가는 전시회의 얼굴마담이 된 이동기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구세대 팝 작가 이외에도 작금의 젊은 작가들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팝(혹은 네오팝)’이 되었다.

이 글은 창작의 지형 변화를 리드하는 세대교체의 추진력 중, 동양화의 현실적 수용에 눈 뜬 차세대(동양화과 출신) 작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전히 지필묵을 존립 기반으로 삼는 동양화과의 생리는 어쩌면 미술장르 중 변화에 가장 더딘 분야로 스스로를 내몬 이유였을 것이다. 2000년대 전후로 우리는 전에 없이생경한 동양화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난, 혹은 아예 동양화를 등진 실험작으로 주목받은 작가를 떠올릴 수 있다. 작년에 이어올해까지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조습도, 작가 자신의 노출 신과 포르노그라피 드로잉을 내놓은 장지아도 모두 동양화를 전공한 바 있다. 반면 기법과 운치는 동양화에서 찾되, 종전의 전통에 독창적 애드리브를 얹은 작가군도 생겨났다. 근자에 붐을 이룬 청년작가 발굴형 기획전이나 네오팝적 출품작을 선도하는 일군은 바로 이들에게서 나오곤 한다.
이들의 정신적 전신을 찾는다면 김학량 정도가 떠오른다. 2000년 2월 한 미술잡지 한국화 특집에 김학량은 <지필묵 다시 읽기>라는 기고문을 통해 한국화(혹은 동양화)로 총칭되는 제 개념을 재고해봐야 한다는 충분히 무정부주의적 선동을 한다. 그는 1998년부터 기획, 창작, 비평을 오가며 반체제적 한국화의 삼각도를 그려왔다. 이를 테면 김학량이 2000년대 들어 화단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퓨전식 동양화’의 맏형격이 된 것이다. 그의 존재감을 사전에 인지했건 못했건 후발주자의 인식론적 틀거리는 친親 김학량적이다. 이들의 특징은 동양화 고유의 스타일은 유지하되, 아카데미에서 주입된 도식성을 가볍게 털어내는 점일 게다. 이들이 교육받아온 존립 근거였던 지필묵을 사실상 포기하고, 동양화의 폐쇄적 자산資産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반성으로 채워진 재현술로 화선지를 채워나간다. 항간에 젊은 작가들의 한 유형으로 분류되는 팝아트적 속성도 실은 무거운 관념을 털어낸다는 점에서,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 역시 일종의 자성의 한 방식일 것이다.이것이 코리안 팝이 대안 동양화 그룹과 만나는 지점이다.
지난 6월 ‘팝아트’를 대놓고 내세운 이란 전시가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있었다. 출품자 중 한 명인 박윤영은 가느다란 세필로 그려진 정통 미녀도와 명품 브랜드(Cartier)의 카탈로그 이미지를 결합시킨 <카르티에 미녀도 Cartier Beauty Series>(2003~2004)를 내놨다. 2003년경부터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관찰되는 박제된 동양화 이미지를 소재로 삼은 그녀는 크리넥스 티슈 종이곽 위에 인쇄된‘동양화적’ 채색을 실제 티슈 위로 연장시키는 냉소적 작업을 선보였고, 다국적 생수회사 ‘에비앙Evian’의 로고를 족자 위로 옮겨오는 작업으로 작금 우리가 실경에서 마주하는 동양화의 위상과 현주소가 어디로 이전해 있는지 유쾌한 통찰을 연작으로 입증해줬다.
같은 시기 갤러리 세줄의 도 신영미와 손동현이라는 동양회화의 히든 카드를 제시하며전통화단의 방호벽을 후발 세대들이 어떻게 통과하는지 예시한 바 있다. 손동현의 시도는 박윤영과 주제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 역시 아메리칸 무비의 전형적 영웅상이 지구 반대편 동아시아에서 수용되는 맥락을 군자君子로 탈바꿈한 연작물로 선보였다. 장지에 그려져 족자 속에 갇힌 <재임수 본두 선생상>(2004)이나, <영웅인구래다불가족도>(2005) 등이 그렇다.
지난 10월에는 민화民畵와 만화漫畵 사이를 오가며 “시대에 따라 현현顯顯하는 모습은 달라도 그 궁극窮極의 원형은 애초부터 지금까지 항상 동일”(이상 작가 노트 부분 인용)하다고 피력한 서은애가 대표적 인사동 소재 상업화랑 ‘do art gallery’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의 첫 개인전 장소가 대안공간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런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세필 선과 감미로운 채색 면으로 구성된 서은애의 별천지 산수도의 특징은 그 자체로 동양화의 현지 적응도를 시사하는 효과와 함께 일단 한눈에 보기 좋다는 점이다. 그녀의 작업이 대안공간과 상업화랑에서 동시에 주목받을 수 있는 맥락은 바로 소장 가치가 고려된 조형적 시사성時事性 때문일 것이다.
끝으로 지필묵과 족자를 아예 내동댕이치면서도 문제적 동양회화에 접근한 희한한 케이스도 있다. 임택이 그렇다. 2차원에 갇혀 있던 동양회화가 3차원 동양 조각으로 제시될 수 있는 모범사례를 마련한 경우로, 그가 참조하는 원형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동양회화 거장의 작품들로서, 우드락, 종이, 탈지면, 그리고 프라모델 인형을 동원해 선배 세대의 유산을 현재의 지형지물에 맞게 변형한다. 그의 작업성향 일반을 ‘최소주의’라 간단히 규정하고 싶다. 그 이유는 재료, 외형, 스타일, 제작과정 면에서 비교적 경제적인 전략을 택한 탓이다. 아울러 동양화 특유의 관념주의의 거품을 제거한 점도 최소주의라는 규정에 근거를 실어주게 된다.
한때 학계에서는 동양화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관한 논의가 한창인 적이 있었고, 여전히 매듭을 짓지 못한 걸로 안다. 하지만 그런 떠들썩한 강단의 논의와는 별도로 현장의 동양화는 이미 ‘건강하고’ ‘유쾌하게’ ‘자진 해체되어’ ‘거듭나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지리멸렬했던 대안적 동양화 그룹이 장르 구별의 구태를 벗어나 미술의 창작 지형을 움직이는 진정한 세대교체의 실경 풍속화다.
반이정│1970년 서울생으로, 2002년 의 평론 공모에 당선되어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잡다한 지면에 글을 발표해왔고, 2003년에는 <중앙일보>에 ‘반이정의 거꾸로 미술관’을 1년동안 연재한 바 있고, 현재는 <한겨레 21>에 ‘반이정의 사물보기’를 연재하면서 대중적 외연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비평을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연계시켜 비평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런 취지에서 지금 신경미학과 진화미학을 공부 중이다. 미술 이외에 영화 및 사회, 문화, 정치 현상 일반에 관심 많은 그는 dogstylist.com 을 운영하고 있다.
출처-기전문화예술 2005.11ㆍ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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