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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박물관이 탄광도시 랭스에 분관을 짓는 이유는?

최정미

글 ㅣ 최정미


지난 9월 28일자 <르 피가로Le figaro>지는 ‘루브르II를 위한 일본인들’이라는 제목의 장 발바이의 기사를 다루었다. 루브르의 분관을 지을 것이며, 후보지를 물색한다고 정부에서 밝혔을 때만 해도 몇 개의 언론사에서 단지 두세 줄만의 기사를 실었고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프랑스 각 지방에 설립된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생각할 때 박물관 분관 하나를 짓는 것쯤은 그리 큰 기삿거리도 아니었을 것이고, 당연히 대도시에 지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 중의 하나이고 역사가 깊어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이 루브르박물관의 분관이 문화예술적으로 가장 낙후된 옛 탄광촌의 소도시에 건설될 것이며, 그 건축물이 일본인에 의해 지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왜 대도시가 아닌 노동자와 땀 냄새로 가득한 빈민의 도시가 선정되었으며, 어떻게 그 낙후된 지역에 세계적인 규모의 박물관을 지을 것인가? 그리고 최종 결정된 프랑스인의 프로젝트와 일본인의 프로젝트 중에서 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프랑스 건축가 뤼디 리시오티의 프로젝트가 선정되지 못했는가? 이것은 너무 무모한 결정은 아닌가?
루브르는 1190년에서 1202년에 필립 오귀스트Philippe Auguste가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파리를 지킬 목적으로 건설한 중세 양식의 성채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1세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고, 그 뒤를 이은 프랑스의 왕들은 4세기에 걸쳐서 이 건물을 개조하고 확장했다. 그러다가 1793년부터 박물관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40만 점 이상의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나폴레옹 시절에는 패전국에서 약탈해 온 예술품들로 가득 채워 그 당시 루브르는 세계 제1의 미술관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많은 예술가들은 세계 각국의 미술양식과 역사적 산물들을 이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의 예술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연히 루브르박물관은 시간이 갈수록 그 명성을 더해갔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은 루브르 전체 건물을 박물관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미국인 건축가 L.M. 페이는 새로 설계한 주요 입구를 금속과 유리만을 이용하여 유리 피라미드를 만든다. 주변 건축물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 현대적이고 독특한 재료 사용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제 이 유리 피라미드는 루브르박물관의 상징이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고,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통해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들과 만난다.
사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은 모든 소장품을 전시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며, 많은 보물들이 상자 안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은 지 오래다. 이에 전직 문화부장관 장 자크 아이야공은 이 소장품들을 가지고 지방의 새로운 관람객들을 찾아가자고 제안하는데, 그 뒤를 이은 르노 돈느디유 드 바브르장관은 지방의 한 도시에 루브르 분관을 지어 500에서 700점에 이르는 중요한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관람객을 끌기 위해 2년에서 3년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바꿔 전시하며, 그에 따른 예산을 117백만 유로 정도로 책정할 것을 결정한다. 프랑스 북부지방 노르 파 드 칼레Nord Pas-de Calais 지방자치단체 상임위원장 다니엘 페르쉬롱은 아라Arras, 발렌시엔느Valenciennes, 칼레Calais, 블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 아미엥Amiens, 랭스Lens의 도시들을 루브르 분관을 지을 후보지로 제안하는데, 이때 프랑스 정부는 이미 리옹Lyon, 몽펠리에Montpellier와 같은 대도시를 그 후보지로 염두에 둔 상태였다.
이때 랭스의 시민들은 루브르II의 유치를 위한인터넷 사이트를 개설, 지지조직위원회를 발족하고 서명운동을 시작한다. 2004년 5월 29일 랭스 시민들의 서명록이 문화부에 보내지기 전랭스의 시장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되고, 2004년7월 20일에는 문화정보부 장관 르노 돈느디유 드 바브르Renaud Donnedieu de Vabres가 공식적으로 후보지들을 방문한다. 같은 해 11월 국무총리 장 피에르 라파항은 갑작스럽게 랭스 시를 방문하여 옛 탄광촌이 파리의 박물관을 맞아들일 것이라는 공식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도시의 미래를 위한 단합된 랭스 시민의 마음이 정부를 움직였고, 같은 지방의 후보지였던 5개의 지역자치단체 또한 이를 위해 목소리를 보태주었다고한다.
랭스 시가 후보지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예술가이자 광부의 아들인 귀 아루쉬리Guy Alloucherie는 “예술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절대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연극, 무용, 그림, 조각 등은 우리들에게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단 말인가? 광부들,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마저도 이러한 문화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탄광촌의 모든 사람들이 이 도시에 에너지를, 희망을 주기 위해 고통을 참으면서 노력했음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도 최소한의 평등과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소외와 멸시로 고통스러웠던 이 지역에 이제 그 품위를 돌려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곳 탄광 지역에 루브르 전체를 그대로 옮겨 놓아야 할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에 랭스 시의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무총리의 공식 발표가 있은 후 2004년 12월 랭스의 시민들은 시청 광장에 나와 환호성을 터뜨리고 불꽃 축제를 하며 기쁨을 나눴다. 2005년 3월 이 지방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전 세계의 건축사무소에 루브르II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건축공모 사실을 알렸다. 이에 각 대륙에서 120개의 프로젝트가 도착했고, 그 가운데 6개 건축사무소의 프로젝트가 일차적으로 선정되었다. 프랑스 릴Lille의 제롬 드 알쥐아 건축Jerome De Alzua Architectures, 영국 방돌Bandol에 사무소를 둔 프랑스인 뤼디 리시오티Rudy Ricciotti, 파리의 라카통과 바살 건축Lacaton et Vassal Architectes, 도쿄 카지오 세지마와 리유 니시자와Kazyo Sejima et Ryue Nishizawa의 사나Sanaa 건축, 그리고 뉴욕의 스티븐 홀 건축Steven Holl Architectes 등이다. 거기서 또 다시 뤼디 리시오티(프랑스), 사나(일본), Zaha Hadid(영국) 등 3개 건축사의 프로젝트로 좁혀지고 여기에서 7715점을 얻은 리시오티와 7645점을 얻은 사나의 프로젝트가 노르 파 드 칼레지역 상임위원회에 의해 투표에 부쳐진다. 22표의 찬성표와 22표의 반대표를 얻은 가운데 일본인 건축사 사나의 프로젝트가 수상작품으로 선정된다. 이 과정에서 상임위원장인 다니엘 페르쉬롱과 루브르 박물관장인 앙리 로이레트Henry Loyrett가 심판이 되어 일본인들의 작품에 손을 들어준다. 상임위원장은 일본인들의 프로젝트가 그들 지역의 특성과 환경이 잘 고려된 점을,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장은 유리와 강철로만 이루어질 건물들의 단순미와 우아함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빛에 대한 개념을 높이 평가했다.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 중의 하나인 루브르박물관이 문화적으로 소외된 작은 도시에 세워지게 될 것이고, 이 도시는 스페인 빌바오Bilbao에 세워진 구겐하임Guggenheim 분관의 발자취를 또 다른모습으로 걷게 될 것이다.
루브르의 분관이 세워질 곳은 랭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옛 탄광촌이며, 지금은 나무들이 무성한 녹지대이다. 일본인들이 설계한 건축물은 시내의 외관을 그대로 간직한 채 투명한 유리와 강철로만 지어질 것이며, 건축물의 천장은 투명한 유리로만 구성되어 시시각각 바뀌는 자연의 빛이 쉴새 없이 새로운 빛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할 것이다. 게다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질 외벽들은 주변의 풍경들을 그대로 드러내어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꽉 막힌 듯한파리 루브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될 터인데, 이것이 바로 랭스 시장이나 시민들이 바라던 바였고, 현 루브르 박물관장 또한 바라던 바였다. 또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도록 최대한 지역의 특성이 고려될 것이다. 파리 루브르가 그랬듯이 랭스의 루브르도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아 시민들은 그들의 삶 안에서 예술과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랭스 시는 교통의 요지로서 기차나 자동차, 비행기로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데, 2008년에는 고속열차인 테제베TGV가 그곳을 지나가게 된다. 또한 시내를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40만의 인구가 거주하고, 25킬로미터 내에 90만의 인구가, 그리고 250킬로미터 내에는 3천만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한 해에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랭스 시를 방문하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창출되는 경제적 이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예로 발표 이후 벌써부터 250개 이상의 일자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제 루브르II는 문화관광자원으로 그 가치를 다할 것이며, 랭스 시민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문화와 예술을 공유하는 동시에 경제 활성화를 통하여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루브르 분관을 짓기 위한 예산은 총 117백만 유로로 60퍼센트는 노르 타 드 칼레 지방에서, 20퍼센트는 유럽기금으로, 그리고 나머지 20퍼센트는 랭스 시 자치단체에서 충당하기로 결정되었다. 2006년까지는 건축을 위해 주변의 환경을 정리하고 2007년 초부터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2008년 말쯤에 건축물을 완성시키고 소장품들 옮겨 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2009년 초에는 일반인들에게 루브르II의 관람이 허용될 것이다.
프랑스에서 이와 같은 예술문화의 지방분권화가 실현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프랑스 정부는 각 지방의 예술센터들과 연계하여 투자를 했으며, 특히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국가보조금을 지급해왔다. 그리고 1981년에는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했던 쟈크 랑JackLang의 정책에 힘입어 프랑스의 미술기관들이 두드러지게 증가했고, 많은 예술가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일반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일들은 프랑스 미술정책 중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 되었고, 수많은 미술센터와 현대미술의 공공콜렉션의 업무를 맡은 위원회 즉, 현대미술 지역기금 상담기관인 프락Frac(Fonds regionaux d'art contemporain)과 같은 기관이 창설되었다. 또한 1982년 5월에는 조형미술 전문 행정부가 발족되었고 조형미술 분야에 대표자를 위임하는 등의 활동을 조정해 나갔다. 또한 작크 랑은 문화부 예산을 괄목할 만큼 올려놓았고, 늘어난 국비와 정부보조금을 원활히 이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각 지방에서는 많은 예산을 미술가들의 원활한 작품 활동을 위해 쏟아 부었고, 마침내 1984년부터 프랑스 전체가 지붕이 없는 거대한 미술관으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도심 어디에서나 미술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미술양식에도 빠르게 적응해 나가게 되는데, 그 좋은 예로 에펠탑을 지을 당시 거센 반대에 부딪혔던 파리 시도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나, 라 데팡스La Defense, 그리고 퐁피두센터Centre Georges pompidou와 같은 현대적이고 새로운 건축물들을 큰 장벽에 부딪치지 않고 지었던 사례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늘 새로운 것, 무엇인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모든 건축물의 변경과 건설 등에는 무척 까다로운 제도적 규제를 가해 전통문화와 그들의 역사를 지키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는 것이 프랑스 정부의 정책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예가 말해주듯이 프랑스 인구의 반 이상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고, 그 나머지 인구는 ‘새로운 것’과 ‘무엇인가 다른 것’에 목말라 있다.건물의 모든 배관이 밖으로 드러나 흉측해 보일 만도 한 퐁피두센터의 거침없는 새로운 외형에 한없이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그 건물만 보면 화가 난다는 프랑스 사람들도 많다. 이렇듯 전통문화와 역사를 지키고 새로운 것에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는 나라 프랑스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이어 유럽문화의 심장부가 될 랭스-루브르의 서막을 기대해 본다.
최정미 |1966년에 태어났으며 성신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리모주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조형예술국가학위(DNAP), 고등조형표현국가학위(DNSEP)를 취득하였다. 석사논문으로 「터너 이후 그림 안에서의 빛에 관한 해석」이 있다. 현대미술전 Ansan Art Memory 기획자이자 작가로 현재 아주대, 가톨릭대, 평택대에 출강하고 있다.

출처-기전문화예술 2005.11ㆍ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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