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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7) 까치 호랑이

편집부

‘과장성’과 ‘발랄함’… 해학보다는 闢邪的 목적

조선후기 무명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민화 가운데 까치호랑이그림은 가장 다양한 표현으로 많이 그려졌던 소재다. 즉 민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독창성이나 뛰어난 화법으로 인정받기보다는 그 표현과 소재에서 당시의 민중의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에 홍선표 교수가 까치호랑이 그림의 의미와 다양한 변모를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한국에서는 최근 발견된 1592년작(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까치호랑이그림이 늦어도 조선전기부터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炳蔚之風’이란 화제명과 出山虎의 도형, 그리고 제화시에 의거해 풀이해보면, 호랑이가 산속 안개에 숨어 7일 동안 먹지 않으면서 털갈이를 해 대인군자처럼 빛나는 위광을 지닌 문채를 이뤘으나 세인들에게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는데, 대낮에 여우와 이리가 호랑이를 가장해 횡행하므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위세를 보이며 힘차게 출림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배경목인 큰 소나무도 군자를 상징하며, 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까치는 호랑이의 출산에 놀라는 驚鳥이거나 혹은 이를 기뻐하는 喜鳥로 보인다. 이런 주제의식은 조선전기의 사대부상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결부된 것으로, 당시 사군자가 한 벌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하고 意趣的인 수묵화조화와 더불어 고사인물화(儒의 이상적 가치기준을 고대의 성현들에게서 찾으려는 정신)가 소경인물화(산수는 배경이고 인물중심으로 그린 것) 형식으로 성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까치호랑이그림은 전기의 교화적 기능과 달리 정초에 잡기와 악령을 물리치는 액막이용 문배그림으로 그려 붙이던 풍습이 성행함에 따라 벽사용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호암미술관소장의 ‘까치호랑이’를 보면, 호랑이 특유의 번쩍이는 안광과 猛氣를 강조하기 위해 눈과 입을 모두 크게 과장해 그림으로써, 생동감 있는 표현보다 상투화된 과장성이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줄무늬는 활달하게 굽이치는 물결처럼 강조돼 발랄함을 느낄 수 있다.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 두 마리는 호랑이에게 산신령의 어떤 명을 받아 전해주려 온 듯 보이며, 호랑이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호랑이는 이 그림에서처럼 坐虎형이 있고, 또 걸어나오는 出山虎도 있는데 둘 모두 송대에 수립된 것이다. 얼룩 줄무늬 역시 원체풍의 전통을 따라 가는 먹선으로 그려진 것이 있고 묵면으로 도안화해서 그린 符籍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그림은 묵면으로 줄무늬가 강하게 표현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치호랑이그림은 흔히 비사실적 과장성으로 인해 해학적 요소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虎逐三災라 하여 정초에 이 그림을 집집마다 붙였던 걸 감안한다면 벽사적 목적성이나 욕구과잉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시정과 향촌에 만연한 기복호사 풍조를 배경으로 급증한 수요에 따라 이들 액막이와 치장그림을 공급하는 ‘俗匠’ 또는 ‘환장이’의 출현과 더불어 민화양식이 대두하게 됐으며, 다양한 표현과 더불어 민화화된 까치호랑이그림이 가장 많이 그려졌다. 1766년 이덕무는 집집마다 그려 붙이는 이들 그림이 기능화 내지 도식화되는 현상을 개탄하기도 했다.
호랑이와 까치가 결합된 도상적 상징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까치는 길조로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고 호랑이는 맹수로서 잡귀를 막아준다는 길상벽사적 해석을 비롯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서낭신의 사자인 까치가 신탁을 호랑이에게 전하는 모습이라는 무속적 풀이와 슬기로운 까치와 골탕 먹는 호랑이 이야기를 나타냈다는 민담적 해설, 그리고 횡포한 양반관리를 상징하는 호랑이를 꾸짖고 조롱하는 착한 백성인 까치를 은유해 그렸다는 사회풍자적 해석 등이 있다. 민담과 사회풍자적 관점의 경우 흔히 호랑이는 바보같은 모습으로, 까치는 당당한 모습으로 설명된다.
도상의 성립에 대해서는 표범과 까치를 함께 그려 그 讀音에 의해 ‘報喜’라는 뜻을 나타내는 중국 길상화에서 유래돼 표범 대신 한국식의 호랑이로 변용됐다는 전래설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 고유의 자생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자생설의 맥락에서 까치호랑이그림을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말기에 이르러 松虎圖나 맹호도와 같은 사대부 수요의 권위적이고 격식을 갖춘 도상이 무명의 환장이들에 의해 파괴되고 변형된 진솔하고도 재밌는 표현방식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즉 원체풍의 송호도와 같은 정형을 해체하고 새롭게 태어난 민중적 형식의 역사적 소산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송호도에 까치가 없으면 정통회화로, 있으면 민화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런 관점 역시 까치호랑이의 도상을 정형에서 이탈해 19세기 전후 새롭게 수립된 화제로 인식한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호랑이와 새의 조합은 이미 6세기의 남북조시대에 대두됐고, 소나무가 새의 관찰대로서 호랑이그림의 배경목 구실을 하는 화면 구성은 10세기 초 오대에 성립됐으며, 까치호랑이그림은 북송대에 대두해 도상은 14세기의 원대에 확립된 것이란 사실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민화류 까치호랑이는 1969년 신세계화랑의 ‘호랑이 전’에 첫 공개된 후, ‘우리 고유’의 ‘민족상징화’로 각광받았으며, 1970년대 ‘한국주의’의 팽배속에서 민화붐을 선도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족주의 민화관의 핵심 화제로 인기를 누려온 까치호랑이그림은, 호랑이와 이를 향해 등 뒤의 소나무 가지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는 까치를 소재로 유형화한 것이다.
2005년 서울역사박물관 민화전에 전시된 구라시키민예관 소장품에는 장례 때 악귀를 쫓는 탈인 方相氏처럼 네 개의 눈을 가진 호랑이도 있었다. 이처럼 평면적으로 단순화되고 多시점으로 구성된 파격적인 변형은 서구의 모더니즘이 발견한 순수 원시주의 조형의식이라기보다 선사시대 이래의 呪力과 신명을 지닌 부적풍의 靈媒的 양식의 오랜 전승성의 반영이며, 붉은 색의 액센트는 악령을 퇴치하고 신령을 즐겁게 했던 고대 단청 전통의 계승으로 여겨진다.

까치호랑이그림 외에 조선 후기 민화류에서는 문자도가 널리 유행했다. 한자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조형예술로 한자의 의미와 조형성을 드러냈는데, 삼강오륜의 사상을 반영하거나 현세의 행복, 장수, 안락을 희망해 동식물을 곁들여 병풍그림으로 많이 그렸다. 하지만 장식성이 강한 문자도와 달리 까치호랑이 그림은 시기적 변화를 담고 있다는 데서 차별성이 있다.
가령, 부적풍 까치호랑이는 원체풍과 달리 이마를 넓게 그리고, 눈을 노랗게 칠해 고양이 모습으로 변모됐는데 이는 조선말기 전염병인 호열자를 옮기는 것을 쥐귀신으로 믿고 이를 몰아내기 위한 의도인 듯하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報喜’의 상징과 함께 시끄럽게 짖으면서 ‘虎患’을 경계하는 ‘靈鵲’으로서의 기능도 지니고 있기에 이런 벽사성을 보강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벽사성이 강조된 민화류 호랑이는 일본에서도 그 효험성을 인정했던 듯, 19세기에는 해마다 동래를 통해 매그림과 함께 구입해 감으로써 수출화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홍선표 (이화여대ㆍ미술사)
출처-교수신문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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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민화와의 비교
中, 정밀하고 세련…日, 토속과 익살

▲청대 양류천 연화 ‘부귀도’, 종이에 목판채색, 1003.3×50.6cm, 일본 多摩미술대미술관 ©
‘민화’라는 개념은 1차세계대전 후 서양중심의 세계사를 일본중심의 동양주의로 초극하기 위해 민예미를 부각시킨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명칭은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민간화로 부르고 있다.
중국의 민간화는 衛畵, 畵張 등으로 지칭되다 청말기에 명명된 年畵가 주류를 이룬다. 연화는 고대의 桃符板과 문배그림에 원류를 둔 것으로, 송대에 세시풍속과 결부된 제액과 송축용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명 후기부터 민간수요가 급증해 목판화로 대량 제작됐다. 청대에는 수많은 연화 제작 공방이 생겼는데, 화공과 조판공, 인쇄공, 표구공 등이 분업해 제작했다.
양류천 연화는 길상화 중심으로 북경의 전판판화와 궁궐화의 영향을 받아 선각이 정밀하고 세련된 특징을 지녔으며, 도화오의 연화는 길상화와 함께 성시경관과 교훈적인 제재도 많이 다뤘고, 연속그림인 連環畵와 서양 동판화의 투시법 등을 수용해 명징하면서 화려한 경향을 보였다. 양가부의 연화는 문신을 비롯한 신상 위주로 과장된 형태와 간략한 선묘에 색채 대비가 심한 양식을 특징으로 제작됐다.
이러한 청대의 목판 연화는 베트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쳐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 제작 판매되고 있으며, 소주 연화는 일본 에도시대의 錦繪와 見立繪 형성과 문자도 및 경직도와 唐子圖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大津繪 作 ‘大黑과 福祿壽의 씨름’ , 28.7×18.4cm, 종이에 채색, 에도시대, 일본 개인소장. ©
그러나 일본 민화의 주류는 에도시대의 서민용 祈福그림인 大津繪와 繪馬, 又又六繪이다. 특히 大津繪는 오츠지방에서 동해도의 여행객들을 위해 토산물로 팔던 민예적 그림으로, 柳宗悅이 이를 지칭하기 위해 ‘민화’란 용어를 만들었다. 먹으로 간략하게 그린 후 붉은 색과 녹색. 황색 등으로 채색한 粗畵이며, 민간신앙과 결부된 불교판화에서 시작해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그리는 토속적인 戱畵가 되었고 수요의 증가에 따라 판화로도 제작됐다.
한국의 경우는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부적류를 제외하고 판화로 다량 제작하는 전문 공방제도가 구축되지 못했고 주로 육필로 그려졌다. 도상과 표현 양식에서 원체풍의 저변화와 함께 청대 천진과 산동 지역 연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치졸하고 분방, 주략한 화풍은 명말 이래 경덕진 民窯에서 민간화공인 ‘瓷畵工’들에 의해 그려져 휘주 상인들을 통해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으로 수출된 청화백자 문양들과 더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홍선표 (이화여대ㆍ미술사)
출처-교수신문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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