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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이 도시 공동체를 디자인한다

박삼철


치명적인 도시
‘도시의 공기가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중세의 한자동맹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를 예찬하면서 도시 입구에다 이렇게 새겼다. 이후 이런 인식은 도시에 대한 확고한 이념이 되었다. ‘근대사회의 위대함은 도시의 위대한 성장에 있다’는 버제스E. W. Burgess의 말처럼, 도시화는 근대화, 산업화, 자유화의 가치로 겹겹이 무장하고자신을 키워왔다. 그래서 이제 세계 자체가 도시가 되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 65억 명 중절반 가량이 도시에 살고 있고, 2025년에는 60%를 넘어설 것으로 유엔은 예측했다.
우리 도시는 참 잘 살고 있다. 개미나 벌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군집 본능은 도시를 필요로 한다.모여 삶으로써 경제적 유연성과 경쟁적 학습 효과라는 실제적인 득을 얻고 소외와 고독이라는 실존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도시는 최초의 형태인 신시神市(eopolis)로 출발해 인간의 세속을 중시한 폴리스polis, 기술에 바탕을 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크기의 경제를 극대화한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 등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그런 도시화는 도시의 진선미를 내세워 자신의 성장을 이념화·도덕화·미학화해 왔다.

하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안녕하지 못하다. 이게 문제다. 도시는 자신의 성장에만 매달려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고 초월한다. 하부체제로서 삶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상부체제로 삶을 지시하고 호령한다. 이 점을 들어 건축가 피터 랭Peter Lang은 ‘치명적인 도시’, 멈포드L. Mumford는 ‘사자死者의 도시necropolis’라 했다. 돈과 권력이 연합한 성장-기계growth machine가 정체인 도시가 삶을 생산과 소비로만 내몰아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끝자락에서 도시의 문제를 성찰하는 노력들이 생태도시, 공생도시 등으로 논의되는 문화도시의 담론을 만들고 있다. 이는 인간을 위한 도시를 찾으려는 탈근대적 몸부림을 반영한다. 물론 문화도시라는 용어는 낯설지 않다. 웬만한 도시의 입구에는 ‘충효의 도시’, ‘교육의 도시’, ‘전통의 도시’ 등이 초대형 빌보드로 우격다짐 격으로 달려 있고, ‘문화의 도시’도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요즘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문화예술회관이나 미술관을 요란하게, 더 크게 짓는 경쟁이 펼쳐지는 것도 문화도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문화도시는 명운이 끝난 근대 산업도시의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채택한 도시 성장전략의 또 다른 포장일 뿐이다.
작업으로서의 도시
문화도시의 본질은 철학자 르페브르H. Lefebvre가 역설한 ‘작업으로서의 도시city as oeuvre’다. 경제 성장의 획일적 가치가 지배하는 도시가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삶을 성찰·비평·상상할 수 있는 도시여야 한다. 도시인들이 생산과 소비라는 재생산의 부품이 아니라 살 만한 삶터로서의 도시를 성찰하고 비평하면서 꿈꾸는 철학자이자 예술가가 되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 행정 관료와 설계가, 건축가와 같은 전문 직업인의 일로 만드는 의태擬態가 아니라 시민들이 철학, 예술의 동반 속에 시를 짓고 밥을 짓듯 삶을 짓는 도시를 만들 때 비로소 문화도시는 가능해진다. ‘도시에 상상력을!’이란 외침은 사치나 미몽 때문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이다.
공공미술은 그런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회+문화’의 새로운 도전이다. 굳이 미술, 건축, 디자인 가릴 필요도 없다. 예술계 전반에서 공공성을 화두로 새로운 도시사회를 꿈꾸는 사례가늘고 있는 것은 더불어 인간적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 때문이다. 모더니즘 예술은 도시와의 관계를 단절하면 할수록 순수의 진가를 드높였다. 그래서 전문가의 저작권은 잘 살렸지만, 시민들이 살 수 있는 생활권, 아름답게살 수 있는 문화권은 죽었다. 새로운 시대의 예술은 도시 일상과 예술, 삶과 아름다움, 시민과 예술가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함께 문화적으로 사는 삶을 디자인하려 한다. 과일의 과핵이 과육으로 보호받고 과육을 먹고 과육을 통해서 새 생명을 낳는 것처럼, 공공미술은 건강한 삶이 도시사회를 살리고 미술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임을 중시한다. 이러한 새로운 각성이 공공미술, 또는 예술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 동안 미술은 내면적 가치나 취향을 저 홀로 독백하면서 개인의 성취를 꾀했다. 공공미술은 공동의 관심사를 공동체와 더불어 갈등·토론·조정하면서 사회의 개선을 도모한다. 순수미술이 근대문화의 최대 성과인 개체의 자유를 만끽하는 소승小乘이라면, 공공미술은 더불어 사는 토대인 도시와 공간,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사랑을 갈구하는 대승大乘이다. 사랑의 대상은 천지인天地人이다. 하늘이 표상하는 영혼, 삶의 동반이자 도반인 사람, 대지에 대한 경건한 사랑을 되찾기를 꿈꾼다. 살 만한 도시는경천동지할 기술이나 천재와 같은 전문가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 천지인에 대한 사랑을 함께 되찾는 일로 가능해진다. 살만한 도시가 간절히 갈구하는 것은 도시를 느끼고 상상하면서 갈구하는 것, 곧 도시에 대한 서술representation이다.
근대 도시는 주어진 일방적인 ‘텍스트’지만, 탈근대의 문화도시는 시민들이 읽고 느끼고 상상하는 ‘콘텍스트’이다. 공공미술은 공동체와 함께 예술의 본원적 기능인 서술을 통해 도시를 재구성한다. 주체이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주어진 대로 살 수 없다. 하루 종일 자신의 분비물로 자신의 영역을 재구성하는 동물들처럼 사람 역시 자신의 가치와 느낌, 꿈에 따라 자신의 삶터와 그곳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을 재구성해야 제대로 살 수 있다. 서술은 세상을 경험하고 재구성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르페브르가 살 만한 도시를 위해 가장 강조한 요건이고, 미술학자 그래스캠프W. Grasskamp가 역설한 ‘서사로서의 도시’의 전제이다. 기술과 지배 욕망이 아니라 삶의 느낌과 꿈이 도시 요소요소마다 피어나야 살 수 있는 삶터가 된다.
몸의 도시, 영혼의 도시, 공동체의 도시
그런 서술은 관능적인 도시, 몸의 도시를 만든다. 근대 도시는 눈과 관념의 도시였다. 우리는 ‘손대지 마시오!’, ‘잔디를 밟지 마시오!’, ‘일렬 정렬!’ 등의 구호가 지시하는 개념 도시, 시각과 이미지의 도시에서 살아 왔다. 그래서 몸이 한껏 위축되었고, 그런 몸은 정신까지 쪼그라들게 만든다. 길거리에 놓인 조각이나 미술은 몸으로 만지고 느끼고 깨닫는 삶의 공간을 다시 회복한다. 맘껏 방랑하는 호모 비아톨homo viator이 가능하다면 도시인들은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따라할 수 있다. 요즘 많은 공공미술은 도시에서 앉아 쉬고 놀고 사유하고 게기는 탈주의 시공간을 시도한다.공공미술은 로고스의 도시를 영혼의 도시로 이끈다. 로고스는 곧 말이고 법이다. 개념 덩어리인 말과 법 위에 세상살이 모든 것을 소환해 재고 윽박지른다. 말해질 수 없는 것, 보일 수 없는 것, 인식되는 못하는 것은 폐기처분된다. 그래서 데이터화되는 생산만 남고 데이터화되지 못하는 사랑은 도시에서 쫓겨난다. 이성의 주체만 남고 타자 역시 모두 축출된다. 도시에는 자신을 위한 정신만 있고 신과 타인을 위한 영혼은 없다. 공공미술은 이런 도시에 저항하면서 영혼의 재생을 꿈꾼다.
문화도시는 물신物神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도시이다. 도시의 3요소인 채움(빌딩), 이음(길), 비움(공원, 광장)을 보라. 길은 물류의 채널이고 채워진 것은 평당 얼마 짜리의 부동산이며, 비운 것은 개발 예정지이거나 권력의 전시장이다. 그런 물신의 기호들로 꽉 차 있어 사람들이 숨 쉴 곳, 머물 곳이 없다. 공공미술은 그런 도시의 숨구멍이다. 질식할 듯한 성장-기계의 전원을 꺼놓고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다. 공공미술은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이다.
인간적인 도시는 도시의 근본 취지인 ‘모여 살다’의 공동체 사회를 만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의 계산이 아니라 남, 우리의 사랑으로 산다고 했다. 공동체는 같이 사는 사람들을 고객이나 경쟁자가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동반, 삶의 진리를 함께 구하는 도반으로초대한다. 공공미술의 새로운 경향인 뉴 장르 퍼브릭 아트new genre public art,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는 의제나 시공간에 따라 생멸변화하는 공동체를 디자인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 디자인은 소외됨이 없이 함께 누리는 참여, 이웃의 범주가 살 수 있는 휴먼 스케일, 몸으로 뒹구는 현장, 그리고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시민과 예술가가 함께 성숙하는 과정을 중시해 문화도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다.부
연하자면, 문화도시는 미술관, 공연장이 많고 조각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는 도시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름다움으로 사는 도시, 삶 자체가 지속적으로 문화적인 권리를 충족시키고 신장시켜 가는 도시가 진정한 문화도시이다. 그런 도시는 그 속의 사람들이 도시의 삶을 통해 천지인의 사랑을 깨닫고 즐기고 나누는, 보다 성숙되고 보다 인간적인 사람으로 거듭 나게 돕는 도시이다.
/ 박삼철
※ 박삼철 | 큐레이터 집단 <아트컨설팅>서울의 소장이면서 공공미술의 기획·연구·평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제3회 광주비엔날레 영상부문 ‘상처’, 거리미술전 ‘공즉시색’, ‘도시를 위한 아트 오브제’ 등을 기획했으며, 『왜 공공미술인가: 미술, 살 만한 세상을 꿈꾸다』(학고재)를 지었고, 『미술 공간 도시』(학고재)를 번역했다.
출처-기전문화예술 5ㆍ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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