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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1) 토기 기마인물형주자

편집부



안정된 구도 속에 破格과 細密 두루 갖춰
우리나라 토기의 기원은 기원전 5천년경 신석기시대 덧무늬·빗살무늬토기로부터 시작돼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의 질그릇으로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장식성이 강화돼 실용성보다는 예술성의 극치로 인정받는 것이 신라시대의 토기다. 그 중에서도 ‘기마인물형주자’는 최고로 꼽히고 있는데, 이한상 교수가 이 작품의 미적 가치와 사료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 편집자주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토기의 白眉로 금령총에서 출토된 騎馬人物形注子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토기는 조상들이 남긴 유물 가운데 가장 흔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그 형태 또한 단순한데, 기마인물형주자는 그릇으로서의 기능에만 머물지 않고 한 차원 높은 예술품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긴장과 이완의 공존
연구자의 관점에서 볼 때, 고대인의 복식이나 장신구를 연구하면서 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그것을 사용한 사람의 모습이나 착용방법 등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주자에 조각된 인물상은 그러한 아쉬움을 상당부분 해소시켜 준다. 마치 완벽한 모습의 미이라를 발견한 느낌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오뚝한 콧날에 뾰족한 턱 때문에 인상은 다소 날카로워 보이지만 살짝 감은 두 눈과 펑퍼짐한 말은 그러한 긴장감을 완화시켜준다. 조각기법에서도 과감히 모든 표현을 생략한 듯 하지만, 세부표현을 살펴보면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다. 이에 더해 이 토기에는 ‘靜中動’의 이미지가 있어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2점의 토기 모두 말을 탄 인물상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세부적인 표현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먼저 주인상은 좀더 크게 만들어졌다. 말위의 기수는 장식이 달린 관모를 머리에 쓰고 다리에는 갑옷 같은 의복을 착용했다. 말이 걸치고 있는 것들은 앞쪽에서부터 재갈멈치, 가슴걸이, 말방울, 안장, 안장깔개, 다래, 말띠 꾸미개, 말띠 드리개 등으로 말을 제어하거나 혹은 장식하기 위한 도구들로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반면 시종은 조금 작게 만들었다. 우선 주목해볼 것이 기수의 머리모양이다. 띠를 두른 위쪽으로 튀어나온 것이 있는데 이를 상투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또 다른 견해로는 화랑을 보필하는 낭도가 머리에 깃털을 꽂은 모습으로 여기기도 한다. 말은 주인상의 것처럼 발걸이나 말띠 드리개 등이 없어 장식성이 현격히 적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편안한 인상이다. 말의 다리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되게 동적인 느낌을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주목해볼 것이 전체구도다. 이 토기를 측면에서 보고 둥근 원을 그려보면, 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정확히 원 안으로 들어온다. 즉, 둥근 원의 상부 정점에 인물의 얼굴이, 앞쪽에는 주구가, 뒤쪽에는 꼬리가 일정한 거리 값을 유지하면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보다 안정감을 주기 위해 말을 살찌게 표현한 것 같다. 혹자는 말의 조각이 비례미를 잃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전체구도의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안정된 구도 속에서도 파격적인 표현이 있으니 주구와 꼬리가 그것이다. 곡선적인 말의 가슴에서 비스듬히 경사지게 솟구친 주구는 강렬해 보이는데, 주자의 기능을 이로서 알 수 있다. 말 엉덩이 위에 뾰족한 침이 장식된 盞臺가 얹혀져 있는데 잔대 아래쪽에는 몸쪽으로 구멍이 뚫려 있어 물을 넣는 입수구로 활용된 듯 짐작된다. 뿌리부분에 매달린 두 개의 방울은 직선적인 주구와 더불어 성난 남성의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꼬리 역시 직선적인데 주구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붙여 前進의 느낌을 주었다. 아울러 인물과 말의 가장자리를 마무리하면서 뒤에서 앞으로 조금씩 둥글게 다듬거나 꺾어주었는데 이 역시 정적인 분위기를 상쇄시켜주는 의도인 것 같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이 작품은 그 생명력이 한껏 배가되었다.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 부장
왜 신라인들은 이처럼 잘 만든 토기를 무덤 속에 넣어준 것일까. 이 토기가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 6세기 초로 봐도 무리가 없다. 당시는 신라의 성장이 본궤도에 올라 대외팽창을 준비하고 있었고, 적석목곽분이라는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던 매우 활기 넘치는 시대였다. 신라인들은 특히 현세의 삶이 내세로 바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 때문에 수많은 인력을 투입해 거대한 고분을 만들고 그 속에 다량의 물품을 부장했다. 심지어는 산사람까지 함께 껴묻었다. 이 토기 역시 신라인들의 이러한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부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異形土器나 土偶는 ‘숨김없는 자유’나 ‘가벼운 일상의 표현’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유독 금령총의 이 주자는 인물의 표현이 세밀하여 누군가를 모델로 제작한 느낌이 강하다. 그럴 경우 그 후보는 무덤의 주인공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금령총이란 무덤의 주인공문제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왕자로 추정되는 주인상
금령총은 경주 소재 단독분 가운데 가장 큰 봉황대의 남쪽에 인접한 딸린 무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 속에서는 금관, 금제허리띠 등 왕에 버금가는 장식품이 출토됐다. 이 무덤 출토 금관이나 허리띠, 환두대도는 다른 무덤 출토품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금관에 곡옥이 없는 점을 주목한다면 무덤의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사망한 신라의 왕자로 추정되고 있다. 바로 요절한 신라왕자, 그가 기마인물형주자의 주인공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신라의 장식성과 조각성이 뛰어난 기마인물형주자와 달리 토기를 처음 만든 신석기시대에는 단순한 모양의 그릇 표면에 빗살무늬를 새겨 넣었다. 이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는 신라시대 이형 토기와 견주어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의 토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무늬가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한 획 한 획 힘이 넘치며 그 획이 모여 기하학적 무늬로 완성된다. 빗살무늬토기는 오랜 이동생활을 접고 정착생활을 막 시작하면서 창안해낸 초기 예술품으로, 원시사회의 무한한 생명력을 강하게 발산한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 그리고 이후 약 7천년의 세월이 경과하면서 비로소 흙으로 빚어 만든 최고의 공예품이 출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마인물형주자와 같은 것으로 신라와 가야의 토기는 예술성에 있어 절정을 이루었다.
/ 이한상 (동앙대ㆍ고고학)
※ 필자는 서울대에서 '5~6세기 신라의 변경지배방식 : 장신구의 분석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황금의 나라 신라'등의 저서가 있다.
※ 출처-교수신문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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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토기와의 비교
中, 人面文으로 多産 상징…日, 묘사에 충실
최근 중국 고고학의 가장 큰 성과는 전설의 시대로 불리던 ‘삼황오제시대’를 증명해낸 것으로, 기원전 2천년기의 청동기문화가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다. 이후 하상주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까지 절정기의 금속문화·도자문화가 꽃피운다. 자연히 토기는 더 이상 예술혼 구현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실용그릇의 지위에 머물게 됐다. 때문에 가장 중국적인 토기문화는 청동기문화 출현 직전 단계인 신석기시대 후기인 앙소문화기의 채문토기에서 찾아진다.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이 토기는 무늬를 새기지 않고 그릇 표면에 그린 것이다. 붉은 안료를 바른 다음 흰색, 검은색, 갈색, 노란색 등의 안료를 써 각종 기하학적인 무늬나 물고기, 사람의 얼굴 등을 그려 넣었다. 그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토기는 서안 반파유적에서 출토된 人面魚紋彩陶盤이다. 토기 내부에 사람얼굴과 물고기를 그렸다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람얼굴은 머리와 턱을 검게 칠했고 선으로 표현한 눈과 코에서 어딘지 모를 기묘한 이미지가 풍겨난다. 물고기는 뭉툭한 머리에 눈이 둥글고, 꼬리 쪽으로 가면서 급격히 가늘어진다. 중국학계에서는 사람얼굴그림은 어머니의 몸에서 막 태어난 아이로, 물고기는 몸속에 수많은 알을 품고 있다 해 다산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즉, 당시 사회는 모계씨족사회였고 다산은 곧 그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가장 원하는 소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 토기문화의 영향을 다대히 받았다. 구주지역 등 한반도와 가까운 곳에선 우리의 빗살무늬토기와 흡사한 토기가 다량 출토되고, 그런 양상은 고분시대까지 이어진다. 당나라 문화가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기 전, 즉 고분시대가 일본적인 특색이 가장 현저한 시대로 보고 있는데, 당시 유행한 토기는 스에키(須惠器)로 불리는 단단한 토기다. 그런데 이 토기는 가야와 백제의 장인들의 손을 빌려 탄생한 것임이 밝혀져 이를 일본적인 것으로 보기 어렵다. 대신 고분주변에서 출토되는 ‘하니와(埴輪)’는 적갈색 연질의 토제품이며 인물의 표현이나 정면기법 등에서 일본적인 특색이 매우 현저하다.
가장 대표적인 하니와는 군마현 관음산고분 출토 인물상이다. 이 무덤은 백제 무령왕릉 출토 청동거울과 같은 틀에서 부어 만든 거울이 출토돼 유명하다. 여기서 출토된 하니와는 여러 점인데 무덤 주인공이 사망하자 그의 권위를 후계자가 계승하는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한다. 금령총 출토 기마인물형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 하니와는 일본고분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복식이나 얼굴모습이 세밀히 표현돼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인물은 八字모양 모자를 쓰고 두툼한 갑옷을 입었는데 하체의 표현이 조금 과장됐다. 얼굴표현은 중요한 의식 수행중이어서 그런지 긴장감이 흐르고 귀에는 큼지막한 귀걸이를 매달았다. 받침이 좁기 때문인지 어딘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 이한상 (동앙대ㆍ고고학)
※ 출처-교수신문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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