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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5)-(9)

편집부

* 국제신문에 2006년 7월6일부터 주간으로 기획시리즈 연재

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9> 그림에 울고 웃는 전시기획자
예술과 자신의 삶이 닮아가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전시준비에 바쁜 조동협(오른쪽) 씨. 수가화랑 큐레이터를 역임하였고 지금은 김해문화의전당 전시팀에서 기획일을 맡고 있다.
전시기획자(큐레이터). 분명 멋있을 것 같은 직업이지만 사회적 대우는 아직 요원하다. 외국 작가들은 종종 한국 전시기획자를 '슈퍼맨'이라고 부른다. 전시기획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는 모습이 안쓰럽게 비춰진 모양이다. 선진국의 경우 전시기획 과정이 세분화 되어있지만 아직도 한국의 전시기획자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라야 한다. 아무리 오래 동안 전시 기획을 해왔다 하더라도 개막전까진 잠시도 맘을 놓을 수 없는 것이 큐레이터다. 작가 섭외의 어려움을 넘으면 각종 전시관련 실무들이 줄을 선다. 홍보는 어떻게 하고, 운반은 어디에서 하며, 팸플릿 제작과 전시공간 디자인 등 일거리가 첩첩산중이다.
전시 기획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들을 응대하는 일. 특히 디스플레이를 할 때 작가와의 공간 조정에 실패하면 날아오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경험이 많은 작가일수록 관대하다.
언젠가 원로 작가의 작품을 디스플레이하다 그림을 심하게 손상시켜 버렸다. 새내기 큐레이터에게 이 일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하늘이 노랗게 보일 수 있다는 경험을 했다.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작가에게 정중히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의 작품 우측 상단이 15cm 정도가 심하게 찢어져 버렸습니다….' 전화를 끊고 하얗게 질린 채 앉아 있는데 득달같이 그 작가가 달려왔다. 날벼락을 각오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그 작가 왈 '사람도 다치잖아. 허허'.
작가에게 작품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그가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온 건 조금이라도 빨리 작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소중한 작품이라도 사람보다 더 할 순 없다. 그 이후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사람도 다치잖아'라는 그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그 비싼 그림보다 '사람'이 중요함을 그 한마디로 대신했다. 그 작가가 바로 초대 부산시립미술관 관장을 지낸 김종근 화백이다.
큐레이터 일을 하다보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많다. 도록이 도착하지 않거나 작품 운송에 문제가 발생할 때도 있고 심지어 초청한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아 작가의 눈길을 피하며 어색한 침묵으로 버텨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작가들은 대부분 기획자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작품을 잘 만들어 낸다. 한때 광안리에 사용하지 않은 채 수년 간 방치돼온 사라토가라는 건물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전기도 안전시설도 없는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다. 아무도 전시를 하려고 생각지 않은 곳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놀랍게도 2500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지금은 일상공간에서의 전시가 일반화 돼가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생소한 전시형식이었다. '14개의 방'이라 이름 붙여진 그 전시에서 작가의 상상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큐레이터란 직업을 미술계에서는 3D업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무거운 작품을 운반 할 수 있는 체력과 다양한 잡무를 감당해야하는 능력은 기본. 거기에 까다로운 작가들을 무마하는 탁월한 언변에, 밤샘을 소화해 내는 야행성 체질이 옵션으로 붙는다. 그러나 그림과 함께 사는 즐거움은 이 모든 어려움을 씻어준다. 수장고에 그림을 가득 쌓아놓고 있는 화랑 대표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자신이 선택한 작가의 작품을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게 큐레이터의 일이다. 큐레이터 생활이 행복한 건 짜릿한 전시 개막의 쾌감, 관객 동원에 성공할 때의 뿌듯함을 느끼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술과 자신의 삶이 닮아가는 것을 확인할 때 오는 성취감이 3D 직종인 큐레이터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

※ 출처-국제신문 2006.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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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8> 여성미술가로 살아가기
외로움과 사회적 불평등을 동시에 이겨내야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김난영의 '테이블'.

작가로서의 힘겨움, 여성의 사회적 편견이라는 이중고
1990년대, 세기말에 가장 많이 회자된 말 중의 하나가 페미니즘(Feminism)일 것이다. 여성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이념은 모더니즘에 대한 강력한 비판정신을 제공하면서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부산에서 여성주의가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은 1980년대 형상미술운동에 참여한 작가들에서부터이다. 한영수 김춘자 김난영 박경인 김미애 김은주 등 많은 작가들에 의해 여성주의적인 맥락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여성작가에 대한 사회적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사실 여성이 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성 작가들은 결혼을 하면 대개 육아와 가사노동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꾸준히 활동하는 작가 대부분은 독신이다. 작업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파트타임 일도 마다하지 않고, 작업실의 음산함도 홀로 견뎌야 한다.
김난영이라는 작가가 있다. 20대부터 줄곧 '성'을 주제로 작업을 해온 부산의 여성작가이다. 언젠가 술을 마시면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사람들의 편견이죠'라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도 안한 처녀가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를 해대니 이상한 여자로 바라보는 것도 무린 아니다.
또한 부모님을 전시장에 초대하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가 난무하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작품을 부모님께 보여주기에는 아무래도 면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현대미술에 있어 '성'이라는 주제를 이처럼 집요하게 천착해온 작가도 드물다. 성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거나 사물이나 이미지에 내재된 성적인 징후들을 표현한 일련의 작품들은 새로운 평가가 주어져야 한다.
조금 연배가 높은 김춘자 선생은 부산에서 전업작가로 오래 동안 활동해 왔다. 그 독특한 조형적인 언어는 여성만이 닿을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꿈이나 욕망과 같은 의미들로 해석될 수 있지만 작가의 작품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인 감성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적은 말수에 문학적인 감수성을 겸비한 작가는 항상 진지하다.
사람과 작품은 닮게 마련이다. 사색을 좋아하고 상상을 즐기는 작가의 성격은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80년대 현상미술 작가군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작가 중의 한사람이 박경인이다. 표현주의적인 격렬한 화면은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설화적인 내용에 뛰어난 표현력은 서울의 유명미술관에 초대되는 등 당시 화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는 '남편'을 먼저 생각한다. 남편 장원실도 화가. 장원실의 작품활동을 묵묵히 내조하면서 자신은 조금 움츠리고 있다. 최근 다시 작품활동을 재기하였는데 작가에게 더 큰 예술적 성취가 있길 기대해 본다.
독신의 외로움을 감내해야하는 김난영, 예술적 성취에 비해 평가가 미진한 김춘자, 가사노동과 육아로 인해 활동을 접어야 했던 박경인. 이들 모두는 여성작가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특히 지역작가들의 경우는 진출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어 그 상실감이 배가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젊은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여성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고 사회적 참여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르간의 진입장벽은 사라진지 오래되어 작품도 회화에서 설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30~40대가 되어 결혼이라는 강을 건너게 되면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남성의 수가 월등하다. 결혼한 후에도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어쩌면 여성작가는 작가로서의 외로움과 사회적인 불평등을 동시에 이겨내야만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쯤 이러한 불평등이 사라질지 아무도 모른다.
※ 출처-국제신문 2006.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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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7> 화랑의 도시,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진귀한 작품 감상한 후 맥주 한 잔 들이키는 즐거움이란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성 아래로 그림같은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얼마 전 스카치 위스키의 본산지이자 백파이프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다녀왔다. 이 나라 수도인 에딘버러는 인구 45만명의 작은 도시였지만 곳곳에는 예술의 향기가 넘쳐 흘렀다. 화랑이 즐비했고 고풍스런 극장과 고성은 관광객을 연신 끌어모으고 있었다. 특히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에딘버러 성과 건물 밀리터리 타투는 명화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과 그 분관인 DEAN 갤러리 그리고 시내의 많은 화랑에서는 주옥같은 전시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국제적인 연극축제인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때를 맞춰 내놓은 굵직한 전시들. 한 갤러리는 그림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고흐의 진품 32점을 보란듯이 내걸어 놓았다. 로버트 메이플도프와 레리벤슨의 사진전, 로트렉과 아르누보 포스터전, 데이비드 호크니전, 론 무익전 비롯해 윌리엄 터너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무료로 보여주는 전시까지 있었다. 전시 프로그램만 다룬 가이드북이 나올 정도로 다양한 전시가 이어지는 에딘버러였다.
프린지 페스티벌은 1947년 2차세계대전 이후 스코틀랜드 정부가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에딘버러 인터내셔널'이 열리면서 시작됐다. 프린지(fringe)는 '주변'이라는 뜻. 영세한 극단이 하나 둘 모여 공연을 펼친 것이 지금은 세계적 규모로 커졌다. 올 여름내내 연극 1800회를 포함해 마임 퍼포먼스 콘서트 오페라가 200여개의 공연장과 거리에서 열린다.
에딘버러는 런던에서 기차로 더없이 평화로운 영국의 농촌마을들을 가로질러 6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나타난다.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개막행사가 시작돼 도시는 일순 축제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난타'의 성공을 보장해 주었고 지금은 '점프(JUMP)'가 이름을 날리고 있다. '난타' '점프'의 성공으로 이곳에서 한국 연극의 진가가 널리 알려졌다.
프린지 페스티벌은 시내 극장 세 군데서 열리고 있었다. 1800개의 공연 중 일부만이 이들 극장에서 상연된다고 하는데 한국 점프도 이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미 표가 매진돼 공연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점프'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축제가 도시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8월 한 달 사이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그들이 쓰고 간 돈은 에딘버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신시가지인 프린스 거리에는 쇼핑몰과 레스토랑 그리고 선술집이 즐비했다. 역사의 향기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 거리들은 걸어서 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정비된 도로명과 조그만 골목들까지도 놓치지 않고 표기된 가이드 북. 요소요소에 비치된 교통정보들은 길을 물어야 할 불편을 해소해 줬다.
그 유명한 이층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녀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이었다. 거리는 공연을 보고난 후 선술집에 시원하게 맥주 한잔을 들이키는 인파로 북적였다. 모든 게 비싼 스코틀랜드이지만 맥주만큼은 한국보다 쌌다.
축제가 과연 무엇인가를 프린지 페스티벌은 잘 보여줬다. 교회나 공터 관공서로 사용되던 곳이 축제기간 동안 극장이 된다. 전용극장은 메인 행사장인 에딘버러 인터내셔널뿐이다. 1500석 이상의 극장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져 있지만 정작 운영 예산은 경상비 정도가 고작인 우리의 현실과 잘 대비된다. 그런 풍성한 문화 풍토 속에서 에딘버러 시민들은 즐기고 있었다. 도시가 이렇다 보니 삶 자체가 문화적일 수밖에 없고 자부심과 자긍심이 대단했다.
부담없는 가격으로 맥주를 마시며 아름다운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고, 우리 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으며, 그 많은 공연들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골라보는 재미를 제공해 주는 도시였다.
※ 출처-국제신문 2006.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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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6> 공공미술, 공공의 적인가
건물 앞에 불편하게 서있는 무뚝뚝한 작품들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뉴욕 맨해튼에 세워진 지 10년 만인 1989년에 철거된 리처드 세라의 작품 '기울어진 호'.

1970년대 미국은 공공미술과 관련된 일련의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1979년 뉴욕 맨해튼에 세워진 지 10년 만에 철거된 리처드 세라의 작품 '기울어진 호(弧·Arc)'가 그 논란을 촉발시켰다. 법정으로까지 확대된 이 논란은 공공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미니멀리즘의 대가인 세라의 이 작품은 사람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결국 철거됐다. 공공성이 작가의 예술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작품 철거라는 법적 결론이 도출되기 전까지 미술계와 법조계 등은 다양한 사회적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미술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장됐다.
공공미술을 일상 공간으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법안'이다. 이 법안은 영국에서 시작돼 프랑스에서 꽃을 피웠고 미국과 우리 나라 등 세계각지에서 수용됐다. 작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특정 공간에 머물렀던 시각예술을 공공의 영역으로 확대시키자는 법안의 취지는 많은 성공 사례들을 남기면서 정착돼 가고 있다. 삭막한 도시에 미학적 공간을 선사한 '%법안'. 하지만 우리에게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았다.
부산의 거리에도 그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법안 적용 대상인 건물을 유심히 살펴 보라. 건물마다 하나씩 형식적으로 서있는 '무뚝뚝한 작품'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거리의 특성이나 건물과의 연관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비좁은 공간을 비집고 답답하게 서있는 조각품들을 보면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우리 문화 수준을 극명하게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때가 빈번하다.
게다가 작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겠다는 법안의 취지와는 달리 특정작가가 공공미술품을 독고점하는 현상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법안'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이 큰 요인이다.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한때 이 법안은 건축주의 입장에서는 준공검사를 위한 '요식행위'였고 작가에게는 '밥벌이'를 위한 전쟁터였다. 개념도 없고 철학도 없는, 지금 우리의 도시환경과 다를 바 없는 삭막한 모습이다. 한국의 공공미술품은 기본적으로 개인 소유물이다. 그래서 건축주 건물 앞에만 세워져야 한다. 건축주는 자신의 재산이기 때문에 공공적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공공건축물은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관리되고 마침내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이에 반해 유럽의 공공미술품은 공공기금으로 운용된다. 우리도 법률적으론 가능하지만 실제 기금을 내는 건축주는 거의 없다.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면 건물 앞에 불편하게 서있는 조각들 대신 포켓공원을 만들수도 있고, 아름다운 가로 시설물을 설치도 가능하다. 그리고 블록이나 존 개념을 설정해 특정공간을 보다 적극적으로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공공미술은 개인 소유를 탈피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건축과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협업을 가속화 시키고, 조각가들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도시환경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인식은 확대되고 있다. 야외 조각에서부터 지역 공동체의 벽화작업, 대지미술, 장소 위주미술(site-specific art), 가로포장(paving)과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영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변화는 전시에도 반영됐다. 오는 9월 16일부터 펼쳐지는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는 이러한 공공미술의 개념 변화를 담았다. '아트 인 라이프(Art in Life)'라는 주제로 '퍼블릭 퍼니처(Public Furniture)'와 '리빙 퍼니처(Living Furniture)' 등 새로운 개념들을 선보일 이번 전시를 통해 공공미술에 대한 차원 높은 논의들이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 출처-국제신문 2006.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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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5> 작품도 사람 살기 적합한 환경을 좋아한다
작품이 좋아하는 온도는 18~22도 습도 50~60%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중인 한 작가의 작품이 습기와 곰팡이 등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돼 있다.

미술작품의 수명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일상 공간에서 유화의 수명은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정도인데 온·습도나 직사광선에 노출된 정도에 따라 수명은 달라진다. 세계의 명화들이 아직 보존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1500년 초에 제작됐지만 항온(20도), 항습(55%) 조건을 갖춘 방탄 유리상자 안에서 보관돼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최근 루브르 미술관은 모나리자의 보존과 전시를 위해 총 350만 달러(한화 약 40억원)를 투입해 특수조명과 보완시설을 갖춘 독립된 전시실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TV의 미술품 감정 프로그램을 보면 작품 보관상태에 따라 감정가가 들쭉날쭉한다. 작품 보관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알아 두면 비싼 가격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 가치가 떨어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작품 상태는 조명과 직사광선에 좌우된다. 아크릴화든 유화든 빛에는 장사가 없다. 먹으로 그린 작품 역시 종이가 손상되면 가치는 떨어진다. 요즘은 아파트 구조상 거실에 작품을 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땐 자외선 차단 필름을 창문이나 액자에 설치하는 것이 좋다. 자외선에 노출된 작품은 몇 개월 사이에 색채가 변하는데, 매일 미세하게 훼손이 일어나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그 정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직사광선은 작품에겐 가장 무서운 적이다.
작품은 온·습도 자체보다는 변화 폭에 따라 훼손 정도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 여름날 에어컨디셔너를 사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온도를 낮추면 그림에는 치명적이다. 캔버스나 종이는 온·습도에 따라 숨을 쉬는데, 단시간에 온·습도가 변하면 급격한 수축이나 팽창이 일어나고, 그 위에 칠해진 물감은 수축률이 달라 균열과 박리와 같은 훼손이 일어나게 된다.
작품 소장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집안에 걸고 남은 작품 몇 점 정도는 갖고 있게 마련이다. 이 때에도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장기간 작품을 보관할 경우에는 가급적 온·습도에 영향을 덜 받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여름이라고 지나치게 온도를 낮추거나 겨울에 난방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재료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작품이 좋아하는 온도는 18~22도, 습도는 50~60%, 사람에게도 가장 좋은 환경이다.
만일 작품에 훼손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신속히 대처해야한다. 절대 비전문가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곰팡이가 폈다고 함부로 닦아내거나 균열이 일어났다고 물감을 칠해서도 안된다.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로 캔버스 천에 주름이 졌다고 해서 물을 분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더 큰 훼손을 부르는 행위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환경변화는 작품에 가장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훼손된 그림은 작가보다도 복원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혹시 작가가 다시 복원해서 그릴 경우에는 반드시 수정한 부분에 대해 서술한 뒤 서명을 해야 추후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다. 작품 복원은 이제 독립된 하나의 영역이다.
1차적으로 작품을 보호하는 장치가 액자이다. 하지만 잘못된 액자나 표구는 그림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값싼 액자의 합판 성분이나 접착제 등은 종이나 캔버스의 산화를 촉진하는 경우도 많다. 유리를 끼울 때에도 항상 그림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작품과 유리가 직접 닿게 되면 통풍과 마찰로 인해 작품이 손상을 입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표구에 이용된 종이와 풀은 작품 보존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경험이 많은 표구점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림은 구입하는 것만큼 소장하는 데에도 많은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 출처-국제신문 2006.8.3
▲ 필자는 조현화랑, 갤러리 칸지 등의 큐레이터를 거쳐 2002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 현장감독을 맡았고 현재 부산대 박사과정(미학)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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