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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10)-(12)

편집부

* 국제신문에 2006년 7월6일부터 주간으로 기획시리즈 연재

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12> 미술과 성
금기와 불순함 넘어 자유롭고 건강한 성문화로 정착되어야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클라우스 포비쳐(Klaus Pobitzer)의 W-돼지(W-schwein)란 작품. 지금은 시민들의 항의로 옷을 입고 있다.

미술에 있어 성(性)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주제 중 하나다. 특히 현대미술에서 성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과거의 성적인 작품들이 생물학적인 성(Sex)에 기반을 두었다면 최근에는 문화적인 성(Gender)이 더 강조되는 추세다. 항상 성은 금기와 불순의 상징이었으며, 외설과 예술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성을 다루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부상하는 것이 도덕의 문제다. 사실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편하게 살기 위해 지키도록 만들어진 규범인데, 이것이 그렇게 순수한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는 지식과 권력의 공모와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불평등이 숨어 있다. 그래서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 문제가 불거진 것도 상류층의 전유물이 중산층으로 확산되었던 18세기이후 부터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누드수업을 하게 된다. 첫 수업시간에 얼굴이 붉어지고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은 경험들을 해봤을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항상 누드는 여자만 모델로 들어온다. 지금은 아니지만 벌거벗은 여자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성이 철저하게 '대상화'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어쩌면 이것은 남성적인 시각에 의해 미술사가 진행된 것을 상징하는 사건일 수도 있다.
미술시간의 누드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왔다. 여성 스스로도 남성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버릇이 생겼으며 수줍음, 수치심, 질투 등과 같은 감정이 더 커진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성문화도 바로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를 해소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남성에 비해 여성은 수동적이고 자신의 욕망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문화적인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발언을 가장 강력하게 했던 작가가 이불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이 작가는 벌거벗은 자신의 몸에 사슬을 묶고 침대에 수갑을 채운 퍼포먼스를 했다. 어쩌면 여성은 남성에 의한 '성적대상'이자 '주체가 사라진 존재'일 수도 있다. 여성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이 퍼포먼스로 이불은 많은 사람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것보다 앞서 1974년, 미국의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는 그녀의 작품 디너파티를 통해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바닥에 예술가, 문학가, 사상가, 여신 등 999명의 여성 이름과 37개의 식탁에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문양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애로틱하지는 않다. 단지 더 이상 자신의 신체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을 뿐이다.
90년대 미국에서 가장 주목을 끈 작가 중 한사람이 바로 신디셔먼(Cindy Sherman)이다. 신디셔먼은 자신이 등장하는 사진을 통해 남성들이 아름답다고 규정했던 여성의 신체를 불쾌감을 주는 몸으로 제시하며 여성의 진정한 자아 확립과 주체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들 작품 모두는 여성의 신체가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포르노그라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최근 바다미술제 파빌리온 외벽에 설치된 클라우스 포비쳐(Klaus Pobitzer)의 'W-돼지(W-schwein)'란 작품은 우리의 성문화에 대한 인식을 잘 드러내 준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누드로 만들어졌다가 지금은 비키니를 입고 있다. 노골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여성의 누드를 기대한 남성들에게 선글라스를 낀 돼지의 얼굴을 보게 만든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결국 시민들이 항의로 옷을 입고 말았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몸에서 자유로워질 때이다.
※ 출처-국제신문 2006.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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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11> 미술보는 눈을 뜨려면 명작을 자주 봐야
감상은 작품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면 되는 것…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미술작품을 보는 눈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릴적 부터 작품을 보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진은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유치원생들.

30, 40대에게 학생시절 미술시간이 어땠냐고 질문해 보곤 한다. 영락없이 '미술시간에 한 번도 잘 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라던가 '고3때는 자습이나 주요 과목 수업시간으로 대체돼 아예 빼먹었다'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려라.' 한마디만 외치곤 사라졌던 미술선생님은 수업 끝날 때 쯤이면 나타나 그림을 제대로 못그려 끙끙대는 아이들을 타박하기 일쑤였다. 작품을 완성한 학생들 역시 자기 그림을 보면 왠지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도대체 내가 뭘 그린거지'.
하지만 요즘 미술선생님은 무척 바쁘다.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관련 프로그램도 다양해져 이를 소화하기에 정신이 없다.
특히 앞서가는 사교육 때문에 어지간한 수업안은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수업할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지 않으면 '재미없는 선생'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일반인들은 왜 미술을 어렵다고 생각할까. 학생시절 실기 위주로 미술수업을 받은 영향이 크다고 본다. 미술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고 그림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우리 미술교육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교사들은 미술을 한정된 개념으로만, 순수하고 숭고한 그 무엇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미술관에 가는 이유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림 보는 즐거움을 느끼려면 더욱 많은 시간을 희생해야 했다.
보는 즐거움. 매우 간단한 것이지만 약간의 훈련과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은 계속 반복 훈련을 하게 되면 카메라 못지 않은 정교함을 가질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색과 형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컨대 크로키(Croquis)처럼 순식간에 그리는 드로잉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훈련은 감상자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다. 감상과 그리는데 필요한 눈은 닮은 점도 있지만 다른 측면도 많다.
흔히 작가가 작품 감상에 발군의 실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기준이 선명한 사람들이라 그 안에 들지 않는 그림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경우가 많다. 작품 감상은 말 그대로 작품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면 된다. 과거 미술은 너무 권위적이었고 그 역사도 한정된 계층들에 의해 이루어져 일반인들을 소외시켰다. 하지만 눈처럼 훈련 효과가 빠른 신체기관도 드물다. 자주 그림을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알게 되고 좋아하는 작가도 생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보는 훈련을 한다. 거리의 간판을 볼 때와 옷을 고를 때 그리고 자동차를 선택하거나 신문 전단지를 볼 때도 알게 모르게 미적 법칙이 관여한다. 심지어 대인 접촉을 할 때 호감이 가는 이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 또한 미의 법칙이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볼거리들을 자의식을 가지지 않고 보기 때문에 훈련이 되지 않는 것이다. 즉, 보기 좋은 간판과 그렇지 않은 간판, 예쁜 전단과 못난 전단, 맘에 드는 자동차와 그렇지 않은 자동차 등 스스로 평가를 내리며 보는 습관이 들면 자연스럽게 감성이 발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주관이 생긴다.
이처럼 작품 감상할 줄 아는 눈을 가지려면 '좋은 것'을 먼저 봐야 한다. 무엇보다 대가의 작품부터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피카소나 고흐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어김없이 아이를 보내고 자신도 관람해야 한다. 좋은 작품을 많이 감상하는 것, 그림 감상의 첫 걸음이다.
보는 훈련은 이미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으니 약간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남은 문제다. 그림은 문화의 산물이자 인문학의 결정체이다. 고흐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그림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시대의 모습과 미에 대한 입장이 녹아 있어 매력을 느낀다. 가령 원시시대에 고흐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 그림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가을은 미술의 계절이다. 현대미술이 난해하다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영상·설치 작품들도 유화·수채화와 크게 다를바 없다. 유념해야할 것은 그림 감상은 결코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옷을 고를 때 별스럽게 알아야 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 출처-국제신문 2006.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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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의 그림 밖의 그림 <10> 천태만상 작가들, 그 속내 들여다 보기
예술적 성취를 위한 몸부림으로 내상 입기도…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경기도 양평에서 작업 중인 부산출신 서양화가 안창홍(왼쪽) 씨가화실에서 필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전시 기획자에게 부여된 커다란 혜택 중 하나는 작가들의 속내를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야 깔끔한 화랑이나 전시공간에서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나지만 전시 기획자는 그들의 이면까지 볼 수 있다. 수 년 간 이런저런 전시를 기획하면서 원로와 중진작가 상당수를 만났다.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 중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술가들의 모습과 다른 이들이 많았다. 대개 자신의 작품과 많이 닮아 있지만 의외의 인물들도 많다. 그들 중에는 연락은 자주 못해도 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작가들도 꽤 된다.
작가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스타일. 작품 관리에서 우편물 발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꿰차고 있어야 마음이 편한 작가들이 그 주인공이다. 의외로 작가들 중에는 이런 스타일이 많다. 아마 우리 나라 작가 중에 작품 관리를 가장 잘하는 이는 박서보 씨가 아닐까 한다. 1960~70년대 구작(舊作)도 잘 보존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메모하는 습관이 국보급이라 그와 한번 한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야 한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에는 조각가 김청정 신라대 교수가 가장 꼼꼼하다고 본다. 자주 사용하는 재료인 스텐인리스 스틸에 먼지 하나라도 묻어 있으면 그만 두지 않고 깨끗하게 제거해야 직성이 풀린다. 작업 스타일이 삶의 양식으로 굳어진 것인지, 생활 태도가 작업에 반영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말이다.
대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작가로는 이강소 씨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그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넘친다. 특유의 소탈한 웃음이 생각날 때가 많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음주 실력도 수준급이다. 술 얘기하면 제주도에서 작업하는 강요배 씨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지금은 주량을 많이 줄였다고 하지만 두주불사의 명성은 여전하다. 최민화 씨도 말술의 대가다. 그림마당 '민'을 만들어 민중미술운동에 헌신했던 작가이자 화랑주인데 그의 음주량은 '장난이 아니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서울대 미대 교수들은 작업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인성은 비슷하다는 게 화단의 평가다. 매너가 좋고 진지하며 말수가 적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역사화 부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서용선 씨, 한국화에 활로를 불어넣은 김병종 이종상 씨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작가 작업실을 방문하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던 이는 김차섭 김명희 부부 작가였다. 강원도 양구의 오지 폐교에 작업실을 차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폐교를 작업장으로 활용한 작가들이다. 이 부부는 미국 뉴욕에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만 강원도 산골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 흡족해 하는 걸 보고 정말 존경스러웠다.
얼마 전 경기도 양평에서 작업하는 안창홍 씨를 찾았다. 첫 마디가 '머 하러 왔노'였다. 경상도 사내 특유의 무뚝뚝함이 배어있는 말투지만 속정이 느껴졌다. 그 동안 전시 예산이 충분치 않아 제대로 예우도 못하면서도 번번이 그를 호출했다. 그때마다 그는 필자가 동향 후배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 불평없이 작품을 내주었다. 오랜 만에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부산 생활을 털고 양평으로 간지 10년을 훌쩍 넘긴 그는 지금 중국화단으로 진출할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관련 서적을 읽고 작품 구상을 하느라 일각이 여삼추였다. 50세를 넘긴 나이지만 그는 아직 젊은이였다. 지금까지 쌓은 성과로도 얼마든지 안주가 가능한데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중국에 작업실과 살림집을 구했고 만반의 전투 태세를 가다듬는 중이었다.
미술 작가라는 직업은 근대의 산물이다. 과거에 작가들은 성직자나 귀족 등 안정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작가 혹은 예술가는 마냥 불안정한 존재이다. 자신 하나만 믿고 어둠을 헤쳐 나가야 하다보면 별나다는 얘기도 듣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에서 내상을 입는다. 그들이 설사 너무 말이 없고 신경질적이거나, 과음을 하고 편집증이 있다고 하자. 이것들은 그들이 예술적 성취를 위해 몸부림치면서 생긴 결과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통해 삶의 형태를 확인한다.

※ 출처-국제신문 2006.9.7
▲ 필자는 조현화랑, 갤러리 칸지 등의 큐레이터를 거쳐 2002 부산비엔날레 현대미술전 현장감독을 맡았고 현재 부산대 박사과정(미학)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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