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헤르메스의 빛으로](5) 영웅의 조건

편집부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목숨 버려 불멸의 명예 얻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1대1 대결(루벤스 작).
나무는 슬프다. 하늘에 닿으려는 열망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끝내 좌절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무는 땅에 붙박인 몸체를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는 아름답다.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는 운명에 짓눌려, 하늘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이 너무 높아도, 계절이 잎을 무너뜨리고 혹독한 입김으로 헐벗겨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봄으로 살아나 꿋꿋이 하늘에 대한 꿈을 키워나간다. 절망은 없다. 찬란한 신록이 폭죽처럼 터져 하늘에 대한 희망이 계속됨을 천명한다. 나이테로 관록을 늘려갈수록 조금씩 하늘에 다가가며 열매를 맺고 새로운 씨앗을 땅에 뿌리며 꿈을 이어간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나무가 꾸는 꿈이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하늘을 향한 상승 욕구가 높아 갈수록, 땅속으로 자신을 더 깊이 뿌리박아 가는 나무의 지혜다. 단단한 땅으로 뚝심있게 파고들어 자신을 깊이 묻어가는 한편, 창공을 향해 끊임없이 높이를 더해가는 나무의 생태. 땅으로 깊어 갈수록 하늘로 높아 갈 수 있음을 아는 지혜가 심오하다. 살아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는 한 하늘에 대한 희망은 망상일 뿐이라고, 뿌리가 깊어갈수록 하늘로 상승하려는 소망은 더욱 더 실현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한계를 알면서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절망하지 않기에, 나무는 진정 위대하다.
인간도 나무처럼 슬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 죽음 이후엔 허무뿐일지도 모르는 존재. 하지만 그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원을 지향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마치 나무가 땅의 꿈으로 끝나고 말 하늘에 대한 열망을 끝까지 간직하며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듯, 꼭 그렇게 죽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안고도 영원함을 ‘멋지게’ 열망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기원전 8세기경)에서 노래되는 영웅들의 열정은 독특하다. 불로초(不老草)를 구하여 이 땅에서 육체적인 수명을 무한히 연장해 보려했던 진시황의 집념과는 다른 열정. 그것은 이 땅의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피안의 영역에서 영원한 신의 품에 안기려는 기독교의 종교적인 노력과도 다르다. ‘나’를 지움으로 모든 고통과 찰나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해탈의 수행도 아니다. 이 세상의 삶을 값진 것으로 여기면서 죽음을 엄연한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불멸의 명예를 통해 영원하고자 하는 데서 그리스 영웅들의 모습은 고유한 빛을 발한다.
“어머니께서도 나에게 말씀하셨지. 은빛 발을 가지신 여신 테티스께서도/두 가지 운명 중에 하나가 나를 죽음의 종말로 데려간다고./만일 여기 남아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둘러싸고 싸우면/나에게 귀향이란 없어지지만, 명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만일 내 고향 땅 집으로 돌아간다면/나에게 고귀한 명성은 없어지지만, 나의 수명은 길어질 것이며/나에게 결코 죽음의 끝이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트로이아 전쟁(기원전 1200여년경)의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에겐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평범하게 살며 장수를 누리는 길과 장렬하게 단명하며 불멸의 전설이 되는 길. 누구나 죽는다. 죽으면 ‘나’는 없어진다. ‘내’가 죽어 없어진 후에도 계속 살아남는 길은 나의 자식과, 나의 자식의 자식들에게 나의 이름이 기억의 대상으로 영원히 남는 것. 나의 명성이 멀리 사방으로 퍼져 나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회자되는 것.
아킬레우스의 선택은 분명했다. “이제 나는 가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러/죽음의 운명을 나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언제든/제우스가 또 다른 불사의 신들이 끝내시길 원하시면/헤라클레스의 힘도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였음에도. 운명이, 그리고 헤레의 참기 힘든 분노가 그를 제압했습니다./그처럼 나도, 만일 나에게 똑같은 운명이 정해졌다면/죽어 눕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귀한 명성을 얻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라. 아킬레우스는 3200여년 전 죽었으나, 그는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기억되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있지 않는가? 그는 죽었으나 불멸한 영웅의 길을 택하였기에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스 영웅에게 최고의 가치는 불후의 명예. 그런데 불멸의 명예를 위해선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한다. 불멸하기 위해선 ‘끝내주게’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죽기를 두려워하며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이 땅 위에서 조금 더 길게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순 없다. ‘멋지게’ 죽지 않는다면, 잊혀진다. 잊혀진다면, 끝장이다. ‘장렬하게 죽을 때 불멸한다’는 비극적인 이율배반-이것이 영웅들의 덕목이다. 트로이아의 전사 사르페돈은 출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친구, 만약 우리 둘이 이 전쟁을 피하여/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있을 수 있다면/나 자신이 맨 앞에 서서 싸우진 않을 것이다. /남자를 명예롭게 하는 싸움터로 너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버티고 서 있으며/그것들을 인간들은 피할 수도 없고 모면할 수도 없으니/나가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명성을 주던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줄 것인즉!” 죽음이 항상 도사리는 싸움터는 영웅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시시하게 죽어선 안된다. 대충 버티고 살아남거나 비겁의 오명과 모욕으로 남아선 안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거나 더러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 그것은 영원한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일리아스’에서 인간을 수식하는 전형적인 표현은 “죽을 수밖에 없는(thnethos)”이다. 반면 신에 대해선 “죽지 않는(athanatos)”이라는 표현을 쓴다. ‘죽음’이란 인간과 신을 가르는 결정적인 한계선이다. 그 선 아래에서 인간의 규정은 끝나고, 그 선 위에서 신의 규정은 시작된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을 안고, 불멸의 명성으로 영원을 지향하던 영웅에게 그리스인들은 “신을 닮은(theoeides)”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한다. 죽음이라는 인간조건의 한계를 안고, 한판뿐인 인생을 걸어 불멸의 명예를 열망하던 영웅은 불멸하는 신을 닮은 존재. 그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 위에서 죽음으로 죽지 않는 신비로운 외줄 타기를 하며 보는 이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노장 프리아모스가 두 눈으로 맨 먼저 그를 보았다./별처럼 반짝이며 들판 위를 질주하는 그를./그 별은 늦여름에 떠오르니, 그 찬란한 광채는/밤의 심연 속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돋보이나니/그 별을 오리온의 맹견이란 별명으로 부른다./가장 찬란하지만 이것은 불행의 징조니/가련한 인간들에게 수많은 열병을 가져다준다./꼭 그처럼 달리는 그의 가슴 위에서 청동이 빛을 뿜고 있었다.” 헥토르를 향하여 돌진하는 아킬레우스는 천상의 별을 닮은 지상의 별이다. 땅 위에 불멸하는 눈부신 이름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