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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빛으로](9) 죽음의 순간에서

편집부

김헌|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육체와 영혼… 무엇이 ‘나’일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 소크라테스는 한 손으로 거침없이 독배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힘차게 하늘을 가리킨다. 그는 육체를 입는 영혼이 죽음을 통해 육체에서 벗어나면 가벼이 진리의 세계로 올라갈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 ‘기름진 화요일’과 ‘절제의 40일’
지난 2월27일 화요일은 서양인들에게 ‘기름진 화요일(Mardi Gras, Fat Tuesday)’이었다. 식구들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기름진 고기와 술을 실컷 즐기는 만찬이 벌어진다. 그에 앞서 각 동네, 도시의 중심지에 사람들이 모여 춤과 음악으로 축제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서양인들에게 이 날은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하는 날(dies ad carnes levandas)’이다. 앞으로 40일간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마지막으로 실컷 고기를 먹어두는 날을 정하고 축제를 벌인다. 이른바 ‘카니발(carnival)’, ‘고기여, 안녕(carne vale)’에서 온 말임에 틀림없다.
왜 서양인들은 40일간 고기를 먹지 않으려 하는가? 그로부터 40일째 되는 날,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며, 죽음은 삶이 절단나는 고통을 전제한다. 예수의 부활을 희망으로 맞이하려면, 예수의 고통과 죽음의 의미에 철저히 동참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서양인들은 초기 기독교회의 전통에 따라 ‘40일간의 금욕적 생활’을 ‘사순절(四旬節)’로 형식화하였다(4세기). 굳이 40일인 이유는 예수가 광야에서 홀로 약 40일간을 단식하며 육체적 욕구와 사탄을 이겨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단식과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기념하며, 그의 삶과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결심하기 위해, 이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은 일정한 단식을 하든가, 최소한 ‘기름진 고기’를 삼갔다. 육체적인 욕구를 절제하고, 영혼과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이겠다. 힘겨운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이 되면, 사람들은 다시 축제의 이름으로 모여 즐겁게 식사한다.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사건을 믿음으로써, 사람들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그동안 절제했던 고기가 주 요리로 제공되며, 아껴두었던 고급술이 곁들여진다.
현대의 거의 모든 서양인들은 ‘기름진 화요일’에 고기와 술을 실컷 즐기고,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즐긴다. 그러나 축제는 축제일 뿐,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부활절이 되면 다시 축제 분위기에 들떠 아주 ‘잘’ 먹는다. ‘사순절’은 없고 ‘기름진 화요일’과 ‘즐거운 부활절’만이 있는 그들에게, 예수가 40일간 육체적인 욕구를 이겨내며, 영혼을 투명하고 단단하게 만들어갔던 자기 투쟁의 치열함(‘마태복음’ 4.1~2)은 믿지 못할 전설이 돼버렸다.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빵 만들기를 거부하고, 한갓된 육체적인 안정을 위해 사탄과 타협하지 않으며, 세속적인 권력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던 예수(4.3~11)는 비현실적인 신화가 돼버렸다. 육체와 이 세속의 논리가 정신의 가치를 이긴 것일까?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피와 눈물이 흐르는 기도를 올린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을 피하고 싶다고(26.39). 죽음을 앞두고, 그것도 부당한 이유로 더러운 손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스러운 예수의 모습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피하지 않겠노라 한다(26.42). 인간 조건을 깊게 안고, 인간적인 한계를 이겨낸 것이다. 그는 영혼의 가치를 향하여 ‘제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죽음 앞에 당당한 철학자의 초상

1475년 라틴어 필사본에 그려진 예수의 죽음.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는 죽음을 앞두고 밝은 희망을 피력한 사람이 있었다. 독배를 들며, 죽음을 진심으로 기꺼워하던 사람. 시간과 공간에 따라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하며, 보는 사람의 기분과 시각에 따라 상이하게 감각되고, 다양하게 해석되는 세상 만물의 진정한 정체, 변하지 않는 본질(ousia)이 과연 무엇인지를 추구하며 평생을 바친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다(예수 이전 469-399년).
‘진리와 앎(sophia)을 사랑하는(philein)’ ‘철학자(philosophos)’였던 그의 진정성은 질시와 경계, 오해의 대상이 되고, 급기야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는 더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니 말이다. 사형 집행을 눈앞에 둔 시간에 그는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그 이유를 밝힌다. “언제 영혼이 진리에 닿을 수 있겠는가?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으면서 뭔가를 탐구하려고 할 때, 분명 영혼은 육체에 속게 되지.” 그렇다면, 영혼이 육체의 간섭에서 벗어나 순수한 추론을 할 때, 존재는 진정한 자기 정체를 영혼에 드러낸다. 영혼이 추론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도달하려면, 육체를 통한 모든 감각과 고통, 즐거움으로부터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은 육체를 최대한 무시하며, 육체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만 있으려고 하지 않겠는가?(‘파이돈’ 65c~d).”
육체의 감각과 욕망, 쾌락과 고통에서 벗어나 오롯이 영혼만이 깨끗하게 존재할 때, 비로소 진리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이란 육체의 영향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정화(katharsis)’작업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로부터 떨어진다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 아닌가! 그렇다면 철학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죽음은 철학의 목적지인가? 영혼이 육체로부터 최대한 떨어져 있기를 바라는 철학자는 죽음을 기다리는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철학이란 ‘제대로’ 죽기 위한 노력이다. 영혼에서 육체의 흔적을 지우며, 영혼을 순수하고 투명하게 하는 일이다. 그럴 때, 영혼은 육체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가벼이 참된 존재의 ‘이데아(Idea) 세계’로 갈 수 있다. 반면, 철학을 통해 영혼을 순수하게 만들지 않으면, 죽음에 의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도, 육체의 흔적이 고스란히 영혼에 묻어 있기에, 그 무게로 인해 영혼은 올라갈 수가 없다. 일생을 철학에 바쳐 영혼의 순수함을 자신하는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진리의 세계로 가는 ‘상쾌한 상승의 절차’였던 것이다.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의 용기는 이런 철학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 예수, 소크라테스 그리고 호메로스
육체적 감각과 욕망으로부터 영혼을 정결하게 지켜냈던 예수나, 육체의 미망으로부터 영혼을 투명하게 정화시키려 했던 소크라테스에겐 공통의 인간관이 깔려 있다. 인간이란 육체와 그에 깃들어 있는 영혼으로 구성돼있다는 생각. 죽음을 통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다는 생각.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는다는 생각.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간관에서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물론 예수의 육체적인 탄생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인간관에서 육체는 ‘나’에게서 제외되진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나’, ‘나’의 본질적인 고갱이는 영혼임에 분명하다. 인간이 죽어도 영혼은 흩어지지 않는 반면, 육체는 해체된다고 믿던 소크라테스에겐 말할 것도 없이 영혼이 진정한 ‘나’다. 영혼에게 육체란 갈아입을 수 있는 옷 같은 것, 또는 영혼을 이 세계 안에 옭아매는 감옥에 불과하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예수 이전 8세기경)는 전혀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시인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영웅들의 수많은 굳센 프쉬케들을 하데스에게 내던져/보냈으며, 그들 자신은 모든 개들과 새들의 먹이로/만들고 있었다”(1.3~5)라고 노래한다. 개와 새의 먹이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육체다. 육체가 ‘그들 자신’이라 한다. 그렇다면 ‘프쉬케’는 ‘그들 자신’과는 별개인 그 무엇이다. 여기서 ‘프쉬케’란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나’라 여기던 ‘영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다. 호메로스는 ‘프쉬케’를 ‘나’로 보지 않고, ‘나’의 모습을 흔적으로 간직한 ‘허상(eidolon)’이라 여겼으며(23.72), 오히려 육체를 ‘나’로 보았다. 그의 인간관과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인간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와 대립이 발견된다. 죽으면 ‘이빨의 울타리’를 빠져나가며(9.408~409) 연기처럼 사라지는(23.100~101) 프쉬케, 이는 마치 고무보트에서 빠져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프쉬케는 입김을 내뱉는 소리를 흉내 낸 의성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프쉬케는 육체에서 바람처럼 빠져 나가는 목숨을 뜻한다.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 만들어주긴 하지만, ‘나’는 아니다. 살아있을 때만이 진정 ‘나’인 곳, 죽으면 빠져나가는 프쉬케가 아니라 오히려 쓰러져 남는 육체가 ‘나 자신’인 곳, 그곳이 바로 호메로스의 세계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정신사적 과정을 거쳤기에 프쉬케는 ‘영혼’으로 여겨지며, 진정한 ‘나’를 이루는 자아의 정체성의 결정적 요인으로 여겨지게 된 것인가?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풍요가 더 존중되는 요즘,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경향신문 200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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