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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34) 연가칠년명 금동여래입상

편집부



역동적인 광배의 불꽃··· 활달한 고구려의 氣像 넘쳐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우리나라에서 제작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둥근 연화대 위에 부처의 몸과 커다란 광배가 한꺼번에 하나로 빚어진 古式의 조각품이다. 발목까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옷자락, 살짝숙인 고개, 타오르는 듯한 광배의 불꽃무늬 등 불상 전체에서 보여지는 강한 역동성은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 고대 조각사의 기준작이자 한국적인 정서와 美感이 발휘된 최초 불상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아름다움을 살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고구려는 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한 직후인 375년에 벌써 肖門寺(혹은 省門寺)와 伊弗蘭寺를 지었고, 18년 뒤에는 평양에 九寺를 짓는다. 또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성왕의 무덤도 함께 옮기고 무덤 옆에는 웅장한 규모의 定陵寺라는 대사원을 건립한다. 그러나 이들 사찰에 어떤 양식과 도상의 불상이 안치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현재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불상은 대부분이 5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것은 삼국의 고대국가 형성기에 전래한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 내리기까지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뜻한다. 1세기 남짓한 한국 고대 조각사의 공백기를 깨고 우리나라 조각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연가칠년명 금동여래입상이다.
1963년 여름, 경남 의령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금동불은 높이 16.2cm의 소형이지만 현재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작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나아가 한국 고대 조각사의 기준작이자 한국적인 정서와 美感이 발휘된 최초의 불상으로 손꼽힌다.
이 불상은 광배와 연화대좌, 佛身이 한 몸으로 주조된 것으로 상 전체에 도금이 두껍게 입혀져서 생생한 금빛으로 휘황찬란하다. 부처는 舟形의 대형 광배를 배경으로 연꽃 대좌를 딛고 당당하게 직립하였으며, 머리는 초기 불상에서는 드물게 라발이 뚜렷하고 중앙에 팽이 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북위시대 금동불이나 운강과 용문 석굴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길쭉하고, 귀는 타원형 판을 붙여 놓았을 뿐 귀의 세부표현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어깨도 좁아서 몸매가 수척하다. 긴 얼굴은 이목구비의 윤곽만을 표현하였지만 지긋이 내려 감은 눈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에서 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가늘고 긴 신체 역시 두터운 가사에 덮여 몸매가 드러나지 않으며, 手印은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시무외 · 여원인의 통인을 맺었다. 가사는 중국의 포복식 복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살짝 반전하여 왼쪽 팔에 걸쳐 흘러내렸고, V자 모양의 두툼한 가슴의 옷깃 사이로 대각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내의 자락이 드러나 있다. 복부 중앙에 표현된 계단식의 옷주름은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 흘러내린 동적인 모습이며, 가사의 끝단과 그 아래로 드러난 치마의 끝단은 마치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몸 좌우로 날카롭게 뻗쳐 있다. 발목까지 드러낸 발은 부피감이 있지만 지나치게 커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여준다. 대좌는 연실과 여덟 잎의 단판으로 구성되었는데, 연판 사이사이에 판심이 예리한 간엽을 배치하였다.
광배는 윗부분이 깨진 것을 접합한 것으로 표면 가득히 새겨진 역동적인 화염문은 주물이 끝난 뒤에 끌로 새겨 넣은 것이다. 광배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4행 47자의 해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句)麗國樂良
東寺主敬?子僧演師徒?人共
造賢劫千佛流布?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이 발원문은 판독과 해석에서 다소의 이설이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혹은 평양)에 있는 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師徒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유포한 제29번째인 因現義佛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하다.
첫머리의 ‘연가’는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사용했던 연호 가운데 하나로 생각되지만 기록에는 없다. 己未年은 각각 479년, 539년, 599년에 해당하지만 북위 조각양식과 비교했을 때 539년으로 굳어져 있다. 479년은 중국에서도 포복식 불상이 등장하기 전이므로 너무 이르며, 599년이면 국내에서도 중국의 북제 · 주 및 수대 조각양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금동불은 조각 기법과 주물이 다소 거친 편이며 광배의 불꽃무늬도 일정한 패턴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양식적 특징만을 고려한다면 신라 금동불로 분류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己未年인 539년에 낙랑(혹은 평양)의 동사라는 절(혹은 평양 동쪽의 절)에서 천불상의 하나로 만들어 신라 지역에 전파했던 고구려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의 불상 양식이 멀리 신라의 오지까지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자, 불상의 제작지 추정에서 출토지보다는 양식적 고찰이 중요함을 일깨우는 귀중한 예인 셈이다.
미술 양식은 첫 영향을 준 선진의 영향을 받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곧 민족성과 풍토성에 의하여 변화되어 독특한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삼국시대의 불상도 기본적으로는 종교적인 규범을 충실히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신선한 자극, 곧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중국 불상의 양식과 형식, 그리고 제작 기법을 받아들여 이를 우리의 정서와 미의식에 맞게끔 변화 발전시켰다. 특정한 미술 양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어서 항상 이를 취사선택하였던 것이다.
이 불상에 보이는 길쭉한 얼굴과 신체, 포복식 복장, 몸 좌우로 갈퀴처럼 예리하게 뻗친 옷자락 표현방식, 通印의 수인 등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금동제단상(524), 일본의 후지이유린칸(藤井有?館) 소장 청동삼존불(522)과 같은 이른바 북위 ‘정광기(520~524)’ 양식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온몸을 감싼 두터운 가사의 옷주름은 선이 아니라 마치 대칼로 잘라낸 듯 담대한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측면관에서 세 가닥으로 날카롭게 뻗친 옷자락에는 담대함과 함께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반면 중국 북위시대의 금동불은 지나치리만큼 세부표현이 치밀하고 장식성이 강하여서 치마와 가사의 끝자락은 마치 작은 고리를 촘촘히 엇대놓은 듯한 잔물결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도나 동남아시아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중국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사와 치마의 끝자락의 잔물결 옷주름은 단지 2∼3가닥으로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중국의 불상에서는 볼 수 없다. 이러한 담대성과 두터운 양감은 고구려 미술 양식의 특징을 웅변하는 듯하다.
더욱이 광배는 이글거리는 불꽃무늬를 얕은 선각으로 새겼기 때문에 대비가 되어 불상의 양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또 끝이 살짝 치켜진 연꽃 대좌의 연꽃잎은 건드리면 톡 하고 터질 듯 양감이 강하고 탄력성이 넘친다. 이는 곧 날카로움과 동세가 어우러져 발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힘, 즉 몸속에서 발산하는 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정신의 형상이다. 마치 고구려 미술의 상승하는 기세를 느끼는 것 같다.
연가명 금동불의 조형적 특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의 조각 양식을 수용할 때 생략할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단순화시키고, 또 강조할 부분은 강조하면서 우리의 정서와 미감에 어울리는 조형미를 창출해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외래 양식을 모방할 때 일어나는 경직된 선이나 양감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자신감 넘치는 활달한 선과 기세가 넘칠 뿐이다.
연가명 금동불과 함께 한국 고대조각사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국보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두 금동불은 조형적인 측면에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다. 6세기와 7세기라는 제작연대의 차이점 뿐만 아니라, 전자는 정면관 중심의, 다소 공예적 성격이 강한 반면, 후자는 반가좌라는 특이한 자세를 입체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진정한 인체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가명 금동불이 한국 조각사의 선구에 선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제작연대가 확실한 현존 최고의 불상이자 고구려에서 천불상의 하나로 조성하여 신라 지역에 전파한 불상이며, 한국적인 조형감각이 발휘된 최초의 불상이라는 사실이다.
* 곽동석/ 국립청주박물관장 · 미술사
필자는 국립공주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금동불>, <한국미의 재발견 - 불교조각> 등의 저서와 ‘금동제일광삼존불의 계보’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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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 日 금동불과의 비교
日, 경직되고 침울한 표정 역력
중국 북위 양식 금동불과의 양식비교를 통하여 드러났듯이, 연가명 금동불은 중국 북위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우리 나름으로 소화하여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으로 재해석한, 자신감 넘치는 한국적 조형미의 선구작이다. 이 금동불을 통하여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강력한 대국이었고, 중국과 바로 인접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나아가 저 멀리 신라의 오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 알 수 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아직 불상의 전개과정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연가명 금동불과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예를 찾기 어렵다. 단지 아스카(飛鳥)시대 일본 고대조각을 대표하는 도리파(止利派) 여래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法隆寺獻納寶物 149호 금동여래입상(7세기)과의 간접적인 비교를 통하여 양국 간의 조형미의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마르고 긴 얼굴과 신체, 정면의 옷자락이 반전하여 왼쪽 팔에 걸쳐 흘러내린 포복식 복장, 통인의 수인 등, 법륭사헌납보물 149호 금동여래입상도 기본적으로 북위양식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신체 좌우로 날카롭게 뻗친 옷자락 표현이 사라지고 하단의 끝자락에 뻗침의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은 7세기의 시대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27.4cm에 이르는 크기에도 불구하고 표정과 신체조형에서 드러나는 평면성과 도식성은 이상적인 부처의 모습에 대한 관념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머리는 라발이 뚜렷하고 정상의 육계도 매우 단정하며, 얼굴 외형은 좌우 측면이 거의 평행하여 장방형에 가깝다. 따라서 두 뺨은 측면관에서도 굴곡이 없어 평면적이며, 살짝 뜬 행인형의 눈은 눈초리가 날카롭다. 콧잔등은 가늘고 직선적이지만 콧방울이 넓으며, 그 주위가 심하게 패여 있고, 또 윗입술은 인중을 경계로 좌우로 날카롭게 휘어져 카이저수염을 연상케 한다.
마치 콧방울에 잔뜩 힘을 주었을 때의 근육구조를 묘사한 듯한 표현형식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칼로 빚은 듯 경직되고 침울한 표정이 역력하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가녀린 표정의 연가명 금동불, 나아가 억제된 미소를 머금었지만 비현실적인 모습의 북위 불상과도 전혀 다른 표정이다.
두 팔은 겨드랑이가 몸에 붙어 위축됐으며 수인은 지나치리만큼 커서 어색하다. 신체 역시 얼굴의 좌우 측면처럼 거의 평행하여 전체적으로 장방형의 조형틀 속에 포함되어 평면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하단의 치마 자락 가운데 겨우 드러난 짧은 발은 볼륨이 없고 간격도 좁아 ‘그저 신체에 달린 발’같은 느낌이 든다. 복부 중앙에서 곧게 내려오는 계단식의 옷주름도 판에 박은 듯 도식적이다.
반면 연가명 금동불은 통인을 맺은 양손이 신체에서 분리되어 공간을 점유하는 입체적인 모습이며, 발목까지 드러낸 두 발도 부피감이 있어 그 아래의 연꽃 대좌를 당당하게 딛고 서 있다. 더욱이 복부에 계단식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양감이 있을 뿐 아니라 중심에서 벗어나 오른쪽 허리 쪽으로 휘어 미묘한 동세가 느껴진다.
/ 광동석 국립청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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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34) 안압지 출토 금동여래삼존판불상
육체미 · 생명력 '압도적'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 ㅣ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 ★★★★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우리 정서에 맞는 미감으로 역동적인 힘과 날카로움의 매력이 동시에 느껴지는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을 한국 최고의 금동조각으로 추천했다. 이어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이 그 다음 순위를 차지해 명실공히 명품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지난해 말 보물 1475호로 선정돼 미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사료적 가치로서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입증된 이 불상은 안압지 출토 금동판불상을 구성하는 10점 중 하나이다.
이 금동판 삼존불좌상은 세부적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조각의 세밀함과 좌우협시보살의 매혹적인 자태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탄력 넘치는 육체미와 그 생명력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판불은 얇은 금속판을 틀에 대고 두드려서 만든 압출불(押出佛)인데 반해, 안압지 금동판 불상은 밀랍(蜜蠟)을 이용하여 주조(鑄造)한 점이 특징이다. 고도로 발달된 주조 기법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모델링을 보여주는 예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이런 우수한 조각기법으로 입체적으로 조각되었기 때문에 상은 사실적인 모습이 두드러진다. 본존의 얼굴은 통통하게 이목구비는 예리하게 표현했다. 얇게 몸에 밀착된 옷자락이 볼륨있는 몸매를 드러내고 잔물결식 옷주름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두 협시보살은 본존 쪽으로 몸을 틀고 가슴에 비해 급격히 가늘어진 허리로 매혹적인 삼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三屈이라는 명칭은 몸이 세 번 꺾여진 듯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당나라때 유행하던 인체 표현에 근접한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당초문의 광배도 작품의 미적 가치를 높이는데 한 몫 하고 있다.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은 7세기 후반 나말여초의 국제적 조각양식을 반영하는 예로서 한·중·일 불교조각의 양식비교 및 전파과정과 영향관계를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 불국사 금동비로자나 및 아미타불좌상,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청동불입상, 감은사 사리기 사천왕상, 황복사지석탑출토 금동아미타불상 등이 한국최고의 금동조각으로 거론됐다.
/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 출처-교수신문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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