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40)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편집부



戰亂뒤 亡者들의 극락왕생 기원하는 ‘追善’
이번 호는 ‘한국의 미-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의 마지막 순서다. 목조각은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임에도 한국의 기후 조건 탓인지 고려시대 이전의 오래된 목불상은 잘 남아있지 않다.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 의해 1274년에 만들어진 아미타불로 밝혀졌다. 최성은 교수는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편집자주
고려후기 불교조각의 대표적인 기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불상은 앉은 높이가 118cm나 되는 비교적 커다란 상으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고려전기의 불상들과는 기본적으로 그 모습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改金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않아 우리들이 흔히 사찰에서 배관하게 되는 불상들처럼 평범하게 보인다.

불상의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와 육계는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투구를 쓴 것 같이 보인다. 활처럼 휘어 끝부분이 아래로 처진 눈썹과 가늘고 길게 半開한 눈, 콧마루가 우뚝하면서도 매부리코처럼 콧날이 약간 휘어진 코, 크지 않은 입과 섬세한 입술선, 양 뺨과 턱 주위에 살이 많은 둥근 얼굴은 다소 세속화된 佛顔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 표현에서도 머리 부분(頭部)에 비해서 넓지 않은 양어깨가 둥글게 처지고, 몸이 앞으로 굽어있어 건장하고 힘 있는 佛身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목조아미타불상은 몸속에서 발원문과 개금기 등의 腹藏物이 발견되어 고려후기 13세기 후반의 불교조각과 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像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발원문은 至元 11년(1274) 東深接 大師 中幹이 쓴 것으로 “南贍部洲 高麗國 東深接 大師 中幹願”이라는 대목에서 발원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동심접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0 아산군 산천조에 “현에서 동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된 동심산과 연관성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충렬왕 5년(1279)에 왕이 長子인 滋를 牙州(牙山) 東深寺에 보내 태자(後의 충선왕)를 피하게 하였던 記事가 보인다. 당시 江陽公 王滋는 貞信府主 王氏의 소생으로 충렬왕의 세 왕자 가운데 長子였으나 齊國公主의 소생이 아니므로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충렬왕은 큰 아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산 동심사로 피신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당시 수도 開京의 王室과 충청지역 사찰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산 동심산에 동심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간스님의 발원문에서 보이는 ‘동심접’이라는 표현은 至治 3년(1323)에 제작된 <觀經變相圖>의 畵記에 보이는 ‘楊洲接’과 ‘中道接’의 ‘접(接)’이 그 지역의 향도조직 혹은 신앙모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동심산 혹은 그 산에 있는 동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앙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래 불교결사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상기하면 중간스님은 아산지역 불교신앙조직을 이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며 그 모임에서 아미타불상을 조성 혹은 보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산일대에는 고려시대 12漕倉 가운데 河陽倉이 설치되어 충청도 여러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漕運으로 수도의 京倉으로 옮겼다. 고려후기에 아산의 포구에는 稅穀을 실은 哨馬船들이 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창 소재지역은 몽고침입 때 주요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아산의 하양창은 江都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간스님의 발원문에 “…古寺毁□…”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牙山 연안에서 여몽간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던 고종 43년(1256)과 44년(1257) 무렵에 사찰이 훼손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아미타불상의 복장에는 至治 2년(1322)의 최춘(崔椿)의 복장조성문과 취봉사(鷲峰寺) 和光선사의 발원문 등이 조사되었다. 중간대사 발원문이 쓰여진 시기보다 약 50년이 경과해 이 불상이 개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기록과 지도를 살펴보면 동심산과 축봉사는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아미타불상은 동심산에서 축봉사로 옮겨졌고, 개금할 때 복장조성문과 중수 발원문이 불상 복장 속에 넣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종 18년(1231)부터 원종 14년(1273)년에 이르는 거의 40여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철저히 파괴적이었던 몽고군은 海島와 奧地에 이르기까지 고려 전역을 휩쓸었고 황룡사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사찰이 이 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려후기 목불과 건칠불들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란 중에 훼손된 사찰을 보수하면서 조성된 상들일 가능성이 크다.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공을 막고 있는 봉함목에는 충렬왕 6년인 至元 17년(1280)에 보수되었다는 묵서명이 조사되었다.

나주 尋香寺건칠아미타불좌상과 화성 鳳林寺목조아미타불좌상, 서울 守國寺 목조아미타불좌상(철원 심원사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옴) 등은 佛顔이나 옷주름의 세부표현에서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나무로 만든 목불상들이다. 조각기법이나 착의형식 등에서 13세기 후반 조각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같은 유형의 불상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불상들은 거의 모두 아미타불로서 아미타신앙이 당시 화엄, 정토, 법상에 이르기까지 超종파적으로 성행하였다. 더불어 몽고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亡者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追善을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다고 이해된다.
* 최성은 / 덕성여대·미술사

필자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중국 오대 오월의 불교조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석불·마애불>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나말여초 아미타불상의 도상적 고찰’과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대송관계’ 외 다수가 있다.
▒▒▒▒▒▒▒▒▒▒▒▒▒▒▒▒▒▒▒▒▒▒▒▒▒▒▒▒▒▒▒▒▒▒▒▒▒▒▒▒▒▒▒▒▒▒▒▒▒
中·日 목조불상과의 비교
中, 宋代 목조불상 많아 …日, 平安時代 유행
호남성 장사 마왕퇴 1호묘에서 출토한 彩繪木俑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서는 戰國·西漢代 이래 나무로 만든 부장용 인형(木俑)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일반 목조각의 전통은 불교가 전래되고 난 뒤에는 불교조각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전란이 많았던 탓에 조성시기가 이른 중국 목조불상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중국의 목조불상 가운데 唐代에 제작된 것으로는 소형 목조불감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 한 예로서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 소장의 목조불감(국보 42호)은 唐代 9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에 비해서 宋代 목조불상은 다수 전해오고 있다. 특히 북중국 산서성 일대에서 조성된 아름다운 목조관음보살상들은 중국 목조불상의 우수함을 잘 보여준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대 목조불상은 전하는 것이 없지만 일본 古代 불교조각과 삼국시대 조각과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할 때, 法隆寺에 전해오는 夢殿관음보살입상이나 百濟관음보살입상에 못지않은 뛰어난 목조상들이 삼국에서도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신라 반가사유상들과의 연관성이 제기되어 오고 있는 京都 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을 통해서 삼국시대 목조불상의 수준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 목조각 가운데 이른 例로 고려초에 제작된 海印寺 希朗스님의 초상조각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진 우수한 목조각 전통을 말해준다.
한편, 일본은 飛鳥, 白鳳期의 목조불상들이 여러 구 전해오고 있다. 녹나무(楠木)를 재료로 山口大口費라는 조각가가 만든 法隆寺 금당 사천왕상을 비롯해서 中宮寺목조반가사유상 등을 꼽을 수 있다.
天平시대에도 목조상이 제작되지만 건칠불상이나 소조불상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다가 平安時代에 들어와서 목조불상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는 포교를 위해서 험난한 旅程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던 鑑眞스님이 데리고 갔던 唐 조각가들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때까지는 ‘一木造(한몸통)’ 기법의 하나의 목재로 이루어진 목조상들이 제작되다가 平安후기부터는 여러 개의 목재를 붙여서 만들어 재료를 절약할 수 있고 경제적인 이른바 ‘接木造’(일본에서는 奇木造라고 부름) 기법이 성행하여 수많은 像들이 전해오고 있다.
鎌倉시대를 대표하는 佛師, 運慶와 快慶는 일본조각의 古典期라고 할 수 있는 天平시대 조각을 공부하고 여기에 宋代조각의 사실성을 가미하여 일본불교조각사에 길이 남는 뛰어난 목조불상들을 남겼다. / 최성은

▒▒▒▒▒▒▒▒▒▒▒▒▒▒▒▒▒▒▒▒▒▒▒▒▒▒▒▒▒▒▒▒▒▒▒▒▒▒▒▒▒▒▒▒▒▒▒▒▒
한국의 미 (40) 전문가 조사_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앳된 미소·정교한 장신구 등 ‘우아한 기품’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한국 최고의 목조각으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함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에 각각 5표를 던졌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만큼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준 이 불상들은 각각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머리 양쪽에 동자머리를 튼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복스러운 얼굴에 천진스런 앳된 미소가 앙증맞다. 균형 잡힌 안정된 자세에 부드럽게 굴곡진 허리,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묶은 天衣, 신체의 윤곽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부드러운 옷주름 선 등은 가히 일품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거의 맞댈 듯이 곡선을 그리며 매우 섬세하게 표현했다. 마치 그림을 보는 듯 정교하게 묘사한 장신구는 우아한 기품이 배어있다.
이 문수동자상이 만들어진 연원 또한 흥미롭다. 조선시대 세조는 즉위하고 피부병에 결려 치료를 위해 오대산을 오르게 됐다. 상원사로 향하던 중 계곡의 물이 너무 깨끗해 잠시 목욕을 했다. 가까운 숲풀 속에서 동자승이 이 광경을 응시하자 왕은 동자승에게 등을 씻어달라고 했다. 왕은 “피부병에 걸린 나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을 하면 안돼”라고 동자승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동자는“대왕님께서 어디 가서도 문수보살을 봤다고 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답하곤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는 자신의 병이 부처님의 덕으로 깨끗이 치유 받은 것을 알고 동자승이야말로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게 됐다. 세조는 조각가에게 자신이 봤던 문수동자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조각하게 했다. 그 像이 바로 상원사 문수동자상인 것이다.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는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데다 왕실 후원으로 조성된 불상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美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연구사적으로도 가치가 매우 크다.
/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추천해주신 분들: 강희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곽동석 국립중앙박물관, 배진달 용인대, 이주형 서울대, 임남수 영남대, 임영애 경주대, 정은우 동아대, 최성은 덕성여대 이상 총 8명 가나다순.
※ 출처-교수신문 2007.04.30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