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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서 부활한 조선 미학의 魂-일본 민예관 복원

편집부


- 중앙선데이 제11호, 2007.5.27
-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보라색야나기 소에쓰, 우리에겐 야나기 무네요시로 더 널리 알려진 류종열(柳宗悅ㆍ1889~1961)은 우리 예술론의 역사 중심에 섰던 일본인이다. 조선 예술을 ‘비애의 미’라 해 파장을 일으켰고, 한국 민예품 사랑으로 유명해졌다. 일본 도쿄에 그가 세운 일본 민예관 곁 야나기의 생가가 최근 복원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됐다. 그 내부 공간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다. 민예관 전시장 전경. 사진 도쿄=구본창.
도쿄대 고마바 도다이마에 지하철역에서 내려 주택가를 5분쯤 걸어가면 정갈하고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이 나온다.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이란 자그마한 문패가 달려있다. 원래 있던 전시장 건너편 서관이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던 집이다. 옛 건물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느껴질 만큼 실내는 주인장의 정취를 닮았다. 매월 둘째ㆍ셋째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일반에 공개하는 것도 고인의 넋을 배려한 마음처럼 느껴진다. 건물 내부는 그만큼 정갈하고 고즈넉하다.
민예에 눈뜨게 한 조선 도자기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 즉 ‘쓰임의 미’에 눈뜬 것은 1914년 9월이었다. 그 깨달음을 준 물건이 조선시대 도자기다. ‘청화 모깎기 초화문 표주박형 병’과 만나고 나서 야나기는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말할 만큼 감격했다. 그때까지 미의 최고 수준을 서양에서 구하려 했던 야나기는 바로 그 진미(眞美)가 우리 동양에도 이미 내려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선의 장인이 만든 일상 물건 속에 미와 생활이 하나가 된 참다운 아름다움이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미무라 교코(三村京子) 일본민예관 국제부 수석연구원은 “이 사건이 결과적으로 야나기의 인생 방향을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야나기는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敎伯)와 다쿠미(淺川巧) 형제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미(美)를 공부하고 민예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920년 말에는 아사카와 다쿠미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구상했고, 마침내 24년 4월 경성(현재 서울) 경복궁 안에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 “조선의 미는 조선에 있어야 한다”는 야나기의 신념이 결실을 거둔 사건이었다.
“나는 항상 한 나라의 인정(人情)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 나라 예술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진열관이 아니라, 조선의 미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의 마음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만나 친숙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다.” 야나기가 밝힌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취지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936년 10월 도쿄 고마바에 일본민예관이 선다. 그는 ‘민중적 공예’의 약자인 ‘민예’ 개념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도 감상가도 미학자도 골동품상도 조금도 소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은 기물, 어디에도 낙관을 찾아볼 수 없는 무명품, 그러나 생기 넘치고 아름다우며 자유롭고 건강한 잡기다.” 또 야나기는 “각국의 민예품에는 상호 공통된 성질이 농후해 국민 간의 차이를 초월해 누구나 편안하게 마음 놓고 말을 나눌 수 있으니, 민예는 만국공통어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유별난 한국 미술 사랑
야나기의 한국 미술 사랑은 유별났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미 마리(中見眞理) 세이센 여자대학 문화사학과 교수는 “지금도 한국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 하면 ‘비애의 미’라는 고정관념이 따라다니지만 야나기가 이야기한 ‘비애의 미’는 야나기 조선관의 일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야나기는 1920년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들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조선은 위대한 미를 낳은 나라이고 위대한 미를 가진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 측면에서 조선을 본다면 세계 예술의 최고 경지에 두는 것이 충분하다고 단언해 마지 않습니다. 경주의 석굴암을 보더라도 그것이 세계의 미술계에서 최고라고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조선 도자기에서 ‘의지의 미’ ‘위엄의 미’ ‘남성의 미’를 찾아냈다. 이 여러 특징을 ‘복합의 미’라 불렀다. 나카미 마리 교수는 “야나기의 핵심 사상은 ‘복합의 미’이고, 그가 조선 미술에서 본 것은 ‘비애의 미’라기보다는 차라리 ‘복합의 미’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종의 평화와 생명 사상이라 할 ‘복합의 미’로 조선과 일본을 묶어 보려 했다는 것이다.
“다인들이 몹시도 사랑한 고려 찻잔은 차의식(茶意識) 같은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다. 사실은 이 미의식에서 해방된 자유로움이 고려 찻잔의 아름다움을 낳은 것이다. 이 진리는 요컨대 무슨 일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애심(無碍心)의 소산이라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불이미(不二美)라 불러도 좋다. 조선시대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의식에 의한 파란 많은 갈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무사(無事)의 아름다움이요, 당연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평상미라 불러도 좋다.”
야나기가 이렇게 무한한 애정을 보낸 조선 미학의 혼이 이제 그가 살던 집 안에서 새롭게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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