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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문화권력, 어떻게 만들어지나

편집부

-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

우리 사회에 ‘문화권력’이 새삼 화두로 떠오르게 된 것은 참여정부 초기의 코드인사 논란 때문이지 싶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을 포함해 주요 산하 단체장에 진보적 문화예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자 노무현 코드 인사로 규정됐다. 심지어 문화예술계의 코드인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의 ‘홍위병’, 혹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즈다노프주의자들’로 험악하게 분류되기도 했다.

권력은 물리적인 힘뿐 아니라 상징적인 힘에서 나오며, 상징적 힘이 가장 강력하게 행사되는 지점이 바로 문화권력이다. 문화예술계 코드인사 논란은 정치적 공세 효과가 사라지면서 잠잠해졌지만, 한국사회의 문화권력의 발생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성찰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내가 보기에 문화권력은 두 가지 발생원리를 갖고 있다. 먼저 문화권력은 이념적,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권력을 획득한 개인 혹은 그룹들이 행사하는 제도적 힘을 의미한다. 문화권력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급대로 ‘전복’과 ‘배제’의 규칙이 작용하는 장의 논리를 갖는다. 문화권력의 장은 서로 같은 입장을 가진 자들이 만든 구조적 공간으로서 장을 유지하기 위한 배제의 논리와 그것을 깨기 위한 전복의 논리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일 뿐, 애초부터 정치적, 윤리적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자신들이 장을 지키려는 문화권력의 속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코드인사 논란은 문화권력의 발생원리로 볼 때 지극한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독재정권 시절 정부의 시녀 역할에 충실했던 보수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권력을 독식했던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참여정부에 요직을 맡고 있는 진보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순수한 봉사와 헌신의 정신만 있을 뿐 문화권력을 행사한 바가 없다는 발언 역시 허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적, 절차적 권한과 권력을 개인의 취향으로 남용하는 사적인 권한은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불미스러운 행적처럼 성찰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할 제도적 권한을 사적인 권한으로 수렴하는 경우들은 문화권력의 전형적인 개인화, 관료화의 폐해이다. 진보적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러한 사적인 물의는 이른바 ‘예술사교계’의 상징권력에 대한 집착과 권력 행사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주관적’ 결정 때문이다.
문화권력의 개인적 남용과는 다르게 제도적 권한이 권력의 중심 장으로 흡수되는 경우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이창동 장관이나 김명곤 장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원활한 협상을 위해 스크린쿼터 축소를 지시한 청와대의 입장에 소신 있는 발언을 하지 못하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한 경우는 문화권력이 정치권력에 어떻게 종속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제도적’ 문화권력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코드인사의 형성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이 행사되는 방식에 있다.
문화권력의 또 다른 발생 원리는 사회적 분류 체계에서 나온다. 이 분류 체계는 복잡한 원리를 갖는다. 이것은 정치적, 이념적 성향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력, 지연, 성차, 심지어는 문화적 취향에 의해 구별된다. 권력으로서의 분류체계는 사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고 복잡한 모순관계를 갖고 있다. 분류체계로서 문화권력은 국가권력의 장에 속하지는 않지만 문화예술 현장에서, 아카데믹한 장에서, 출판과 지식시장에서, 지적 학력 분파들의 장에서 행사될 수 있는 힘이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1987년 민주화운동 이래 한국의 문화권력의 분류체계는 크게 보아 세 가지 특이점을 갖는다. 첫째, 1987년 민주화 체제가 문화운동의 이념적 지향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면 1990년대 초반 소비자본주의의 도래는 예술의 상업화라는 극단적인 반작용을 몰고 왔다. 급변하는 사회현실에서 문화권력은 진보적 이념이 상실되면서 예술시장의 상업적 논리, 문화적 취향의 구별짓기, 권력행사의 헤게모니 싸움을 둘러싸고 과거와는 다른 문제들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표적인 사례가 ‘문단 권력’의 지각변동이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만 해도 문단, 혹은 문학 권력은 순수 대 참여, 진보 대 보수라는 간단한 대립구도 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문단의 권력은 학벌, 담론, 장르, 저널리즘의 분파들 속에서 복잡하게 분화된다. 가령 ‘창비’와 ‘문지’라는 전통적인 문단권력은 ‘문학동네’가 등장하면서 이른바 주류·비주류로 구분하는 상업적 경계로 분할되고, 문학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인 이념을 표방한 ‘창비’ 역시 시장경쟁의 논리에 가세해 문단권력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으며 ‘작가-잡지’ 동맹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신예 평론가 이명원씨가 제기한 김윤식 비평의 표절 논란은 비평의 윤리와 인용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이 아닌 출신학교의 카르텔주의의 논쟁으로 이행하기도 했다. 이밖에 안티-조선일보 운동의 국면에서는 특정 신문사를 반대하는 문인들과 지지하는 문인들로 구별되면서 저널리즘이 문단에 미치는 막강한 권력을 절감하기도 했다.
두 번째, 문화 지식인들의 권력지형의 이동 역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문화권력은 문인, 혹은 본격 예술가들에 의해 행사되었다. 한국에서 문인의 힘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에 비해 윤리적,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징적 권위를 누렸다. 또한 굳이 문인이 아니더라도 본격 예술가들은 미디어를 통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해 줄 ‘감성의 메시아’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시국사건 때마다 문인들과 본격 예술가들은 항상 시대의 전위에 있었고, 시인의 언어는 민중을 구원할 상징적 권위를 부여받곤 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성장과 라이프스타일의 다변화로 문학이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면서 문인권력, 혹은 엘리트 문예지식인의 권력은 문화지식인의 권력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소 해프닝에 그쳤지만 국민의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인은 본격예술 엘리트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개그맨 심형래와 같은 사람이었다. 학력, 지식의 축적과는 상관없이 문화권력의 헤게모니는 서태지와 같은 시대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대중문화인들에게 넘어갔다. 또한 어느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자의 지적대로 문화비평가, 문화연구자들의 출현은 문학비평가와 같은 지배적인 권력의 장에 있던 주체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문화권력을 취득하기도 했다.
과거 직업 영화평론가들의 비평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영화제작자들은 이제 포털 사이트에서 평점을 매기는 네티즌들의 활동에 더 긴장하고 있다. 네그리가 말한 이른바 대중지성은 위로부터의 문화권력을 아래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또 한 가지 문화권력의 분류체계는 바로 1987년 이후 민주화를 주도했던 한국사회의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의 협력 체계이다. 4.19세대에서 386세대에 이르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정치권력은 문화권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재인용하면서 탈권력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문화권력은 진보적 정치권력의 탈권력화의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가령 제도권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진보적 정치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문화적 감성에 충실한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권력은 순수와 상업, 진보와 보수와는 상관없이 정치권력의 구성요소가 된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정치적 표백이 가해진 문화권력은 문화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한다. 가령 386세대로 표상되는 정치권력이 문화적 성찰 없이 한류를 국운의 징조로 간주하여 과장된 예찬을 늘어놓는 것은 한국의 문화권력이 문화민족주의로 포장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문화권력은 이로써 정치권력의 감성적 전위이자 국가선진화의 기수가 된다.
우리 시대 문화권력은 그 자체로 자본이고 정보이다. 문화예술의 상징권력은 화폐자본보다 더 무서운 상징자본을 가지며, 정보의 헤게모니를 강력하게 행사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정명훈과 조수미만이 할 수 있는 상징적 권위와 힘, 문화대통령 서태지, ‘동방신기’만이 해결할 수 있는 미디어 협상력, 그리고 그 자체로 정보로 존재하는 수많은 대중스타들과 통신콘텐츠들. 우리 시대에 정말로 무서운 문화권력의 존재들은 바로 이들이다. 상품으로서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 문화권력은 바로 상징적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상징적 문화권력은 상징적 폭력을 행사한다.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정보에 접근하도록 포박하는 상징적 폭력말이다. 우리가 해체해야 할 문화권력은 정치적 코드 인사가 아닌 독점적인 자본과 정보로서 존재하는 괴물 같은 ‘상징적 리바이어던’이 아닐까?
- 경향신문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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