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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③] 복제에서 생성으로

진중권


'생성 이미지' 디지털시대 대중의 취향 예고
세상에 없는 피사체 촬영한 듯… 사진같기도 그림같기도
후기산업사회 앤디 워홀의 '복제 이미지'에 이별 고해
강형구 작품 인물들의 쏘아보는 시선서 '아우라' 느껴져
인쇄한 듯한 이미지들의 지루한 반복. 그런데도 워홀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왜? 그 속에 후기산업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오늘날 세계는 온통 복제들로 가득 차 있다. 공장에서는 하나의 프로토타입으로 무수히 많은 스테레오타입을 찍어내고, 스튜디오에서는 하나의 네거티브로 무수히 많은 포지티브 사진을 찍어낸다.
워홀의 전시회는 관객들로 북적댄다. 대중은 왜 워홀의 그림에 열광할까? 간단하다. 마트에 진열된 상품, 잡지에 실린 사진을 통해 늘 보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친숙한 것에 취향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가 아마도 워홀의 영결식이 되지 않을까? 디지털시대에 대중의 취향을 결정하는 것은 더 이상 ‘복제’가 아니라 ‘생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강형구가 그린 <앤디 워홀>을 보자. 사진처럼 보이지만 실은 붓으로 그린 것이다. 이런 화법을 흔히 ‘극사실주의’라 부른다. 극사실주의는 원작과 복제의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즉 사진으로 회화를 베끼는 게 아니라, 회화로 사진을 베끼는 것이다. 왜 원작으로 복제를 베끼는 걸까? 그것은 물론 오늘날엔 복제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강형구가 그저 사진을 베끼고만 있는가? 워홀의 얼굴은 많이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로 길바닥 화가들이 그려주는 캐리커처와는 다르다. 캐리커처는 만화와 같은 저해상의 이미지이나, 이것은 사진과 같은 고해상을 자랑한다. 이것은 더 이상 극사실주의가 아니다. 극사실주의는 여전히 복제의 영역에 속하나, 강형구의 것은 이미 복제의 틀을 벗어났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자. 화면 속에서 관객을 쏘아보는 저 사내는 빈센트 반 고흐다. 고흐의 자화상은 봤어도, 그의 사진을 본 사람 있는가? 그런데도 강형구는 고흐의 얼굴을 사진처럼 그려놓았다. 마치 세상의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그의 사진을 혼자 몰래 갖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혹시 그가 정말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고흐의 사진을 입수한 건 아닐까?
그럴 리 없을 게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이것은 더 더욱 극사실주의라 할 수 없다. 극사실주의는 사진을 원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고흐의 초상은 아마도 화가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일 게다. 그런데 손으로 그린 이미지가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다. 그림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고, 그림이면서 사진인 이미지. 그것이 바로 ‘생성’ 이미지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진에 찍힐 수가 없다. 그리하여 복제 이미지는 반드시 피사체가 있어야 한다. 생성 이미지는 다르다. 듣자 하니, 그는 <늙은 마릴린 먼로>나 <80세의 강형구> 등 세상에 없는 인물의 초상도 그렸다고 한다. 이렇게 피사체가 없는 것이 사진의 생생함을 가지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 그게 바로 디지털시대에 등장한 ‘생성’ 이미지의 특징이다.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인물을 더 늙게, 혹은 더 젊게 만드는 것 역시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가능해진 새로운 이미지의 체험이다. 생성 이미지는 피사체 없이 손으로 그린 상상의 산물이나, 마치 피사체를 찍은 사진과 같은 생생함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는 역사적으로 그에 앞선 두 이미지, 즉 원작 회화와 복제 사진의 특성이 하나로 합쳐진다.
기술복제를 지향하는 극사실주의 작품들이 비인격적인 느낌을 준다면, 강형구의 이미지에서는 그와 달리 원작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가의 <자화상>을 보자. 사진처럼 극사실적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주름을 실제보다 더 깊게 판다든지 하는 회화적 과장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그림을 보고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원작에는 ‘아우라’가 있다고 말했다. ‘아우라’란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사물을 감싸는 어떤 분위기를 말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복제기술은 바로 그 분위기를 파괴한다. 가령 세상의 하나 밖에 없는 <모나리자>의 원작 앞에서 우리는 어떤 분위기를 느낀다. 하지만 수 없이 복제되는 <모나리자>의 사진에서도 분위기가 느껴질까?
워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임에도 애써 아우라를 벗어던지고 복제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반면 강형구의 이미지에는 분명히 어떤 아우라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혹시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인물의 시선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발터 벤야민은 어디선가 아우라를 ‘시선의 마주침’으로 정의한 바 있다.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회는 <응시(Gaze>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관객들은 관객을 쏘아보는 인물들의 시선에 일단 압도당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아우라의 체험이다. 원작과 복제, 회화와 사진을 합쳐 놓은 것이 생성 생 이미지의 특성이므로, 사진처럼 보이는 이미지에서도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이다.
대중은 어떤 작품에서 감명을 받았을 때, 흔히 “필이 꽂힌다”고 말한다. 그런 효과를 미학에서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강형구의 작품에는 푼크툼이 있다. 즉 관객을 찌르는 듯한 효과가 있다. 저 강렬한 눈길들은 관객의 눈을 잡아 끌어, 거의 강제적으로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시각을 넘어선 촉각적 체험에 가깝다.
강형구의 작품에서는 워홀과 먼로마저도 강렬한 눈빛을 내뿜는다. 복제 이미지를 취해 생성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알려진 인물의 모습을 사진으로 인식하는데, 나는 그렇게 알려진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선들을 조립해 원형을 복원한다.”
워홀의 작업이 광고 이미지를 위해 실크 스크린을 뜨는 직공의 것을 닮았다면, 엄청난 노력으로 이미지의 해상도를 뜨겁게 끌어올리는 강형구의 것은 영화 화면을 만드는 컴퓨터 그래픽 아티스트의 것에 가깝다. 워홀이 복제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예언했다면, 강형구는 이제 막 등장한 새로운 이미지 취향, 즉 디지털 생성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예고한다.
●‘원작→복제→생성’ 이미지 진화…대중들 이미 ‘생성 이미지’ 생산
인터넷서 ‘합성’ 논란 종종 벌어져
19세기까지는 인간이 직접 손으로 그리는 ‘원작 이미지’의 시대였다. 20세기에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카메라가 대량으로 보급되고, 신문, 잡지, 방송 등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카메라로 찍은 ‘복제 이미지’의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이미지의 역사에는 또 한번의 혁명이 일어난다. 디지털은 ‘생성 이미지’의 시대를 열었다.
그림은 피사체가 없어도 되나 대신 사실성이 떨어진다. 사진은 사실성이 뛰어나나 반드시 피사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은 피사체가 없는 이미지에도 사진과 같은 생생함을 부여한다. 생성 이미지, 가령 우리가 스크린 위에서 자주 보는 컴퓨터그래픽은 앞서 간 두 종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쳐 놓은 셈이다.
법정에서는 사진은 증거로 인정해도, 그림은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림의 경우에는 모델과 이미지 사이에 인간의 손이 개입하기에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사진의 경우에는 (물론 찍기 전엔 세팅을 하고, 찍은 후엔 가공을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짧은 시간 동안에는 인간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으로 사진도 증거능력을 잃을지 모르겠다. 생성 이미지는 피사체가 없는 이미지에까지 사진의 생생함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에서는 완벽한 조작이 가능하여,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할 수 있다. 앞으로 사진은 존재증명도, 부재증명도 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오늘날 대중은 이런 종류의 이미지를 점점 더 많이 보고 있다. 이미 대중 자신이 생성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터넷에서 종종 ‘진짜’니, ‘합성’이니 하는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복제 이미지는 60년대에 앤디 워홀의 미감을 낳았다. 생성 이미지는 21세기 그와는 또 다른 미감을 낳을 것이다.
- 진중권(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 한국일보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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