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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16] 문자로 그리는 그림

진중권



인문학 담론 뒷받침 없는 이미지는
'영상문맹'만 잉태하는 시대의 짝퉁
백남준, 화성 표면을 0과1의 수열로 보여줌으로써
이미지-텍스트 변환 '디지털 이미징'의 시대 예언
이미지에 텍스트 입력하는 방식 중 하나가 '비평'

1966년에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은 재미있는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이라고 해야 대단한 이미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달랑 오프셋으로 인쇄한 종이 한 장뿐이다. 이게 대체 뭘까?
제목이 힌트를 줄지 모르겠다. <화성에 대한 최초의 스냅 샷 사진>. 하지만 종이 위에 화성의 그림은 없다. 보이는 것은 교차되며 반복되는 0과 1의 기다란 수열. 그리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행렬뿐. 어떻게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을 주저없이 미디어아트의 걸작으로 꼽는다. 이 작품은 지금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미지의 원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1964년 11월 28일에 발사된 마리너 4호는 긴 항해 끝에 이듬해 7월 14일 마침내 화성에 도달한다. 탐사선은 9,800km 상공을 스쳐 지나가며 이 붉은 행성의 표면을 사진으로 담는 데 성공한다. 우주의 심연으로부터 날아온 이 스물 두 장의 사진이 바로 인류가 보는 최초의 다른 행성 이미지. 사진은 그 중의 한 장인데, 해상도는 높지 않아도 붉은 행성의 주름진 피부를 보여준다. 마리너 4호는 테이프레코더에 기록된 이 이미지를 수열로 변환해 송신했고, 지구 위의 IBM 컴퓨터가 이 수열을 다시 이미지로 복구했다. 이 절차가 백남준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두 개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라. 하나는 공간적으로 제시되는 화성 표면의 이미지.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 전개되는 0과 1의 수열. 하나도 닮지 않은 이 둘이 실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당시에 이미지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은 우주항공과 같은 전문영역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PC가 가전제품이 된 오늘날, 우리는 이를 이미 일상으로 체험한다.
예술가는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을 앞서서 예견한다. TV에 쌍방향성을 도입해 오늘날의 인터넷 문화를 예견한 것처럼, 백남준은 이 디지털 이미징이 언젠가 대중의 일상이 될 것이라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그래픽이든,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보는 모든 이미지의 정체는 문자와 숫자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0과 1의 수열로 환원된다. 가령 사이버 공간 속에 조형물을 만들어 집어넣는 디지털 조각가를 생각해 보라. 비록 가상이라 하나, 그 역시 조각이기에 마우스로 클릭하면 3D로 작품을 돌려가며 감상할 수가 있다. 작가는 망치나 끌을 사용하지 않았다. 재료로 대리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 키보드와 마우스뿐이다. 한 마디로 디지털 이미지는 ‘문자로 그리는 그림’이다.
인류는 문자문화에서 새로운 영상문화로 진입하고 있다.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가 주요한 소통의 매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통의 주요한 매체가 이미지로 바뀌면서, 거기에 필요한 언어능력 역시 달라지고 있다. 문자로 소통할 때에는 영어와 수학이 중요했지만, 영상으로 소통하는 시대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고, 이미지 밑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 이것이 미래의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이 될 것이다. 디지털의 언어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상형문자’다. 요즘 사회적 관심을 끄는 CG를 생각해 보자. 그것의 정체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0과 1의 기호연쇄다. 하지만 ‘문자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된 이 평범한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가령 CG의 밑에는 0과 1의 이진부호만이 아니라, 동시에 엄청난 이론들의 복합체가 깔려 있다. 하다못해 공이 바닥에 튀는 모습을 시뮬레이션하는 데도 물리학에 대한 법칙이 들어가야 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발달했다는 것은 그저 ‘그림을 예쁘게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공각기동대>와 같은 작품의 바탕에는 심오한 인문학적 담론이 깔려 있다. 그 때문에 <매트릭스>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 영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인문학적 담론의 뒷받침이 없을 때, 애니메이션은 그저 남이 쓴 텍스트를 이미지로 바꿔주는 손작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즉 텍스트의 뒷받침이 없는 이미지 기술은 하청의 수준을 벗지 못하게 된다.
컴퓨터그래픽만 그런 게 아니다. 가령 건축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건물의 목적, 건축의 기술과 재료, 거기에 건물에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미학적 고려를 ‘형태’로 뽑아내는 작업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는 물건의 실용성, 기술과 재료, 상품의 경제성, 문화적 취향 등에 대한 고려가 하나로 어우러져, 마치 꽃잎 끝에 맺힌 이슬처럼 ‘이미지’로 결정화되는 것이다.
헝가리의 예술가 모호이 나지는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못 읽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오늘날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맹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문자의 시대에 문맹이 존재했듯이, 영상의 시대에는 영상맹이 존재한다. 이미지는 눈에 보이나, 그 밑에 깔린 텍스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문맹, 즉 ‘영상문맹’의 가능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 없이 이미지만 볼 때, 사람들은 글자를 못 읽어 성서를 성화로 봐야 했던 중세의 민중으로 전락한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의 담론 없이 이미지를 만들려 할 때, 그것은 무늬만 비슷한 짝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미지 안에 텍스트를 입력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바로 ‘비평’이다. 그런데 이 나라 민중은 온통 평론에 대한 적개심으로 끌어오른다. 이런 나라에서는 CG마저 일체의 비평을 허용하지 않던 중세의 성화가 된다.

■ 매트릭스의 아키텍트
'세계는 문자열에 불과하다' 디지털시대의 세계상 은유
영화 <매트릭스>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세계의 이미지가 갑자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문자열의 빗줄기로 변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디지털 시대의 세계상을 상징하는 시각적 은유다. 사람들이 '세계'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실은 누군가가 쓴 텍스트, 즉 아키텍트가 짠 프로그램에 불과했다. 영화 속에 묘사된 디스토피아는, 영화처럼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원시시대 이래로 이미지는 자신을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마법의 힘을 갖고 있다. 이 마법의 바탕을 뚫어보지 못할 때, 사람들은 남의 관념을 자신의 세계로 알고 살아가게 된다.
가령 영상의 마법사 황우석 박사를 생각해 보라. 그는 사람들의 눈앞에 줄기세포의 사진, 척추를 다친 개가 치료를 받아 펄펄 뛰는 영상, 그리고 수염도 깎지 않고 초췌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진을 제공했다.
이 영상들의 공허함을 뚫어보지 못한 대중은 그가 제시하는 장밋빛 환상을 현실로 착각해 버렸다. 영상의 마법사는 영상으로 세계를 지었고, 대중은 그 화려함에 반해 기꺼이 그곳의 주민이 되었다.
논문(텍스트)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영상은 결국 허무한 가상으로 드러났다. 거기에 들어간 비용은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거국적으로 허무하던가? 이게 바로 영상문맹이 낳은 대표적인 해프닝이다. BT의 영역에서 일어났던 이 해프닝은 IT의 영역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이 사회를 광풍으로 몰아넣은 그 CG와 관련해서도 우려할 만한 분위기가 존재한다.
선사시대의 이미지는 '주술'의 산물이었지만, 문자 이후의 이미지는 '기술'의 산물이다. CG는 제 근원을 신비 속에 감추며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바탕에 깔린 텍스트를 드러내어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미래의 인간은 '프로그래밍을 하는 자'와 '프로그래밍을 당하는 자'로 나누어질 것이라 예언했다.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물론 이미지 속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느냐 하는 것.
예술가들 중에서 최초로 이미지 밑에서 이진부호로 된 텍스트를 읽어냈던 백남준. 지금 조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뭐라고 할까?

-진중권 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한국일보 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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