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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17] 영상시대의 인문학

진중권

첨부파일 : 진중권의상상17.JPG


낡은 문자문화 틀 깨야 위기가 기회로
영상시대에도 상상력의 원천은 인문학
기술·예술 아우르는 새 유형의 사유 필요…문화를 산업·돈으로만 보는 관점부터 극복돼야

작년에 고려대학의 교수들이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선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라에서 부랴부랴 수백억을 투입하겠다는 얘기까지 들은 것 같은데,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돈으로 상황이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위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외적인 요인으로, 국민의 정부 이후 급격히 진행된 대학의 시장화다. 고교시절엔 입시공부, 대학시절엔 입사공부. 여기에 인문학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다른 하나는 내적 요인으로, 그것은 매체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사회의 주요한 소통수단이 문자에서 영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더 이상 흰 종이 위의 검은 활자보다 모니터 위의 화려한 칼라 영상을 더 좋아한다. “왜 그들은 책을 안 읽을까?”
문자문화 세대는 책을 안 읽는 세대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혹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기보다는, 학생들의 수준이 과거보다 떨어졌으며 이 천박한 사회가 아이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또 다른 극단도 있다. 가령 소설가 이인화씨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을 너무나 읽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요.” 젊은이들이 문자를 버리고 영상의 바다에 빠지는 게 외려 축복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영상은 ‘문자로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 이른바 테크노 영상들은 실은 그 아래에 복잡한 텍스트를 깔고 있는 일종의 아이콘이다. 가령 윈도우 창문에 뜬 아이콘들. 언뜻 그림으로만 보이나, 실은 복잡한 명령어가 아니던가.
기술적 영상은 문자숫자 코드(alpha-numeric code)로 그린 것, 즉 인문학적 상상력(문자코드)을 공학적 기술(숫자코드)을 이용해 이미지로 결정화한 것이다. 이 이미지는 애초에 책을 안 읽는 돌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문자숫자 코드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영상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하다못해 게임에도 내러티브(문자코드)가 있고, 영상의 기술(숫자코드)이 있다. 가령 ‘스타크래프트’를 생각해 보라. 미국에서는 영상을 생산하고, 한국에서는 그것을 제일 먼저 소비한다.
영화 <주라기 공원>을 생각해 보라. 이 영화는 모기 뱃속에 든 공룡의 피에서 DNA를 얻는다는 서사가 유전공학을 통한 동물복원의 위험성의 강조라는 윤리적 명분 아래 전개된다. 사람들이 흔히 우습게 보는 오락영화에도 이처럼 기술적, 인문학적 담론이 깔려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어떤가? 가령 <공각기동대>는 디지털의 존재론, <모노노케 히메>는 생태주의 담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철학적 토대 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도 서사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가는 문학적 저력이 있다.
21세기의 언어는 텍스트/이미지의 일종의 상형문자다. 그런데 이미지는 눈에 보이나, 그 바탕의 텍스트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눈에 뵈는 남의 이미지만 어설프게 베끼는 경향이 생긴다. 하지만 인문적-기술적 담론의 토대가 없을 때, 이미지 산업은 그저 손으로 그림만 그려 납품하는 하청으로 전락한다.
영상문화의 상상력이 인문학에서 나온다고 할 때, ‘인문학의 위기’라는 지금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문학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문학자들이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들의 사고가 아직 낡은 문자문화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영상문화는 한 마디로 ‘인문학’에서 나오는 상상력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이미지로 실현하는 ‘예술’의 문화다. 인문학자-엔지니어-아티스트로 이루어지는 이 삼각 콘소시엄 속에서 미래의 인문학은 한편으로는 기술과 결합하면서 동시에 예술과도 접속해야 한다.
인문학이 예술과 접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표현인문학’이라는 막연한 구상으로 몇 년 전에 제출된 바 있다. 하지만 그저 논문식 글쓰기에서 에세이로 나아가는 문체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합리성과 상상력, 텍스트와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사유방식을 갖추는 것이다.
이미지 속에서 텍스트를 읽어내고 텍스트를 이미지로 실현하는 것. 이는 합리주의의 연역적 사유, 경험주의의 귀납적 사유와는 구별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유다. 미래의 인문학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하던 바로크 시대의 엠블렘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엠블렘은 우연히 현대의 아이콘을 닮았다. 컴퓨터가 수행해야 할 작업들이 복잡해지자 엔지니어들은 윈도우를 개발했다. 도스 환경에서라면 일일이 명령어를 타이핑해야 하나, 윈도우 환경에서 유저들은 그저 명령어를 이미지로 압축한 아이콘을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엠블렘과 아이콘의 유사성은 인문학에 어떤 공학적 솔루션을 도입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윈도우처럼, 미래의 인문학 역시 그 복잡하고 추상적인 관념을 누구나 쉽게 윈도우의 아이콘처럼 ‘클릭’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인문학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해야 한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대체 문화를 ‘산업’으로만 바라보는 천박한 관점의 극복이다. 현재 영상산업은 ‘컨텐츠’라는 이름 하에 인문학에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의 소재 거리를 찾아 납품하라고 요구한다. 인문학을 간단히 영상산업의 하청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문화란 애초에 천박함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에서 ‘돈’부터 떠올리는 천박한 머리로는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법이다.

■ 대학생이 만든 애니 '종이비행기' 화제
예고편만 보고 '日 애니 능가' 찬사
서사와 주제의식부터 진지한 성찰을

최근 대학생들이 사비를 털어 만든 중편 애니메이션이 네티즌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저 예고편만 공개됐을 뿐인데, 이미 언론에서는 찬사를 늘어놓기 바쁘다. 보도에 따르면, 이미 그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넘어 날개짓'하고 있다.
1분 18초짜리 화면만 보고 하는 얘기다. 이른바 '그림빨'로는 그러잖아도 한국 애니메이션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그런 한국 애니메이션이 번번이 흥행에 참패를 한다는 것. 왜 그럴까? 물론 서사와 주제의식의 빈곤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도 보기 전에 벌써부터 극일의 애국주의 수사학에 젊은 '열정'을 찬양하는 인간극장의 드라마다. 박수를 치면 작품의 질이 올라간다고 믿는 걸까? 그보다는 차라리 박수를 치면 수은주가 올라간다고 믿는 게 더 과학적일 게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고질병으로 지적되던 서사와 주제의식의 빈곤이 얼마나 극복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그래야 정말로 '일본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작품성'을 가졌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한국의 언론이 얼마나 이미지맹(盲)인지 그대로 드러난다. CG만은 그런대로 볼만 했던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는 미국에서 엄청난 혹평을 받고 흥행에 참패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러는 걸까?
한국문화컨텐츠 진흥원이라는 곳의 한 인사는 그 영화가 '한국의 컨텐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썼다. 그 영화가 망한 가장 큰 이유는 정작 컨텐츠의 부재가 아니었던가? 이는 이 사회에 인문학적 컨텐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천박한지 보여준다.
<종이비행기>를 보고 네티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닮았다'고 한단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손재주가 뛰어나서 거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상과 철학이 깔려 있다. 이제 막 창작을 시작한 우리의 젊은이들은 부디 그로부터 이 인문학적 사유의 깊이를 배우기 바란다.
국가보안법 모시고 사는 애국자들의 나라에서 하야오의 무정부주의적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영화의 목표를 미국 정복에서, 애니의 목적을 일본 정벌에서 찾는 애국 언론들에게, '애국자'라는 이름의 인간짐승들이 역겨워 돼지가 되어야 했던 <포르코 로소>의 말을 대신 들려주자.
'애국? 그런 건 인간들이나 하라 그래'

- 진중권(문화평론가ㆍ중앙대 겸임교수)
- 한국일보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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