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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③베두타

이주헌


귀족-부유층 자제 ‘그랑 투르’ 상징
징그럽도록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
“이제 짐을 싸서 이곳과도 이별하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는 브렌타 강 쪽으로 계속 가려 한다. 오늘은 비가 왔지만 이제 그쳤으니 아름답게 갠 좋은 날씨에 갯벌과, 바다와 결혼한 여왕 베네치아를 내 눈으로 바라보고, 또 그녀의 품속에서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낼 수 있으리라.”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에서 베네치아 방문을 앞두고 쓴 글이다. 아름다운 베네치아 풍경에 대한 기대를 그는 ‘바다와 결혼한 여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 여왕은 당대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알현’해 보고 싶어했던 여왕이고, 여왕을 알현한 뒤에는 잊지 못할 추억을 위해 베네치아를 그린 베두타(Veduta)를 하나씩 사서 돌아갔다. 18세기 유럽은 그렇게 뛰어난 도시풍경 화가들의 붓 끝에 의지해 도시의 사랑스러운 혹은 자랑스러운 초상을 기리고 간직했다.
베두타는 이탈리아어로 ‘전망’, ‘조망’을 뜻한다. 이 의미로부터 전망 좋은 풍경을 그린 그림을 베두타라 부르는 관습이 생겨났다. 주로 도시를 세밀하고 정교한 솜씨로 그린, 비교적 사이즈가 큰 그림을 지칭한다.
중세 유럽에서 그림에 도시풍경이 등장하는 것은 주로 종교화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때의 도시풍경은 현장감 넘치는 사실 풍경이 아니라, 주제를 위한 배경으로서 도시의 랜드마크 한두 개를 집어넣어 그린 임의적 풍경이었다.
풍경화 자체가 독립적인 장르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은 여행이 늘어나는 16세기부터다. 베두타의 등장도 이 시기와 맞물린다. 베두타는 이처럼 태생적으로 여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림이다.
베두타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행 문화는 이른바 ‘그랑 투르(Grand Tour)’다. 그랑 투르는 귀족 가문이나 부유층의 자제들이 고대 문명의 본산인 이탈리아와 문화와 사교의 나라 프랑스를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여행하는 것을 일컫는 용어로, 1660년 무렵부터 1840년대까지 성행했다. 그랑 투르라는 말은 영국의 가톨릭 신부 리처드 래설스(Richard Lassels)가 만들었다.
래설스는 영국의 몇몇 유력 귀족 집안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이탈리아를 다섯 차례 방문한 뒤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책을 쓴 그는, 이 책에서 고대와 건축, 예술에 대해 알고 싶은 학도라면 무조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가 봐야 하며, 젊은 귀족들이 세계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랑 투르를 다녀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래설스의 책 출간을 전후해 영국에서 시작된 그랑 투르 풍조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북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영국을 기준으로 당시의 전형적인 여행 코스를 살펴보면, 영불해협을 건너 칼레에 간 다음, 파리, 제네바, 토리노, 피렌체, 피사, 볼로냐,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와 주변 유적지를 돌아보고 독일어권 나라를 들러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파리에 가서는 사교예법과 언어를 익히고, 이탈리아에 가서는 고전 예술과 르네상스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 그 감흥을 많은 미술품과 책, 문화재를 사는 것으로 발산했는데, 이 가운데 일종의 기념사진이라 할 수 있는 베두타가 반드시 쇼핑 목록에 들어 있었다.
로마 유적지의 그림이나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집으로 가져가 걸어 넣고 추억을 안주 삼아 친구들, 지인들에게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만큼 이 그랑 투르 여행객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부와 여유, 학식, 교양이 없으면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다. 이렇게 여행과 교육, 예술 애호의 삼위일체로 전개된 그랑 투르는, 18세기 유럽의 지배계층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확고히 틀어쥐어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베두타는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18세기 최고의 베두타 화가들(베두티스티, Vedutisti)은 주로 베네치아에서 나왔다. 지중해의 밝은 빛과 바다, 운하, 화사한 색채의 건물이 어우러진 베네치아만큼 아름다운 도시도 드물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겠다. 이들 가운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사람이 카날레토와 벨로토, 과르디다.
카날레토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높은 베두타 화가였다. 카날레토의 대표작이 왜 이탈리아가 아니라 영국에 더 많이 소장되어 있는지는 그랑 투르를 알지 못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워낙 영국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보니 아예 영국으로 가 직접 ‘시장 개척’에 나섰는데, 이게 패착이었다. 최고의 베두타 화가였지만, 사람들이 감탄한 것은 그가 그린 베네치아 풍경이었지 영국 풍경이 아니었다. 영국을 그려도 베네치아처럼 그려줄 것을 기대하니 화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짜 카날레토 아니냐”는 비난을 듣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제작 시범까지 보인 끝에 황망히 베네치아로 돌아가고 말았다.
카날레토의 <프랑스 대사의 베니스 도착>은 도시 풍경에 외교 행사의 이미지를 담아 그린 걸작이다. 화가 특유의 정교한 필치가 총독 궁(팔라초 두칼레)과 국립 도서관,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사진처럼 생생히 드러나게 한다. 앞쪽 선착장에는 프랑스 대사 랑게가 곤돌라를 타고 도착하고 있고, 많은 환영 인파가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비록 하늘에 구름이 끼어 부분적으로 어두워져 있지만, 햇빛이 구름을 뚫고 선착장과 총독 궁 벽면에 환한 금가루를 쏟아낸다. 이로 인해 분홍빛 대리석 벽면의 표정이 풍부해졌고 선착장에 모인 사람들 또한 활기가 있어 보인다. 벽체 위로 솟은 하얀 조각상은 정의의 여신상이다. 그 아래 발코니에 성인들과 사자 상이 있는데,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마가인 까닭에 그의 상징인 사자가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18세기의 영국 여행객들은 카날레토의 이런 정확하고 정밀한 도시 묘사가 자신들의 기억을 새롭게 다잡아줄 뿐 아니라, 그 핍진감으로 그림을 보는 고향 친지들의 선망과 부러움을 자극한다는 점을 잘 알았다. 앞다퉈 사지 않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물론 구매자에 따라서는 묘사의 정확성보다 다소 거짓되더라도 방문지의 낭만과 환상을 강조한 그림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인상적인 건축적 모티프들을 따 상상으로 그린 베두타를 팔았는데, 이를 ‘카프리초(Capriccio)’라고 불렀다. 과르디가 그 경향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과르디의 <건축적 카프리체>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실재하지 않는 장소를 그린 풍경화다. 그럼에도 베네치아의 골목과 건축물들이 자아내는 독특한 풍취가 생생히 살아나온다. 골똘히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우리도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아름답고 복잡한 공간을 지나가는 여행객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 소소하면서도 매력적인 과르디의 시선은 갈수록 작은 그림(심지어 성냥곽보다 약간 큰 그림)으로 응축되어 관광객들이 아내나 연인의 침실 장식용 그림으로 사는 예쁜 기념품이 되었다. 이렇게 베두타를 통해 지중해는 유럽을 다시 한 번 열렬히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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