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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17] 미술의 타고난 운명 짝퉁시비 : 위작

이주헌


르네상스 이전 ‘베끼기’는 배움의 방편
“노략질” 저주속 관대한 시각도 있지만
큰돈 오가는 시장에선 어림도 없는 일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져온다.
“(19세기 프랑스 풍경화의 대가) 코로는 평생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 가운데 5천여 점이 미국에 있다.”
코로의 경우 진품보다 위작이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나온 것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보아야 한다는 충고다. 꼭 코로뿐이랴, 피카소, 달리, 샤갈, 미로, 반 고흐 등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미술가치고 위작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을 지낸 토머스 호빙은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미술품의 40% 가까이가 위작일 것”이라고 말했다.
위작은 생각 밖으로 많이 제작되고 거래된다. 그리고 위작의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됐다. 우리에게는 위작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시장을 꿈꿀 권리가 있지만, 미술시장이 형성된 이래 그런 ‘태평성대’가 온 적은 아직 없다.
위작이 따라붙는 것은 어쩌면 미술이라는 예술의 타고난 운명인지 모른다. 모든 미술은 모방에서 출발했다. 세계를 모방하는 것, 곧 베끼기가 미술의 한 본령이다 보니 위작이라는 모방이 그 본령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원작의 개념이 없었던 옛날에는 이런 베끼기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방작(倣作)이라 하여 옛 대가의 그림을 임모하는 게 존경의 표시이자 창작의 한 방식이었다. 서양에서도 거장과 선생의 그림을 모사하는 게 중요한 배움이었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조각을 수도 없이 베꼈다. 오늘날 실제 그리스 조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그리스 조각의 성격과 특징을 깊고 광범위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상당 부분 이 모작들 덕분이다. 로마인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조각가로 하여금 이를 베끼게 해 그걸로 자신들의 빌라를 꾸몄다. 동일한 작품이 워낙 많이 베껴지다 보니 원작이 망실되고 모작이 다수 파괴되어도 끝내 살아남은 게 있어 그리스 조각의 특징을 오늘날까지 전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가가 도제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 자신의 그림을 베껴 스타일과 기법을 익히도록 했다. 잘 베낀 그림은 스승이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가르침의 대가, 그러니까 수업료로 갈음됐다.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이런 모작들이 화가의 진작으로 전승되어 본의 아니게 위작이 되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스승의 그림을 베끼는 전통이 뿌리내린 한편으로, 진품에 대한 존중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 또한 르네상스 무렵이다. 르네상스 들어 고전 부흥의 바람을 타고 로마시대의 조각이 열정적으로 발굴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진품의 가치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미켈란젤로가 몰래 가짜 로마 조각(<잠자는 큐피드>)을 만들어 팔았다는 일화는 당시 시장에 위작이 얼마나 많이 떠돌았는가 하는 사실과, 그에 반해 애호가들이 얼마나 진품에 목말라 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특히 예술가를 공방의 장인이 아니라 천재로 보는 관념이 생겨남에 따라 작품의 고유성과 원작성은 갈수록 중요해졌다.
후에 작가 사인의 원조가 되는 표지가 이때부터 나오게 되는데, 이름의 이니셜 A와 D를 이용해 모노그램을 만든 알브레히트 뒤러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자신의 작품을 베낀 위작이 시장에 워낙 많이 떠돌자 뒤러는 성모를 그린 한 판화에 “남의 작품과 재능을 노략질하고 모방하는 자들이여, 저주를 받으라”라는 명문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표지와 사인마저 모방의 대상이 되자 미술가들 가운데는 나름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17세기의 거장 클로드 로랭은 유화를 하나 완성하면 이를 그대로 스케치해 따로 보관했다. 위작임에도 진품 행세를 하는 작품이 나올 경우 자신의 스케치 모음과 대조해 시시비비를 가렸다. 영국 화가 앨마 태디마는 1871년부터 작품에 전작번호(Opus)를 도입해 위작의 유통을 막았다. 물론 이 이전에 만들어 판 작품에는 번호를 써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1851년에 제작된 <누이의 초상>을 1번으로 해서 그동안 만든 작품 전체에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뒤 1871년부터는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사인 아래에 반드시 로마숫자로 전작번호를 써 넣었다. 1912년, 죽기 두 달 전에 제작한 유작의 전작번호는 ‘CCCCVIII(408)’이었다.
그러나 화가에 따라서는 이렇게 애써 작품의 진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인이나 괴짜가 많은 미술 분야의 특성상 위작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피카소는 “훌륭한 위작이라면 거기에 얼마든지 내 사인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코로는 자신의 작품이 많이 모사되는 것은 그만큼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해 실제로 가짜에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태도를 결코 용인하기 어렵다. 시장에서는 미술작품도 하나의 상품인 이상 ‘짝퉁’이 횡행할 경우 커다란 신뢰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고, 신뢰의 위기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를 돌아보면 워낙 다양하고 다채로운 위작 사건들이 발생해 그 사례를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다. 그에 비해 미술시장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아직 그처럼 다사다난한 위작 시도는 겪어보지 않은 상태다. 다만 우리 미술시장이 최근 급성장하고 있어 더 커진 보상에 대한 기대로 앞으로 일층 정교하고 교묘한 위작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서양미술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위작 미술가 몇몇을 언급해 보면, 오슨 웰스의 영화 <진실과 거짓>의 소재가 된 엘미르 드 호리(전세계의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 평생 1천 점이 넘는 위작을 팔아넘겼으며,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죽자 그것 또한 속임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위조자로서의 명성으로 인해 위작임에도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위작 사건의 주인공인 한 판 메이헤런(페르메이르의 국보급 그림을 나치에 판 죄로 중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그 작품과 보이만스 미술관 소장품 등이 자신의 위작이라고 밝히고 이를 믿지 못하는 전문가들에게 감옥에서 직접 위작을 제작해 보여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인기 작가 카렐 아펠을 전문적으로 위조한 헤이르트 얀 얀선(위조 솜씨가 워낙 탁월해 경매회사 등에서 아펠에게 진위 여부를 물었을 때 아펠이 두 차례나 진품 판정을 내렸다), 도나텔로, 베로키오 등 르네상스 대가들의 위작을 제작해 루브르, 빅토리아 앤 앨버트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판 조반니 바스티아니니(중개상과의 불화가 없었다면 위작이라는 사실이 끝내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등이 있다.
최근 탁월한 진위 판별력을 갖춘 디지털시스템이 개발되는 등 위작에 대한 미술계의 대응 노력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예술을 오로지 돈으로만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한 이 모든 수고는 언제라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미술평론가
www.hani.co.kr/arti/SERIES/201/336407.html
» 일본 야스다 화재가 1987년 4천만달러에 구입한 반 고흐의 <해바라기>. 출처 추적 결과 위작으로 의심받고 있다.
» 앨마 태디마의 <행운을!>, 유화, 25.4x12.7㎝, 왕립 컬렉션. 그림 하단에 사인과 함께 위작 방지를 위한 전작번호(CCCXXII)를 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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