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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15] 오리엔탈리즘: 서양은 동양보다 우월하다?

이주헌


오리엔트 지배한 유럽 제국주의 시선
교화 대상이면서 이국적 판타지 함께
서양미술에서 오리엔트의 이미지는 성경 주제를 통해 제일 먼저 나타났다. 유럽인들이 볼 때 성경의 무대 자체가 동방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유대의 동쪽 출신인 동방박사가 가장 오리엔트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그들이 동방박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출신지가 페르시아 제국이나 아라비아 쪽이었기 때문일 터인데, 중세미술에서 이들은 어렴풋이나마 터번 혹은 이슬람 지역의 의상 비슷한 것을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는 오스만 튀르크인들이 대표적인 오리엔트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오스만 튀르크는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개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들 튀르크 상인들이 드나드는 서유럽의 유일한 항구였던 까닭에 자연스레 베네치아 화가들에 의해 이들의 이미지가 빈번히 그려졌다. 베네치아 화파의 거두로 꼽히는 젠틸레 벨리니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여행해 2년간 체류하며 술탄 메흐메트 2세를 그리기도 했다.

이어진 16~18세기에도 서양화가들은 오리엔트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19세기에 그려진 것만큼 많은 오리엔트 주제가 그려진 적은 없었다. 19세기는 그야말로 오리엔탈리즘 회화(orientalist painting)의 전성기였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이는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시기 오스만 튀르크의 쇠퇴로 인해 소아시아와 발칸 지역이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영국의 인도 및 이집트 지배가 이어지면서 오리엔트 지역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크게 높아졌다. 이는 18세기 끝에 있었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오리엔트 지역에 대한 학문적·문화적 탐구 열풍을 불러온 것과 맞물려 적극적이고 왕성한 예술적 표현을 낳았다.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우리는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 회화가 이전의 회화들보다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부정적 의미로서의 오리엔탈리즘, 곧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고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태도’가 그림들 속에서 또렷이 형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화가 폴 투르예베르의 <하렘의 하녀>를 통해 19세기 서양미술 속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의 모습을 이해해 보자.
하렘은 이슬람권에서 가까운 친척 외에 일반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금남의 장소를 말한다. 오스만 튀르크 술탄의 하렘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금남의 장소라는 그 이유 하나로 서양미술 속에서 이곳은 온갖 성적 환상이 피어오르는 에로티시즘의 무대로 변해버리곤 했다. 투르예베르의 그림에서도 하녀는 지금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성적인 판타지를 고무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
노예 소녀가 왜 이리도 에로틱하고 신비로워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소녀가 당시의 서양인들이 오리엔트 지역에 대해 갖고 있던 가장 중요한 환상의 하나인 ‘이국적 관능성’을 띠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예쁘고 화려하게 장식했어도 소녀는 그저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일 뿐이다. 근대 서양한테 오리엔트는 그림의 소녀처럼 매력적이지만 스스로 자립할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존재였다. 아니, 그런 존재여야 했다. 이국적 관능성의 표현 뒤에는 이런 권력 관계에 대한 확신과 요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서양인들만의 생각이었다. 이와 관련해 사이드는 이런 말을 했다.
“플로베르는 이집트 창녀와 만났기 때문에 (이후) 큰 영향을 미친 동양여성의 모델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창녀는 결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그녀 자신의 감정이나 이력을 소개하지도 않았다. 플로베르 자신이 그녀 대신 말했고, 그가 그녀를 대변하여 소개하고 표상했다. 플로베르는 외국인으로서 비교적 부유했으며 남자였다. 이 조건이 바로 지배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나타냈다.”
사이드가 지적했듯 동양은 서양에 의해 정의됐고 서양에 의해 대변됐다. 서양인의 인식 속에 동양은 주체인 적이 없었으며 오로지 주체인 서양의 대상적 존재, 곧 타자였다. 주체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남성’으로 상정된 근대 서양 문명에서 타자가 된다는 것은 곧 ‘비합리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투르예베르의 그림을 포함해 19세기 서양회화사의 수많은 오리엔탈리즘 회화가 그런 이미지로 형상화됐다.
‘이국적 관능성’과 더불어 당시의 서양이 동양에 대해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환상이 ‘부패와 폭압’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 동양은 폭군의 땅이었다. 그들의 눈에 동양인들은 민주적인 의사 결정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여된, 전제 정치에 길들여진 존재들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이런 인식은 ‘이국적 관능성’의 환상과 짝을 이뤄 그들이 이들을 지배하고 교화해야 할 이유가 됐다.
그러했기에 영국의 정치가 밸푸어는 “동양인들의 역사 전체를 관찰해 볼 때 그곳에서는 자치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며 “그들이 우리들의 통치하에서 지금껏 유례를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정부를 갖게 됐다는 것은 그들뿐 아니라 서양 문명 전체에 대해서도 이익”이라고 강변할 수 있었다.
이렇듯 백인의 식민 지배를 유일한 대안으로, 희망으로 기대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오리엔트. 그곳의 폭군을 그릴 때 화가들은 그만큼 센세이셔널하게 표현했다. 앙리 르노의 <즉결처분>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림의 배경은 그라나다 왕국이다. 그라나다 왕국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옛 이슬람 왕국이다. 비록 서유럽에 세워진 왕국이지만, 아랍인들이 세운 나라인 탓에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곤 했는데, 화가는 알람브라 궁전에서 벌어진 상상 속의 사건을 매우 인상적으로 형상화했다.
갈색 피부의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칼에 묻은 피를 자신의 옷으로 닦고 있다. 그가 서 있는 계단에 주검이 쓰러져 있는데, 머리가 목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이 이뤄진 것이다. 동방에서 절대 권력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자는 이처럼 늘 무자비하게 처단된다. 인권이나 법,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선혈이 낭자한 계단의 잔인한 풍경은 배경의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대비되며 동양의 매력과 공포를 동시에 확산시킨다. 어쩌면 이는 19세기 유럽이 겪은 스스로의 잔인성 혹은 가학적 욕망을 날것 그대로 투사한 장면일 수 있다.
물론 19세기의 모든 오리엔탈리즘 회화가 편견과 우월성에 사로잡혀 표현된 것은 아니다. 뒤로 갈수록 적극적으로 현장 답사에 나선 화가들이 늘어나면서 객관적인 사실 묘사에 치중한 그림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오리엔탈리즘 회화 대부분은 많건 적건 그 부정적인 관념의 지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 * 투르예베르, ‘하렘의 하녀’, 187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니스 미술관
» * 르노, ‘즉결처분’, 1870,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

» 앵그르, ‘터키탕’, 1862, 나무에 유채, 지름 110cm, 루브르 박물관. 하렘에 대한 에로틱 판타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http://www.hani.co.kr/arti/SERIES/201/3329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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