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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물관 100년의 사람들]2.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

편집부


“자전거도 없던 1957년 울릉도
발로 훑어 통일신라 고분 확인”
“지도 들고 고인돌 찾아다니다 간첩으로 몰리는 소동 겪기도
1972년 신축한 경복궁 박물관 물탱크 터져 유물창고 물바다”
인터뷰=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인 윤무병 전 충남대 교수(85·학술원 회원)는 다리가 불편하다. 중학생 시절 개성 만월대(고려왕궁), 평양과 중국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여행하고 열병을 앓은 뒤의 후유증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국의 발굴 현장을 누비며 한국 고고학의 기초를 다졌다.
윤 전 교수는 국립박물관 재직 시절 18년간(1954∼1972년) 울릉도의 고분, 전국의 지석묘(고인돌), 선사시대 주거지, 경남 해안 일대 패총(선사인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무더기) 발굴 등 최초 수식어가 붙은 수많은 조사에 참여했다.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사진)이 그를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만났다.
신광섭 관장=1960년대 전국 고인돌을 조사해 펴낸 ‘한국 지석묘 연구’의 성과는 교과서에 반영됐습니다. 한국의 독자적 청동기 문화가 정립돼 고인돌을 한국의 대표적 유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죠. 도로 사정이 열악했을 텐데 어떻게 전국을 조사하셨습니까.
윤무병 전 교수=지표조사(유적 현황 조사)도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유적 인근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다 고인돌을 발견하면 곧장 내려 그곳까지 걸어갔어요. 지도를 들고 살피다가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생 끝에 한국 고인돌의 연대와 형태를 처음 분류했어요. 유물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 방법도 처음 도입했습니다.
1957년 윤 전 교수는 고고미술가 임천(1908∼1965),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과 함께 벌인 첫 울릉도 조사에서 고대 고분을 발견했다. 고대부터 울릉도가 한국의 생활문화권임을 입증한 것이다.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성과를 바탕으로 ‘1500년 전 울릉도-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전을 열었다.
윤=당시 한 달에 한 번 배가 오갈 뿐이었고 섬에 자전거도 없어 고분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어요. 삼국시대 고분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통일신라시대 고분 80여 기를 확인했습니다.
신=당시 울릉도를 조사할 생각을 하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울릉도를 한국인 삶의 공간으로 보는 연구가 중요합니다.
6·25전쟁 뒤 서울 중구 예장동 옛 국립민족박물관 건물에 자리 잡은 국립박물관은 1955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했다.
윤 전 교수는 봄가을 관람객이 몰릴 때는 하루 3000명도 왔다고 전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의 하루 평균 관람객(5300여 명)과 비교할 때 적은 수가 아니다. 하지만 전시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윤=박물관 바닥이 나무여서 관람객이 오가면 다 닳아 월요일마다 왁스로 밀어야 했어요. 유물 진열장도 미비했죠. 금관총 금관(국보 87호)을 전시하는데, 창문을 이용해 진열장을 만들 정도였으니. 밤에는 금관 주변에 철판을 세워 자물쇠를 잠그는 것으로 도난방지시설을 대신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런데 관람객들이 모조 금관인 줄 알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웃음)
1972년 새로 지은 경복궁의 박물관 건물(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은 개관 전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기도 했다.
윤=진열장은 온도 및 습도 조절기도 없었고 전시에 필요한 시설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어요. 박물관 옥상 물탱크가 고장 나 전시 유물을 포장한 상자를 보관하던 창고에 물이 쏟아졌습니다. 유물 상자가 고인 물에 둥둥 떠다녔고 일부 회화가 물에 젖어 배접(유물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고정하는 것)을 다시 해야 했어요. 박물관은 건축 회사에 배상을 요구하고 절대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윤 전 교수에게 붙는 ‘최초’라는 수식어에는 박물관 유물 카드를 만든 것도 포함된다.
윤=1950년대 박물관의 문제 중 하나는 소장 유물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실사 파악이 안 돼 있었던 거죠. 다른 일을 제쳐두고 유물과 대장을 비교해 유물 형태와 특징을 정리한 카드를 서둘러 만들었습니다.
신=박물관 유물 관리 행정의 시초였습니다. 선생님이 만드신 유물 카드를 찾아보면 요즘과 달리 하나하나가 다 논문이어서 유물에 대한 정성과 안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윤 전 교수에게 박물관의 의미를 물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돈, 출세 욕심을 버린 사람들이 만드는 나라의 얼굴이지요.”
- 동아일보 2009.3.19 윤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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