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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건진 역사] <11> 태안선의 청자 바리때와 두꺼비모양 벼루

편집부

2007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충남 태안군 대섬 인근 해역에서 2만7000여점의 청자가 실려 있는 고려시대 선박(태안선) 1척을 발굴했다. 도자기에 묶여 있거나 옆에 놓여 있던 목간에는 전남 강진에서 개경에 있는 귀족과 하급 무관 등에게 도자기를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태안선이 도자기 운반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승려들의 식사용 그릇인 발우.
수만점에 이르는 수중 발굴 고려청자 중 대섬에서 최초로 발굴된 유물이 두 가지 있다. 청자로 만든 바리때와 두꺼비 모양의 벼루다.
바리때 또는 바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자로 발다라(鉢多羅), 발, 벌라, 발우라고도 하는데 인도의 옛 문자 산스크리트어의 ‘파트라(Patra)’를 음역한 것이다. 스님들이 식사 때 사용하는 그릇으로, 탁발을 하거나 부처님에게 제물을 바칠 때도 사용한다. 대개 3개 또는 4개의 크기가 다른 그릇으로 한 조를 이루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제일 큰 그릇 안에 작은 것들을 차곡차곡 포개 놓는다.
불교 계율에 의하면 승려는 철발(鐵鉢)과 와발(瓦鉢)만 사용할 수 있고, 석발(石鉢)은 부처님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철발은 금속으로 만든 것으로 충주 사뇌사터 출토 청동발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와발은 글자대로 해석하면 기와 재질인데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청자와 백자뿐 아니라 검은 색을 띠는 흑유자(기)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그동안 발굴된 도자기 발우는 한 조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단품으로만 남아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중에서 발굴된 도자기는 파손되지 않고 원래 모양 그대로인 유물들이 많은데, 태안선의 발우도 역시 그랬다. 태안선에는 3개가 한 조를 이루는 것 39조, 4개가 한 조를 이루는 것 8조가 실려 있었다. 바리때는 조별로 포개어져 수십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각 조 사이와 포개진 그릇 사이에는 짚을 넣어 운송 과정에서 깨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태안선 바리때에는 모란이나 국화 무늬를 음각으로 넣은 것과 간단하게 선만 판 것, 아예 무늬가 없는 것이 있는데 후자가 좀 더 많다. 원래 바리때에는 무늬를 안 새긴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청자를 빚은 흙과 유약 모두 상당히 질이 좋고, 무늬도 정성들여 새겼다. 또한 그릇 바닥은 굽이 없거나 속을 파낸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 포개서 보관하는 발우 특성에 맞춰 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태안선에 실린 바리때는 무슨 목적으로 운송되고 있었던 것일까.

◇청자 두꺼비 모양 벼루.
고려는 해마다 2월이면 연등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안녕을 빌기 위한 인왕도량이나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수도량 등 많은 불교의례가 있었다. 이런 대규모 행사에 수반되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행해지는 것 중의 하나가 반승(飯僧)이다.
반승이란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다. ‘고려사’에는 총 140여회의 반승 실행 사실이 적혀 있다. 국가 또는 왕실이 승려를 궁궐이나 지방의 여러 사원, 관청에 초대하였는데 최고 10만명(현종 9년, 1018년)에 이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개경 궁궐에 1만명, 각 지방에 2만명 규모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런데 반승은 반드시 국가나 왕실에서만 개설한 것은 아니다. 귀족들도 집안에 애경사가 있으면 많은 승려를 초청하여 반승을 하기도 했다.
한 번에 많은 승려에게 반승을 하기 위해서는 승려 수만큼 발우가 필요하다. 참가한 승려가 자신의 바리때를 지참하고 참석했을 수도 있지만, 승려를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양질의 도자기 바리때를 준비해 여기에 식사를 대접하고 때로는 마친 후 바리때를 선물로 줬을 수도 있다.
태안선에 실린 발우는 반승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사원에 희사하기 위해서 혹은 판매하기 위한 물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태안선에는 나무막대에 글을 적어 도자기 화물표로 사용했는데, 발송지는 탐진이고 수취인은 개경에 있는 3품의 고위 관료부터 하급무반, 관직이 없는 사람 등 다양하다. 물론 태안선에 실린 모든 도자기가 이들에게 전달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어 그 대략적인 면은 파악할 수 있다. 바리때는 세 가지 유통 경로를 가정할 수 있다. 첫째는 고위 관료가 개인적으로 반승용이나 희사품으로 주문 생산한 것, 둘째 수취인이 사원이나 승려에게 판매하기 위해 주문한 것, 세 번째는 국가나 사원에 세금으로 바치기 위해 운송하던 도중 침몰한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함께 발굴된 다른 도자기와의 연관성이나 고려시대 유통의 실제 등은 꾸준히 연구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바리때와 더불어 태안선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유물이 있다. 바로 청자 두꺼비 모양의 벼루다. 흔히 벼루라고 하면 사각형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벼루의 형태가 하나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다양한 모양과 재질로 만들어져 사용된 것이다.
두꺼비 모양 벼루는 전체에 걸쳐 검은 점과 흰 점이 여러 개 나타나는데, 이는 두꺼비 피부 융기를 표현한 것이다. 벼루가 처음 나왔을 때 발굴팀은 개구리와 두꺼비 모양 중 어느 것인가를 놓고 즐거운 논쟁을 벌였는데 결국은 반점 때문에 두꺼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꺼비는 고개는 약간 위로 들고 손과 발은 웅크리고 있다. 눈동자는 하얀 흙으로 바탕을 만든 후 검은색이 나는 안료를 사용하여 매우 선명하게 그렸으며, 주변에는 음각 선을 둘러 툭 튀어 나온 눈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가는 선으로 물결무늬처럼 새긴 입은 두툼한 입술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또렷하고도 순진한 눈매와 함께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등은 파내서 먹을 갈 수 있는 연당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유약을 바르지 않았으며 머리 쪽으로 기울게 경사를 만들어, 먹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했다. 벼루의 기능을 충실히 발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꼬리 쪽에는 음각으로 둥근 원을 여러 개 새겨놓았다. 두꺼비 알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먹물에 붓을 적신 후 양을 조절하기 위해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사각형의 검은 벼루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청자 두꺼비 모양 벼루는 뒤집어 보면 속이 텅 비어 있다.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한 것이다.

벼루는 높이 7㎝, 길이 14㎝로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 잡기에 적당한 크기다.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는 이 벼루가 휴대용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휴대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입체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또 다른 보호도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고려시대 문인들은 옆에 두고 쓰는 물건들을 보고 시를 짓곤 하였다. 문방사우가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기르던 화초나 애완동물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다. 청자 두꺼비 모양 벼루를 옆에 둔 이는 과연 어떤 시를 지었을까. 천진한 눈빛과 해학적인 표정을 보며 입가에 빙긋 미소 한 번 짓고 밝고 경쾌한 시 한 수 읊지 않았을까.
 

임경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 세계일보, 2010. 9. 15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00914003745&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050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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