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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임 / 과도기적인 시공간에서

이선영

과도기적인 시공간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최성임의 ‘24’ 전이 열린 성북동의 ‘미아리 고개 하부공간’은 미아리와 사람과 도로를 합친 ‘미인도’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그곳은 고가도로 아래의 쓰레기장으로 방치된 공간이었다가 텃밭이나 벼룩시장, 영화상영, 원탁회의 등이 열리는 지역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탄생했는데, 여기에서의 현대 미술전시는 최성임이 처음이다. 지하철역과 대학가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5분여를 걸어가면 허름하고 음습한 점집, 철학원, 안마원 등이 즐비한 거리를 통과해야 한다. 미아리 고개 하부공간은 얼마 전 주민 또는 관객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바깥의 공간이다. 자신이 붙박혀 있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예술이든 공동체든 쉽지 않은 일이다. 근 몇 년 간 최성임의 작품이 발표된 장소들을 보면, 전시가 순조롭게 열리기 쉽지 않은 곳들이 많았는데, 하다하다 이제 다리 밑까지 왔다. 




미아리고개 하부공간_바깥전경



미아리고개 하부공간_바깥전경_밤



최성임에게 예술은 자신이 맞딱뜨린 일상 저편에 존재하는 순수의 결정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선택한 전시장들은 대부분 작품을 가져놓기만 하면 되는 한 점 티끌 없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자리는 현실 속에서 애써 만들어져야 했다. 작업의 시간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만큼이나 작품이 공간까지 변화시킬 수 있어야 했다. 미아래 고개 하부공간에서 최성임의 작품은 작품 그자체라기 보다는 어떤 가교로서 기능했다. 작품은 어떤 것과 어떤 것의 가교라는 점에서 관계적이지, 그 자체가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적인 작품은 과정을 중시한다. 만드는 것 뿐 아니라 관람 과정 또한 그렇다. 그곳은 작품의 진의를 한 번에 꿰어 찰 수 있는 결정적 시공간이 부재하다. 머무르다가 어슬렁거렸다 하면서 시시각각의 변화를 체험해야 한다. 관계적인 것은 예술을 둘러싼 많은 항을 끌어들이며 예술에 대한 규정자체를 변화시킨다. 


최성임의 작업은 작품(work)이기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을 엮어서 짜놓은 텍스트(text)이다. 작품보다 결정적이지 않은 텍스트는 수시로 중단되는 작업을 수시로 다시 연결시킨다. 작가는 몇 년 전에 이미 이 전시의 [황금 방]에 어울릴 만한 황금이불을 발표한 바 있다. 평면위에 그려졌던 고랑들은 이번 전시에서 공간 속에 그려졌다. 이번전시가 열리는 곳은 지역문화재단 산하에 속해 있으며 이미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장소였지만, 작품을 들어앉히기 위해 해야 했던 사전 작업은 많았다. 황동 구슬로 엮인 발 뒤에 숨겨져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비품들이 작업이전의 노동량을 알려준다. 예술 작업이란 언제나 노동 이후에 오는 것이다. 노동이 몰입의 과정을 거쳐 양질전화를 한 것이 바로 작업이다. 최성임에게 주어진 공간은 작품에 앞서는 새로운 도전의 대상이었고, 점 차 작품이 공간과 하나가 되는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으로 변화해 갔다. 




24 展 전경



황금 방_MDF, 금박작업_298.5x276x36cm_2016



이번 전시가 이루어진 곳은 지상으로부터 비상하기 위해 점차 각도를 높여가는 차도 아래의 공간이다. 어떤 비상은 오랫동안 지상을 달려야 가능한 것도 있다. 예술작업은 영원히 달리기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준다. 그래서 대부분 비상하기 전에 달리다 멈춘다. 미아리고개 하부공간은 지상 같으면서도 지하 같고, 열려있으면서 닫혀있고, 바깥이면서 안인 모호한 공간성을 가진다. 난해한 공간이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있다. 최성임은 고가도로 아래의 어둡고 차가운 공간에 황금빛의 따사로운 기운이 감도는 방을 만들어 놨다. 작품 [황금 방]은 전시공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이는 금박으로 뒤덮인 작은 자리이다. 2.8x2.8m 크기의 작은 방으로 안으로 60cm 파인, 구들장으로 덮여있어야 할 것 같은 오목한 공간은 빛으로 화한 비물질적 원소들로 채워졌다. [황금 방]은 빛이 고여 있는 연못같기도 하다. 


완전히 붙여지지 않아 가장자리가 나풀거리는 금박은 고가 밑으로 몰려들어오는 모든 진동과 소음, 먼지와 반응하고 있었다. 금 함량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공간 일부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금박은 동남아의 불교국가에서 기복의 의미로 부처님 상 등에 붙이는 금박을 연상시킨다. 점집이 많은 그 동네의 맥락에서 보자면 부적같이도 보인다. 거기에는 덮여진 표면만큼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있다. 주술은 이러한 기원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날 것의 적나라함이 가다듬어진 교리나 제도로 승화된 것이 종교일 것이다. 근대의 산물인 예술은 주술이나 예술적 사고를 개체발생적으로 반복한다. 2인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2평 크기의 방은 다른 부분과 달리 원래의 시멘트벽이 남아 있어서 더 거칠고 남루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화려한 변신이 가능했다. 천정의 켜지지 않는 가로등은 이곳이 바깥이었음을 증거한다. 




황금 방_MDF, 금박작업_298.5x276x36cm_2016_부분



다섯 개의 고랑_황동 볼 체인_가변설치_2016



[황금 방]은 예술에 대한 현실의 저항을 역으로 이용해온 작가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그렇게 하는 또는 해야만 하는 이유는 ‘내 일상에서 예술이 가능한가’를 매순간 물어야 하는 생활인이자 작가이기 때문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드문드문 찾아오는 공적인 전시 기회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계기이다. 이러한 확인이 이후의 긴 일상을 버티게 해준다. 동시에 그 일상은 작업의 바탕이 된다. 살아남아야 작업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일상자체가 작품의 견인차가 된다. 빵 봉지를 묶는 금색 끈이나 볼풀공 같이 뜻밖의 물건들이 작품 소재로 발견되는 곳도 일상이다. 최성임의 작품에서 많이 등장하는 반복과 차이라는 방식이 바로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작품에는 일상적 반복의 흔적이 있으며, 이러한 반복은 어떤 지점에서 차이로 고양된다. 반복이 없다면 차이도 없다. 


고가 밑의 진동과 소음이 아니라면, 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아니라면, 즉 전시장소로서의 극도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그러한 방해 요소가 없었다면, 관객은 [황금 방]의 나풀나풀하고 찬란한 빛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작품 [황금 방]에서 우리를 묵직하게 잡아당기는 삶의 자리는 그 무게를 덜어내고 순간의 빛으로 화한다. 채워지기 위해 비워놓은 그 방에서 순간은 영원이 된다. 또는 영원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아리 고개 하부공간에서 [황금 방]과 댓구를 이루는 작품은 [hollow tree]이다. 속이 빈 24개의 나무들은 움푹 껴져 있는 방에 상응한다. 미아리 하부공간을 받치고 있는 진짜 기둥은 공간 리노베이션에 의해 하얀 분칠이 되어있다. 아크릴로 만들어져 반투명한 공동(空洞)의 기둥들은 하얗게 칠해진 진짜 기둥의 메아리처럼 보인다. 그것은 실제의 지지체가 아니라, 그 시뮬라크르이다. 




Hollow Tree_아크릴, LED, 황동_가변설치_2016



Hollow Tree_아크릴, LED, 황동_가변설치_2016



그림자_벽에 연필 드로잉_가변설치_2016



여러 개로 복제되어 있는 듯한 양상이며, 하나의 복제물 안에도 여러 겹의 층위가 발견된다. 이 가짜 기둥들은 나무의 상징이 그러하듯이 아래와 위를 연결한다. 그리고 여기와 저기를 연결한다. 연결이란 개념은 WWW 시대에 익숙하지만, 본래 마술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이다. 시멘트벽을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계몽적 과학이 이미 몰아냈던 연금술적 사고이다. 과학의 역사는 최후의 연금술사가 최초의 근대 과학자였음을 보여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뉴턴 같은 부류가 그들이다. 중세와 근대를 연결 짓는 시점에서 연금술은 그자체로는 돌을 금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 모색의 과정 속에서 금보다 더 귀중한 것들을 발견하게 했다. 예술 또한 그렇지 않을까. 예술은 열매가 아니라 열매를 예기하는 꽃이다. 그자체로는 쓸모가 없지만 더 큰 쓸모를 위한 싹이다. 확실성을 가능케 하는 불확실성이다. 현실성을 낳는 잠재성이다. 


연결이란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것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미아리 고개 하부 공간 여기저기에 드리워져 있는 황동 발도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킨다. 황동 구슬로 엮인 [다섯 개의 고랑]은 무엇인가를 가리면서 구별하는 역할도 하고, 연결하기도 한다. 고가 도로 아래를 말끔하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졌을 하얀색 가벽은 거기에 구멍을 뚫는 듯한 원들로 뒤덮였다. 원들은 특별한 중심 없이 표면을 표류한다. 현실에 난 구멍들은 현실 자체에 내재한 균열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내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그 구멍들을 보일 듯 말 듯 하게 희미하게 처리했다. 잘 안 보일까봐 따로 조명까지 마련했다. 작가는 외부적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모순으로 무너질 것들의 자리를 표시한 것이다. 하얀 가벽들은 원래의 장소성을 지우고 있었는데, 작가는 지운 것을 다시 지워서 하얀 가벽에 가려져 있던 우중충한 시멘트벽을 드러나게 했다. 




Hollow Tree_아크릴, LED, 황동_가변설치_2016_4



Hollow Tree_아크릴, LED, 황동_가변설치_2016_6



그것은 인테리어적 사고와 현대미술적 사고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공간은 여러 번 덧그려지며 화석이나 지층처럼 겹쳐진 층을 통해 드러난다. 작품은 또 다른 작품을 반향 하면서 관객을 여러 겹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상징적 우주 안에 위치시킨다. 작품 [그림자]에서 화이트 큐브를 흉내 내는 하얀 단편들은 황동 줄로 된 [다섯 개의 고랑]처럼 통과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얀 벽 하나에는 무채색 그라데이션이 깊은 구멍을 뚫어놓기도 했다. 그 블랙 홀같은 공간을 통과하면 황금 방이 나올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를 향한 여정에는 언제나 마법과도 같은 도약의 지점이 있다. [그림자]라는 제목을 가진 하얀 가벽 위의 원들은 비록 이미지로 이루어진 환영이지만, 연결이라는 미션을 가진다. 이 황동 구슬 발은 미아리의 점집들처럼, 주술적 분위기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상징적 문턱으로 다가온다. 이 문턱은 [황금 방]과 마찬가지로 미묘하게 흔들린다. 


황동 줄이 위에서 내려온다면 아크릴 기둥은 아래서 올라간다. 그러나 아래에서 시작되든 위에서 시작되든 끝이 닿지는 않는다. 구분되는 항목 사이의 연결은 언제나 마지막 한 두 뼘을 남겨놓는다. 그 한 두 뼘이 채워지는 순간을 위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이 황량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결정적인 순간은 맥락을 요구하고, 맥락은 가속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속화는 추상을 요구하며 심미적 체험이라는 밀도 높은 상태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고양이나 승화라고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넓은 공간에 드문드문 걸쳐 있는 최성임의 작품은 미시세계의 운동을 보여줄 수 있는 거대한 입자가속기 같은 장치로 다가온다. 황동 줄처럼 기둥들도 가리면서 보인다. 완전히 말소되는 것은 없다. [황금 방]처럼 금속으로 밀봉된 것 같은 작품도 바닥의 질감을 드러낸다. 이러한 ‘말소 하에 둠’(데리다)은 현대의 관계적/해체적 사고에 전형적이다. 




최성임_설치사진



2m 40cm 높이의 투명한 아크릴 기둥에 황동판과 조명이 있는 기둥은 원과 타원같은 우주적 궤도를 떠올리는 선들이 보인다. 원소, 혹은 행성의 궤도들을 품은 기둥은 위와 아래 뿐 아니라, 끝과 끝이 연결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연결이 없다면 예술이라는 가속장치는 소모적이고 비극적일 것이다. 물리적인 의미의 받침대가 될 수 없는 이 기둥/나무들은 [황금 방]이나 [다섯 개의 고랑]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진동에 반응하면서 미세하게 흔들린다. 흔들림은 약함이지만 동시에 강함이다. 이러한 흔들림으로 인해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토대라는 것이 점차 불안정해지는 현대에서는 흔들다리에서의 균형 잡기 같은 감각이 필요하다. 이 빈 기둥은 실제 나무들이 그러하듯 또 다른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집처럼 타자를 품고 있다. 인공적인 나무/기둥은 산재하면서 이 공간을 우주적 질서를 반향 하는 소우주로 변화시킨다. 


공간에 산재한 24개의 기둥에서 12개만 조명이 있다. 거기에는 12나 24에 얽힌 우주적 상징이 깔려 있다. 전시부제 ‘24’는 좀 더 있어 보이는 지역 명으로 개명을 기다리는 ‘미아리 고개’에서의 어떤 시간주기를 암시한다. 2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작품 [Hollow Tree] 뿐 아니라 전시부제인 ‘24’도 상징적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반복되는 24시간, 24절기, 낮과 밤의 길이, 12개의 해와 12개의 달, 계속 이어지는 역사, 질서에 대한 것’이다. 전시제목 ‘24’는 ‘상부와 하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가 사라지는 장소, 낮과 밤, 빛과 그림자가 합쳐지고 사라지는 새로운 시간으로의 방향’을 은유한다. ‘24개, 24시간, 24절기의 끝이기도 한, 그래서 0 에서 시작 가능한 24’ 이다. 숫자에 내재된 상징은 마치 수비학(Numerology)의 상상력처럼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확장된다.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환원된다. 24는 이 상징적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 숫자이다. 전시장소 근처에 있는 점집들이나 전시 즈음에 터진 대형 정치스캔들은 이러한 마술적 세계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최성임_포스터_앞면이미지



포스터_뒷면이미지



심지어 계몽이전의 것들은 계몽을 통해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황금 방] 자체가 일상을 마술처럼 변화시킨 기술이며, 작품 곳곳에는 구별되는 것 사이의 기적적인 연결을 바라는 염원이 발견된다. 작가는 앞뒤를 다 끊고 24라는 중성적 기호만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24가 우리의 생활과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열어둔 것이다. 오토 베츠는 [숫자의 비밀]에서 많은 고대 문화에서 숫자 12는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라고 전한다. 12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숫자로 간주된 것은 사람들이 일 년 중 태양의 운행 경로를 12 지역을 거친 도정으로서 묘사했기 때문이다. 즉 한해를 12개로 나눈 것. 이미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최초로 12개의 달이 모여 한 해를 구성한다는 계산법을 만들어 냈다. 낮 역시 12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 즉 12시간으로 나누어지고 밤도 낮과 동일한 시간을 갖는다. 이것과 관련하여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야간주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낮을 불러오는데 12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숫자의 비밀]에 의하면, 24 역시 수 천 년 전부터 숫자 천체 신화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12궁의 남과 북에 위치한 24개의 성좌를 신으로 인식하고 이를 숭배했으며, 이란의 종교는 24명의 신적인 존재로 구성된 신성한 궁전의 성스러운 신료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12의 배수로서 24라는 숫자는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 숫자이다. 현대인에게 24는 특히 낮과 밤의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고대 사람들은 시간을 두 시간 단위로 세었고, 그 때문에 밤과 낮의 시간을 모두 합쳐도 12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만물의 기본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는 천구가 2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숫자 신비주의와 우주론적 세계관찰의 방법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래의 상징주의 외에, 현대인에게 친숙해진 또 다른 24도 있을 것이다. 가령 (재)개발 되어 화려하게 꾸며진 장소들에는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다. 투자 금을 빠른 시간 안에 뽑아야 한다는 현대적 강박 관념이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우주적 위치를 차지하는 24를 소름끼치도록 피로한 것으로 하락시켰다. 



다섯 개의 고랑_황동 볼 체인_가변설치_2016



그러한 24에는 시공간이 갱신될 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아리 고개 하부공간의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작품 [Hollow Tree]에서 24개의 기둥 중에서 12개에 조명이 없는 것은 똑같은 24개가 아니라, 다른 12개의 또 다른 12개와의 연결을 말한다.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연결이다. 차이의 연결은 모두 같은 길을 같은 방식으로 가려하기에 꽉 막힌 여정에 돌파구를 마련한다. 작가가 구사하는 조형언어가 다 집약되어 있는 포스터는 여러 지점에서 이러한 연결망들이 발견된다. 꽉 차 있는 아래의 반구와 비어있는 반구는 맞대고 연결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별자리처럼 자리한다. 반구는 나날의 일상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밥그릇처럼도 보이고 하늘 아래의 대지 같기도 하다. 예술과 생활의 차이는 어떠한가. 예술은 일상의 기계적 반복과 (재)생산으로부터의 벗어나게 하는 삶의 선물이다. 이 뜻밖의 선물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을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이들이 더 많더라도 말이다. 미아리 고개 하부 공간 같은 특수한 장소는 예술가로서는 애증에 찬 대중들을 만날 수 있는 극적인 시험대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도 제도적 예술의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공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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