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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실 / 부침(浮沈)을 지속하는 기억의 층

이선영

부침(浮沈)을 지속하는 기억의 층

  

이선영(미술평론가)

  

다양한 계열의 무채색 톤 화면에 짧은 점선들이 마치 글자들처럼 배열되어 있는 최현실의 작품은 종이 위에 써진 기록의 흔적들처럼 보인다. 그녀의 작품에서 써진 것은 지워진 것과 같은 위상을 가진다. 작품 속의 하얀 점선은 지워진 자국들이기도 하다. 새로이 써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지워져야 한다. 기록 또는 기억의 공간은 무한대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화면은 그렇게 써지고 지워지고, 전경화/ 후경화 되는 다양한 층으로 나타난다. ‘기억의 층’이라는 전시 부제는 기억이 가지는 불연속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기억은 연속적으로 재현될 수 없다. 거기에는 간극들이 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켜켜이 쟁여진 것들은 어떤 힘을 받아 단층화 되고 그 틈으로 심층의 것들이 용출되기도 하며, 순서가 역전되기도 한다. 시간에 따라 쌓여진 일련의 순서를 휘젓는 것은 무의식적인 힘이다. 무의식은 의식에서 잊혀졌던 것들을 또 다른 층에 보유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떠오르게 한다. 




최현실_ Memory no.7_ Charcoal on paper_ 105.5X75.5cm_ 2016 .



최현실_Unfamiliar+Memory+no.1_+Charcoal+on+paper_+105.5X75.5cm(4EA)_+2016



억압된 기억의 회복을 환자의 치유와 연결 짓는 정신분석학에서는 뜻하지 않는 순간을 드러내기 위한 대화와 해석의 기술을 발전시키곤 한다. 정신분석학의 그러한 목표는 새로움과 이질성을 추구하는 예술과 공유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경에서 진행되는 드라마의 바탕을 이루는 공간은 심연처럼 모호하다. 그것은 의식의 단편들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공간이다. 밑에서 올라온 것들은 표면 위에 잠시 떠 있다가 다시 흐트러진다. 점선들을 모아 놓고 있는 외곽선은 여럿으로 불어나고 점선들은 더 이상 하나의 표면에 가두어지지 않으며, 다시 입자가 되어 가라앉는다. 문자열처럼 배열된 것들이 흩어져 안팎의 밀도가 같아지면 의미는 무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도 다시금 전열을 정비하면 의미화 될 것이다. 최현실의 작품에서 의미/무의미는 엔트로피의 차이로 나타난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자기 항상성을 지켜 나가되, 외부와 완전한 단절을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의 특징이다. 의미든 생명이든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면서도 연결하는 경계가 중요하다. 


진하게 칠해진 선과 면은 손으로 문대는 작업을 통해서 주변으로 번져나가는 최현실의 작품에서 경계는 모호하다. 최초의 의미도 그와 함께 기화된다. 의미는 코드화를 통해서 투명하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접해진 것들 간의 전염, 또는 오염을 통해서이다. 전염 또는 오염은 이질적인 것이 전파되는 과정을 말한다. 하나로 자신 있게 그어지지 못한 외곽선은 잠시의 머무름만을 가능하게 할 뿐, 곧 이어질 시간의 작용을 수용한다. 그것들은 또 다른 배열을 이루어 표면화될 것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형상들은 추상적이지만 원근감을 형성한다. 크기가 작은 것은 멀리에 또는 심층에 있는 것이고, 크기가 큰 것은 가까이에 또는 표층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리즈처럼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는 작품들은 자리의 가변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실제적이고(이전 작품에서), 그리고 잠재적인(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중층적인 공간은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전시장에는 이러한 역동적인 화면들 여럿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최현실_Unfamiliar+Memory+no.2_Charcoal+on+paper_+75.5X105.5cm_+2016+



최현실_Unfamiliar+Memory+no.5_+Charcoal+on+paper_+75.5X105.5cm_+2016+



최현실_Unfamiliar+Memory+no.2_+Charcoal+on+paper_+75.5X105.5cm_+2016+



각 화면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움직임은 작품들 간에도 반복된다. 붙여놓으면 하나의 화면이 될 것 같은 형상들도 있다. 기하학적 형상과 그 변형들, 원시시대의 토기 같은 형상은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그러나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수용기(受容器)이다. 인터페이스와 비교하자면 창속의 또 다른 창 같은 모습이다. 종이 위에 만들어진 창속의 창들은 인터페이스와는 달리—알라이다 아스만이 [기억의 공간]에서 지속과 소멸, 기록과 저장의 관계가 새로운 전자 기술적 저장매체의 조건 하에서는 달라지고 있다고 했듯이—그 흔적을 남긴다. 한 장, 또는 여러 장의 작품이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최현실의 작품 목록에는 긴 두루마리 형식도 존재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긴 종이 두루마리에 펜으로 찍은 점선들은 글자처럼 보이지만 글자가 아니다. 설치작품으로 표현된 두루마리들은 전시 날짜가 다가오면서 생겨난 정신적 압박을 이기기 위해 찍은 점들이며 생각과 말을 없애기 위한, 즉 생각과 말 때문에 굳어진 손을 풀기 위한 수행적 결과물이다. 마치 꿰어놓은 구슬이나 말줄임표처럼 보이는 그것은 침묵을 통해 말한다. 


거친 질감의 종이에 하얀 오일바로 그려진 작품은 마치 하얀 눈밭의 하얀 토끼처럼 배경/형태 사이의 지각을 그 한계치까지 실험한다. 형태는 배경과 구분된 채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하얀색 드로잉들도 회색/검정 드로잉들과 마찬가지로 형상들의 위치와 크기에 따라 나타남/사라짐, 떠오름/가라앉음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부조적인 물질감이 두드러진다. 시각이 무장 해제된 순간, 보다 원초적인 감각인 촉각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하얀 드로잉들은 회색/검정 드로잉처럼 손으로 문대서 밀도와 명도의 차이보다는, 거칠거칠한 종이 표면 위에 착 달라붙는 하얀 오일바의 촉감이 두드러진다. 종이에 따라 같은 오일바의 색도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차이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색의 특성을 보여준다. 또한 하얀 오일바는 필기구 중에 ‘화이트’(지우개)를 연상시키면서 그리기 또는 쓰기와 지우기의 밀접한 관계를 알려준다.   




최현실_Unfamiliar+Memory+no.4_Charcoal+on+paper_+75.5X105.5cm(2EA)_+2016+



요즘의 목탄과 오일바 드로잉은 10년 가까이 해온 오리기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무틀을 덮은 한지표면을 오려서 겹겹이 쌓아 중층적 표면을 드러낸 이전 작품들이 해체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여러 겹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던 것을 한 장 한 장에 압축하여 7미터 높이를 가지는 전시장에 [메모리 스페이스]로 펼쳐놓는다. 점선이라는 조형적 요소와 글자의 유사성, 그리고 그것들내 내재된 종횡의 움직임이 ‘기억의 층’을 표현하는 최현실의 작품은 기록과 기억, 특히 무의식적 기억과의 관련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기억과 기록의 관계를 ‘신기한 글쓰기 판’(Wunderblock, mystic writing-pad)으로 비유한 바 있다. 이 글쓰기 판은 아이들의 교육용 장난감의 하나로, 밀랍판 위에 들출 수 있는 종이를 붙여놓은 것을 말한다. 종이 위에 무엇인가 쓰면 밀랍과 붙어 글자가 나타나지만, 종이를 들어 올리면 글자는 사라지지만, 그 흔적들이 밀랍 판에는 남아 있다.


반복된 글쓰기에 필요한 기재공간은 의식/무의식과 비교될 수 있는 이 두 층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 최현실의 작품에서 깨알 같은 글자나 말줄임표를 떠올리는 점선들은 글쓰기에 차이의 메커니즘이 있음을 알려준다. 글쓰기는 언제나 다른 공간을 요구해왔다. 뿐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차이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이 관계를 탐구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프로이트의 글쓰기 판을 인용한다. 표면과의 관계에 있는 표면의 층인 글쓰기 판은 새것처럼 깨끗해지고 다시금 수용 준비가 된다. 그러나 글의 지속적인 흔적이 밀랍판 위에 유지되고 있어서 적정 조명 속에서는 읽혀진다. 데리다는 밀랍 판이 사실상 무의식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교대로 글이 지워졌다고 보이게 되었다가 하는 것은, 지각 속에서의 의식의 나타남과 스러짐에 비견된다는 것이다. 쓰기와 지우기의 반복되는 주기가 지속적인 기재 공간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최현실의 ‘기억의 층’도 마찬가지다.





Beomeo Creative Studio 2016


그녀의 이전 작품에서 오려진 여러 겹의 층들이나 이번 전시에서 공간에 펼쳐 붙여진 종이들은 층의 관계를 통해서 기억과 기록,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를 말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다. 그 층들은 고고학의 대상처럼 발굴되고 해석되기를 기다린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고고학자의 과제는 과거 생활의 증거와 무의식에 깊숙이 박혀 있는 충격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본다. 공간화 된 시간의 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실천은 역사적 연속성이 아니라, 과거의 미완결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은 미래로까지 연장된다. 최현실의 작품에서도 끝없이 부침(浮沈)하는 기억의 층은 매번 새로운 조합을 통해 다른 이야기로 탄생한다. 기억의 층은 꽉 짜여진 인과론적 총체가 아니라, 느슨한 집합이다. 이 집합은 끊임없이 변형되는 전체를 이룬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총체와 전체를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전체를 끊임없는 변형으로 직관할 수 있을 뿐이다. 비선형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 과학자들이 베르그송에 매혹된 것은 그가 총체성보다 전체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전체는 과학이 그려내는 물리적 세계의 이미지에 시간을 재도입하여 진화를 이미 존재했던 것의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지속적 창조로 기술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발전을 사전에 결정된 목표 및 그 산물과 무관하게 파악한다. 무엇보다도 전체는 각각 다르게 산재될 질서, 층위, 거리를 지닌 현상들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한다. 이전의 오리기 작업을 생각하면, 점선들은 글자뿐 아니라 접거나 오려 내야할 점선들로도 보인다. 접거나 오리기 작업은 뜻밖의 조합과 분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기억 역시 이성이나 의식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 기성의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것을 생성해야 하는 작업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 기억이다. 




최현실_+Untitled_+Oil+stick+on+paper_+105.5X75.5cm_+2016++(2)



최현실_+Untitled_+Oil+stick+on+paper_+105.5X75.5cm_+2016+



최현실_ Untitled_ Oil stick on paper_ 105.5X75.5cm_ 2016  (3)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프루스트에게 무의지적(또는 무의식적) 기억은 조정되고 통제되는 정신활동의 의도된 결과가 아니다. 그 기억들은 현재의 감각이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갑작스러운 연상 작용과 인상을 통해 상기시켜 주는 알기 어려운 깨달음의 순간에서 흘러나온다. 프로이트의 ‘신기한 글쓰기 판’과 비교할 수 있는 ‘기억의 층’은 수없이 새롭게 만들어진 기재 공간 이면에 내재된 또 다른 판의 존재를 말한다. 이 판에 남아있는 기록, 즉 기억의 흔적들은 미지의 기록/기억으로 떠오를 순간을 기다린다. 최현실의 작품은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잠재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기억의 층’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탄다. 지워지지 않으면 써질 수 없는 기억의 메커니즘은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는 것, 해체되지 않으면 구성될 수 없음을 예시한다. 


그러나 이전의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원자들이 재조합되어 새로운 원자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초의 순수한 결정체는 없다. 그 의미가 완전히 보존되고 전달될 대작도 없다. 무엇보다도 먼 후대까지 그 투명성을 담보할 기호의 체계는 없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기억 또한 최초의 출발을 가지지 않는다. 가령 후기의 프로이트는 전기의 프로이트와 다르게, 기억의 환상성을 강조한다. 최초의 확실함이 추후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사건 역시 환상적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쥬앙 다비드 나지오는 [히스테리의 정신분석]에서, 초기의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의 어린 시절에는 외상(trauma)적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기에 프로이트는 그 외상은 더 이상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왜곡이라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가해진 공격으로서의 외상이 아니라, 그러한 공격이 남긴 심적 흔적, 즉 환상적 차원이다. 



최현실_ Untitled_ Hanji in a wooden frame_ 91X41X3cm_ 2016



최현실_ Untitled_ Hanji in a wooden frame_ 91X41X3cm_ 2016



최현실의 작품 속 기억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작가가 표현하는 것은 특정 날자와 시간을 지정할 수 있는 어떤 사건의 물리적 자연성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자아의 표면에 찍힌 자국이다. 그것은 최현실의 작품 목록에도 있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부친 우편물들에 반복적으로 찍힌 인장들과도 같은 것이다. 글자나 말줄임표에 해당되는 점선들은 이 심리적 흔적을 떠올린다. 그래서 ‘기억의 층’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기억할만한 사건의 표상이 아니라, 사건과 관련된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매순간 다시 헤쳐모여 다른 형상을 만드는 입자들은 허구로 구성되어 있는 환상인 것이다. 물론 환상이 아닌 기억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기억은 외상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반드시 환상의 세계 속에 등록되어’(프로이트) 있다. 수행과도 다를 바 없는 최현실의 작업은 침묵 속의 기억들이 현현(epiphany)될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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