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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경 / 살아있는 폐허

이선영

살아있는 폐허

  

이선영(미술평론가)

  

오랜 세월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생적인 변화가 아니라, 어디에서인가의 결정에 의해 도시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곳에서는 구도심과 새로운 도심의 차이가 크다. 자연과의 게임보다는 인간과의 게임이 중요한 작은 땅덩이의 나라에서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개발이 항시적이다. 때로는 그 누구에도 도움이 안 되는 개발을 위한 개발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개발지상주의 국가 한국에는 구도심과 신도심의 명암이 갈리는 곳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지방의 군소도시에서 작업하고 있는 박정경의 작품에는 개발의 명암이 반영되어 있다. 신도심이 아직 자리를 잡지 않은 경우에는 구도심만큼이나 유령 같은 분위기가 있지만, 모두가 떠난, 또는 곧 떠날 구도심에 깔려 있는 정서는 더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예술은 그러한 삭막한 곳에서, 그러나 삶의 본 모습과는 더욱 가까운 곳에서 삶의 풍경을 읽어낸다. 예술적 아름다움은 가증스러운 꾸밈이 아니라,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의 진실과 관련된다. 




발견_Tonight, 108*73cm, 종이에 오일, 2016


질척한 모노톤의 작품은 지나간 흑백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우수가 서려 있으며, 지금 여기의 풍경은 저 멀리 사라지는 원근법을 따라 곧 사라질 것 같다. 다소간 급격한 원근법은 회화작업 전에 사진이라는 매개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드로잉에 바탕 하는 작업, 특히 작은 작업들이 집합된 장면들은 그 오래된 풍경들을 더욱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만든다.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레지던시에서 ‘지금 여기의 군산’이라는 부제로 열리는 전시에서 박정경의 작품은 창작공간이 있는 군산을 중심으로, 군산 인근의 전주 풍경까지 아우른다. 변두리 지역에서 실행되는 예술프로그램은 예술가의 눈으로 그 지역의 풍취를 기록하게 하면서 그 지역의 문화적 재생 가능성을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4월 전주에서 군산으로 작업공간이 바뀐 작가에게 군산은 우선 발견의 대상이었다. 전국의 작업실을 유목하다시피 하는 젊은 작가에게 매번 자신이 놓이게 되는 자리는 발견의 대상이며, 그 결과물인 작품은 자신의 발견을 타자와 나누는 장이다. 


그 발견은 혼자, 또는 누군가와의 동행이었으며, 작품에는 그 여정을 증거 하는 길, 특히 골목길들이 많이 등장한다. 풍경은 대부분 골목 이편에서 저편으로 다가가는 시점이다. 소실점의 끝은 매우 어둡고,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지도 불투명하다. 미지의 곳에 던져진 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낡고 오래된 풍경을 갱신한다. 박정경은 군산의 본모습을 낮보다는 밤에서 더 많이 발견한다. 밤은 꿈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결속시킨다. 가령 작품 [군산항]에서 화면 왼쪽은 바다, 그 위의 검은 하늘, 그 옆의 불 꺼진 건물들의 조합은 불야성의 도시에 익숙한 시점에서 보면 어둠의 연속이다. 어둠은 시선을 빼앗고 있는 세속적 환영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음과 동시에,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과 집 등에 연속성을 부여한다. 계몽과 이성의 빛이 가물가물해진 곳에서 삶과 꿈이 구별되지 않는 풍경이 놓여있다. 




이상한 낮, 모르는 밤_군산항, 27*40cm, 종이에 오일, 2016



이상한 낮, 모르는 밤_9, 27*40cm, 종이에 오일, 2016



빛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빛은 활성화된 도시가 그렇듯이 연속적이지 않다. 인적 없는 골목길을 지키고 있는 가로등은 부재의 자리를 더욱 강조할 뿐이다. 화면의 전경을 비추는 빛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퇴장한 연극무대의 조명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그것은 비어있음의 충만함을 표현한다. 군산 이전에 있던 곳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전인구의 50% 이상이 몰려 살고 있다는 수도권 이외의 곳은 거의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도권은 방치되는 기간이 좀 짧은 반면 지방은 길다. 땅도 넓지 않은 나라에서 사람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수준의 장기간의 방치가 일어나는 이유는 부동산 개발의 신화와 정책의 불확실성이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에 의해 이미 완성되어 있는 미래에 대한 각광이 지금 여기를 블랙홀로 만든다. 바깥의 존재인 예술가들은 누구도 자세히 살피지 않는 이러한 주변부에서 삶의 풍경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갔기에 더 적나라한 풍경이다. 이 풍경은 현재진행형이기보다는 다소간 회고적이고 고고학적인 시선으로 포착된다. 


여기에서 발견이란 언제나 재발견이다. 박정경의 작품의 경우 군산은 발견의, 청소년기에 10년을 보냈던 전주는 재발견의 장소다. 여기에서는 지각만큼이나 기억이 힘을 발휘한다. 작품 [멜랑콜리아]에는 빈 방과 카페 등 추억의 장소들과 거기에서 발견되는 부재의 흔적들이다. 작품 [중앙동 4가]에서 풍경은 전경부터 빛에 사라지려는 듯, 또는 지우개로 지워지려는 듯이 흐릿하다. 또 다른 [중앙동 4가]에서 건물로 추정되는 덩어리들이 도열은 질퍽한 질감으로 풍경의 여러 요소들을 감성으로 버무리는 특유의 필적이 있다. 차가웠던 장면은 예술적 열기로 인해 다시 뜨거워진다. 이 열기는 갈라진 것들을 붙여놓는다. 이 서로 다른 밀도와 명도로 얼룩진 덩어리들은 도시의 얼굴 뿐 아니라 작가의 감성을 드러낸다. 본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은 낯선 풍경들에는 두려움과 황홀함이 있다. 작품 [중앙동 4가]에 나타나듯이 깊숙한 원근법에 전경은 환하고 원경은 어두운 방식은 군산의 풍경과 비슷하다. 




drawing 시간들, 가변설치, 종이에 드로잉, 2016



drawing 시간들, 각각 12.5*18cm, 종이에 드로잉, 2016



그것은 두 장소를 보는 사람이 같으며 두 장소가 비슷하게 신/구도심의 명암을 공유하는 것과 관련된다. 드물게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 [가는 길]의 시점은 작가가 갔고, 관객도 그 동 선을 따라가게 하는 방향성이 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모습은 전경의 빈 바닥에서 둥 떠 있는 것이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유령의 거리를 유령들이 배회하는 것 같이 말이다. 경계를 넘는 존재인 유령은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한 과도기의 시공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drawing 시간들]이라고 제목을 붙인 작은 드로잉들은 장소의 이모저모를 담은 것들을 모아 놓는다. 단편들은 마치 그때그때 다르게 떨어졌을 낙엽을 한데 쓸어 담은 듯 복잡하다. 거기에는 그 장소를 포괄할 수 있는 총체적인 시점이 없다. 다만 부분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대작이 아니라 부스러기의 모음 같은 그것들은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총체보다 집합은 보다 열려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박정경에게 군산은 확고한 대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번 자신이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다시 그려져야 하는 지도처럼 나타난다. 


풍경의 원근감은 있지만 투시적이지는 않다. 거기는 광학적 시점이 아니라, 온 몸으로 통과하면서 알아가야 하는 곳이다. 유기적 전체라고 할 수 있는 총체적 시점이 부재한 것은 작업실 전경을 표현한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품 [작업실 1]은 작업실의 여러 부분을 그려서 붙인 것이다. 매일 다른 시간에 그린 다른 공간들이라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매일 같은 대상을 그려도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운데의 빈자리는 그 부분들을 보고 그렸을 작가의 자리일 것이다. 작품 [작업실 2]는 최소한의 관계성도 배제한 채 그려진 작업실의 여러 부분들이 거의 임의적으로 붙어있다. 빈곳도 있다. 공간체험인 지각과 마찬가지로 시간체험인 기억 역시 잃어버린 고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빈 부분 때문에 퍼즐 맞추기는 더욱 역동적이다. 작가는 옴싹달싹 할 수 없는 재현의 결정성 대신에, 조합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펼쳐질 수 있는 부분들 간의 놀이를 제안한다. 




중앙동 4, 107*147cm, 종이에 오일, 2016



중앙동 4, 104*144cm, 종이에 오일, 2016



뭉쳐있거나 비어있는 바깥풍경 역시 하나의 정조에 물들어 있지는 않다. 작품 속 군산의 구도심은 항구나 어시장 등, 예전의 활기가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폐허처럼 보인다. 분명 거기에도 아직 사람이 살고 있을 테지만, 어두운 모노톤의 풍경은 폐허 같은 면모를 강조한다. 지금 여기의 현실을 상대화시키는 폐허는 낭만이다. 그것은 생겨나는 모든 것은 스러진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이 생멸의 회로에 예술이나 예술가 또한 포함될 것이다. 그것이 박정경의 한 작품 제목처럼 ‘멜랑콜리아’를 낳게 할 것이다. 예술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히 소통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란 없다. 언어 역시 역사적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즐겨 묘사했듯이, 이때 문명과 역사는 자연화 된다. 붓터치가 역력히 남아있는 박정경의 풍경은 시간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시간성과 하나가된 몸의 현존을 강조한다. 듬성듬성 서 있는 나지막한 건물들은 잡풀과 뒤섞여 있으며, 건물들 간의 명백한 경계 또한 흐릿하다. 


여기에 안개와 바람 같은 기상적 조건이 가세한다. 작가는 군산의 날씨가 변화무쌍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발견의 대상이었던 군산은 낯설지만도 않은 곳이었다. 여기저기에서의 데자뷰 현상은 지각과 기억을 동시에 활성화시킨다. 30대 중반인 작가는 원래 고향이 강원도 태백시였는데 이곳에서 산 10세까지 그 도시는 급격히 쇠락했다. 거기를 떠난 시점인 90년대 중반에 이미 도시는 비어가고 있었으며 전학 가는 아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주에서 10년을 살았고, 서울에서 10년을 산 후, 다시 전주-군산에 간 작가에게 유령도시의 그림자는 떠나질 않는다. 계속 지방의 군소도시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대학을 포함한 학창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녔던 미술 대학의 위치를 생각건대, (재)개발의 광풍은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가리지 않는다. 군산만큼이나 복잡했을 아현동의 골목길은 이제 점령군처럼 조여 오는 고층아파트에 지워져 버렸을 것이다. 



노송동, 각각 36*51cm, 종이에 오일, 2016



여러 곳을 이주하며 살았던 작가의 이력은 낯섦에 익숙함이, 익숙함에 낯섦이 교차하게 한다. 특히 길은 여기와 저기, 지금과 그때를 이어준다. 길은 시간과 공간을 이어준다. 간만큼의 거리가 시간이며, 시간은 공간이동을 가능케 한다. 소실점 부근이 어둑한 길은 막다른 골목 같지만 계속 이어지는 구도심의 길을 암시한다. 그곳은 수직 수평의 좌표를 따라 투명하게 배열된 신도심의 길과 달리 미로처럼 이리저리 뚫려 있거나 막혀있으며, 처음 가본 이들은 거기에서 길을 잃을 법도 하다. 작가는 동네의 길을 중심으로 그리며, 작품 제목도 지명을 사용한다. ‘중앙동’처럼 역설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동네이름이 그대로 살려있다. 오래된 구멍가게에 남아있는, ‘근대’, ‘현대’라는 상호가 자아내는 느낌처럼, 특정 명명 행위에 남아있는 욕망이 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거나 드문드문 있는 동네에서 지형지물은 그곳을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기표가 된다. 


박정경의 작품은 그러한 지형지물마저도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져 꿈틀거린다. 어둠이나 눈이 덮일 때 덩어리의 느낌은 더 강조된다. 각이 정확히 맞지 않는 삐뚤빼뚤한 건물의 도열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폐허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제는 인적이 드물어진 곳에서의 잊혀진 이야기들은 시인과의 협업으로 풀어냈다. 시인 임주아와 함께 한 프로젝트 이름은 ‘이상한 낮, 모르는 밤’이 었는데, 이 제목은 이 두 젊은 예술가들이 즐겨 쏘다녔던 장소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낡고 거대한 놀이공원’으로 간주된 군산은 그들에게 설렘을 야기하는 미지의 장소로 다가왔다. 부산한 삶의 거품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그 다음 작업을 하는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그 다음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과도기에 존재한다. 다른 삶이 밀려오면 예술가는 다시 짐을 싸야할 것이다. 이러한 유목이 아니더라도, 원래 도시는 스펙터클하기 때문에 그자체가 탐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는길, 90*129cm, 종이에 연필, 젯소, 2016



가는길, 104*144cm, 종이에 오일, 2016



중앙동 4, 104*144cm, 종이에 오일, 2016



쇠락해 가고 있거나 폐허화 된 도시 역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거기에는 현대성의 흔적이 있다. 당시에는 새로웠지만 지금을 그렇지 않은 상황은 지금 절대적 가치로 신봉 받는 새로움의 위상을 상대화시킨다. 반대로 그것은 망각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롭게 보인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 있듯이, 과거는 새로울 수 있고, 미리 가불해서 써버린 미래는 이미 고갈되었을 수 있다.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낭비해 버린 자연이나 문화는 희귀한 것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지금 각광받는 새로움은 여기가 아닌 신도시에 있을 테지만, 그것이 낡아지는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소비사회는 어느 순간 소비를 위한 소비 또한 생산했다. 시간도 공간도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국내외 관광의 일반화로 가속화된 체험의 소비 또한 일그러진 변화를 야기했다. 유명하다고 해서 가보면 이미 익숙한 소비사회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식이다. 아방가르드의 신화가 생생했던 근대에 미래는 예술가의 몫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예술가는 흥행적 요소가 사그라져 버린 곳에서 새로운 자원을 발굴한다. 상업주의나 대중의 관심을 벗어난 장소는 예술가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이 된다. 넝마주의자처럼 버려진 것, 낡은 사물의 가능성을 발견한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최초의 시적인 고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체취는 사라져 버린 마을의 풍경은 깨어나길 기다리는 유적지 같다. 인적 없는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야트막한 건물들의 불 꺼진 창들은 그것들이 켜져서 따스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활발하게 움직였을 때를 떠오르게 할 것이다. 지금은 상상력이 필요한 장면의 재구성은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살아있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보고보이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도시의 활발함은 불 꺼진 창의 움푹 파인 구멍으로 대치되었다. 작가는 사람 사는 기운이 빠져나간 자리들에서 풍겨 나오는 초현실적 분위기를 잡아낸다. 낡은 폐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물들이 방치되어 있곤 한다. 




멜랑꼴리아, 각각 36*51cm, 종이에 과슈, 2016



Work room1, 가변설치, 종이에 드로잉, 2016



Work room2, 62.5*144cm, 종이에 연필, 젯소, 2016



그러나 쓸모없는 것들은 기능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 장소가 탈영토화되었듯이 말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었던 상품은 유행이 지났지만, 이제 또 다른 호기심을 자아내는 사물이 되었다. 미로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도시 전체의 배치자체가 신비롭다. 쇠락한 도시를 쏘다니면서 뜻밖의 만남을 추구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은 ‘어제 이해했던 장소를 내일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루이 아라공)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물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에 사물들을 재인식’(발터 벤야민)된다. 먼저 살다간 이들이 남긴 흔적을 탐사하는 작가의 시점은 고고학적이다. 집과 건물이 늘어섰던 풍경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작가도 그곳을 통과했을 골목이었을 것이다. 번쩍거리는 새것만이 파노라마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박정경의 작품은 오래된 도시를 탐사했던 발터 벤야민의 고고학적 시선을 떠오르게 한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의 저작들은 체계적이거나 점증적이지 않고 열광적이며 반복적이라고 본다. 그의 저작에는 진전이 아니라 고심의 흔적이 있다. 도시 풍경은 같은 장소, 인물, 대상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매번 방향과 관점은 다르다. 벤야민의 도시/텍스트 속에는 현대 대도시의 미로에서처럼 끊임없는 운동은 있지만 진보는 없다. '미로에는 중심이 없기에 도시 발견과 탐험을 상상하는 사람은 중앙에 도달할 수 없고, 끝없는 순환적 여행으로 오랜 기간 동안 같은 길을 되돌아갈 뿐이다'(엘리자베스 윌슨) 박정경에게 ‘거대한 놀이동산’으로 간주된 옛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다소간 두려우면서도 즐거운 체험이었다. 익숙한 곳이 낯설게 되는 그 어디라도 미로는 발견될 것이다.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미로의 체험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지혜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자크 아탈리). 근대의 투명성이 빛을 잃은 지금 미로가 회귀하고 있다. 



발견_drawing tonight, 각각 27*39cm, 종이에 오일파스텔, 2016



이상한 낮, 모르는 밤_초복, 21*29.7cm, 종이에 드로잉, 2016



한데 엉켜 시꺼먼 숯 덩어리 같은 박정경의 구 도시 풍경은 수직 상승하는 유리 상자들의 도시와 반대되는 이미지다. 이 시커먼 풍경은 이제 대지와 하나가 되려한다. 직선으로 뻗어나가지 않는 원근법적 공간의 불투명성은 맹목적이면서도 매혹적이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중국어에서는 미로를 미(迷)와 궁(宮)이라는 두 개의 낱말을 결합하여 나타낸다고 인용한다. 여기에서 ‘迷’는 ‘길을 잃다, 헤매다, 혼잡스러운, 어수선한, 홀리는, 마술에 걸린, 정신없이 사랑하다, 또는 정열에 사로잡히다’ 등의 뜻을 지닌다. ‘宮’은 사원이나 궁전 또는 자궁을 의미한다. 자크 아탈리는 길을 잃는다는 것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뒤로 물러나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이다. 작가는 유목민처럼 같은 길을 매번 다르게 간다. 그렇게 갈 수 있지 못하다면 창작 공간 여인숙에서의 작업은 그토록 생산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기억과 망각은 상보적이다. 


박정경의 작품은 잊혀진 것들 가운데 기억된 것이 끝없이 회귀하는 장이다. 기억만큼이나 지각은 어둠 속에서 불현 듯 다가오는 단편들로 나타난다. 단편들은 맞춰져야할 퍼즐이 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유목민적 의식은 푸코가 말한 반(反)기억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유목민은 맞딱뜨린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기 위한 재현 대신에, 다가오는 것들을 향유할 뿐이다. 박정경은 구글 어스 식의 전능한 시점 대신에 그때그때의 지표를 해석하며 나아간다. 또는 다른 길을 비슷하게 간다. 한군데에서 그린 풍경이 다른 곳과 유사하다. 군산과 전주, 아마도 그녀가 어릴 때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태백까지 그 골목길, 그 잡풀들, 그 가로등이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보내다가 쇠락한 도시들은 잠시 이곳에 있지만, 그곳에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의 시점이 덧씌워지면 새롭게 풀어헤쳐진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짜여 진다.   


출전;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레지던시 평론가 매칭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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