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신영 / 이미지 여행을 위한 장치

이선영

이미지 여행을 위한 장치

    

이선영(미술평론가)

    

반듯한 나무틀로 마감된 것이 많은 김신영의 작품들은 단순하고 깔끔하다. 줄줄 흘러내리는 풍경이 등장할 때조차도 오려내기나  접기 등의 방법론이 관철되는 작품들은 딱 떨어지는 선과 면으로 관객의 시선을 모아준다. 낡은 사진 이미지나 흑연 등이 사용된 작품의 주조 색도 모노톤이다. 이러한 조치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환원하는 방식일까. 때때로 기하학적 추상이나 추상적 관념이 장식적 용도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첫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힘든 김신영의 작품에서 단순성은 복잡한 국면들을 내부에 접고 있다. 그것들은 한번에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다단계의 매개를 거친다. 작가는 최초의 이미지가 여러 시공을 통과하면서 변형되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미 어떤 과정의 결과물인 최초의 이미지와 그것의 종착역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시공의 여행을 떠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녀의 작품은 이러한 여행을 위한 장치들이다. 




 <‘Mindscape’ 설치전경>, 가변크기, 나무,플랙시글라스,PVC 필름슬라이드 영사,환등기,2014



<Mindscape>,58.5cm x 107cm x 58.5cm,나무, PVC 필름슬라이드 영사,환등기,2013

 


나무나 슬라이드 필름 등이 사용된 이러한 장치들은 첨단적이지는 않지만 기계의 메커니즘이 있다. 이러한 예술기계에서 절단면들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으면 작품의 진의는 잘 파악되지 않을 것이다. 수집되거나 직접 찍은 사진들, 또는 그 위에 드로잉을 한 이미지들이 플랙시글래스나 PVC 등에 영사되는 작품은 ‘마음의 풍경’을 담은 일종의 영화다. 영화가 인상적인 사진의 편집일 수 있듯, 이미지의 흐름은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빈틈없는 서사가 아니라, 뮤직 비디오처럼 흘러간다는 점에서 심상이다. 영상이 흘러가는 프레임은 때로 사각형을 벗어나서 여러 형태로 변형된다. 그것은 깔대기처럼 어떤 것은 통과시키고 어떤 것은 지연시킨다. 그 변화무쌍한 형태 중에는 잠망경같은 기계의 원리를 차용한 것도 있다. 슬라이드 이미지 80개가 약 5초마다 돌아가며 영사되는 작품 [Mindscape](2013)는 서있는 스크린과 기울어진 스크린의 명암관계가 다르다. 


드로잉 작품에서도 반전된 명암이 쌍을 이루는 것이 있다. 작품 [각기 다른 산수](2016)는 배경이 형태가 되고 형태가 배경이 된다. 반듯한 외곽선 안팎을 채우는 것은 견고한 것이 녹아내리는 모습이다.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바탕 면이 형태로 노출된 작품들은 나름의 원근법과 명암법이 적용된 화면에 뚫린 구멍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산수](2016)에서 하얀 삼각형 모양의 형태는 검은 바다 위에 떠있는 빙산처럼도 보이고, 그냥 도려낸 형태로도 보인다. 나무 합판 위에 흑연으로 그려진 작품 [Woods](2014)에서 풍경 위에 있는 비스듬한 밝은 사각형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 같다. 그 문으로 무엇인가가 사라지거나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일상의 물리적 질서를 넘어서는 기적에 대한 희망이 있다. 이미지가 놓여있는 평면에 뚫린 또 다른 평면은 미끄러짐을 낳는다. 이러한 기표들의 미끄러짐은 대상과 의미를 고정시키지 못한다.


 

<각기 다른 산수>,180cm X 90cm, PVC,각재, 흑연으로 드로잉, 2016



동화의 한 장면에서 나왔을 법한 작품 [Yellow Brick Road](2016)에서 각목에 매달린 캔버스 천에는 텅 빈 기하학적 형태가 활강한다. 나무 판넬 위에 아크릴로 그려진 작품 [각기 다른 산수](2016) 역시 입체감 있는 바탕 위에 놓여 있던 어떤 형태가 증발된 모습이다. 형태가 사라진 자리는 빈 바닥으로 남아있다. 알맹이는 빠지고 주변만 남아있는 이미지는 추리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은 해석적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풀어 나가는 기계장치이다. 그림에 난 기하학적 구멍은 슬라이드 사진에 가필하여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필은 무엇인가를 지우거나 변형시킨다. 하얀 면들은 3차원적 환영을 급정지시키며, 여기에 다른 차원을 삽입한다. 차원의 변주는 2차원적인 드로잉을 3차원 상에 세워놓는 장치를 통해서도 구현된다. 작품 [세 개의 산](2016)은 합판위에 흑연으로 그려진 산 모양이 경첩으로 좌대 위에 고정되어 있는데, 뒤에서 보면 합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앞쪽에 있는 풍경의 환영은 사라지고 날 것의 재료가 드러나 있다. 


그것은 앞면만 있는 또는 뒷면만 있는 풍경이다. 이 산들은 마치 입체 그림책처럼 접혀져 있던 것들을 세운 모양새로,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유희를 보여준다. 2차원을 바닥에 세우거나 3차원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접거나 오려야 한다. 접기나 오리기는 단선적인 인과론을 벗어나 가까운 것을 멀리, 먼 것을 가까이 대면시킨다. 마치 별자리처럼 말이다. 가령 작품 [look into it](2013)은 한 자리에 모였지만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상황을 별자리처럼 보여준다. 사진이나 사진들의 모음을 재배치하는 방식 자체가 도약과 비약의 연속이다. 작가는 게임의 방식을 극대화하기 위해 매 작품마다 패를 다시 섞는다. 아이슬란드에서 머물던 체험이 녹아있는 [Icelandic Swimming Pool] 시리즈(2015)는 수영장의 외곽선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공백으로 만들었다. 흑연으로 그려진 수영장의 표면은 물이 아니라 돌이나 화산재 같은 느낌을 준다. 물은 얇은 인터페이스처럼 그렇게 떠 있으며 자연 특유의 실재감을 덜어낸다. 




<Woods> , 23cm x 15.5cm. 나무합판 위에 흑연, 2015



<Skeleton>, 23cm x 15.5cm. 나무합판 위에 흑연,  2015



. <Yellow Brick Road>, 30cm X 100cm, 각재,캔버스천위에 아크릴, 2016



그것들 중의 하나는 아래의 둥근 블랙홀로 표면의 입자들을 쏟아져 내리는 듯한 모습이다. 형태 오려내기는 평이한 재현적 행위를 변형시킨다. 수영장 시리즈에서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였다는 장소는 모든 것이 생략된 채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만 집중한다. 잠망경 구조를 활용한 2016년 작품들은 관객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작품 [내려다보는 산](2016)에서 창밖에 있는 가로등과 나무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의 방향에서 포착된다. 우물을 보듯이 구멍을 보면 창밖의 풍경이 나타나는 것이다. 작품 [평행한 이미지](2016)는 천장에 위치한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했다. 작가에 의하면 잠망경은 ‘이미지를 흘려보내는 장치’로, ‘위치가 변하면서 이미지가 읽히는 방법도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식이 내용을 바꿀 수 있다면 예술가도 세계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심신의 안팎이 촘촘히 코드화되는 세상에서 이러한 심미적 사유는 더 이상 이상주의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나 과학자와는 다른 현실참여의 방식을 이끌어낼 것이다. 


김신영의 최근작에서 자주 등장하는 산은 고양 레지던시에서 늘 보는 풍경이다. 심상으로서의 산의 목록에는 얼마 전에 다녀온 아이슬란드 레지던시에서 접했던 빙산도 가세한다. 특히 고체에서 액체를 오고가는 빙산은 시공간의 추이에 따른 이미지의 변화를 추구하는 작업과 조응하는 소재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말도 있지만, 김신영의 작품에서 그러한 동어반복은 차이의 관계에 자리를 내준다. 밝음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그 반대도 성립된다. 영화적 메카니즘을 내재한 영상작품들에서 움직임의 환영은 차이의 관계에 의해 성립된다. 빙산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산은 물로 이루어져 있고, 수영장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물은 산처럼 견고한 외곽선과 형태를 가진다. 고체는 액화되며, 액체는 입자 형태로 허공으로 기화되거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주변 환경과 인간들이 더불어 있었을 수영장은 분자들이 이합집산 하는 사건의 장으로 압축되었다. 김신영의 작품에서 사건은 심층이 아니라 표층에서 일어난다. 심층은 표면 아래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치거나 접혀진 표층을 말한다. 




<각기 다른 산수>,41.5cm X 30cm, 나무 판넬위에 아크릴, 2016



<각기 다른 산수>,17.5cm X 14cm, 나무 판넬위에 아크릴, 2016



<세개의 >,170cm X 150cm X 140cm, 각목, 합판위에 흑연으로 드로잉, 2016



<세개의 > 부분



작가가 일부러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지각과 기억의 과정 자체에 변화가 있다. 수집된 이미지에서 구체적인 정보를 지우거나 잘라내는 작업은  변화의 방식을 좀 더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구체적 풍경은 색면 추상화같은 이미지로 변화되곤 한다. 잠망경 원리를 포함한 입체적인 작업들 이미지를 통과하는 장치다. 한 이미지 또는 정보가 층들을 통과하면서 겪는 변화는 예술작품의 심미적 측면이다. 이때 이미지나 정보는 다소간 불투명해지지만, 또 다른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작품이라는 불투명한 창은 관객의 지각이나 기억과 상호반응 한다. 이 불투명한 심연에서 어떤 것이 표층으로 떠오르는지는(전경화 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작품 [skeleton](2015)에서 사전적 정의 중의 하나인 ‘유기분자의 골격구조’는 언제든 다른 방식으로 조합 가능하며 형태화될 것이다. 김신영의 드로잉에 많이 사용되는, 수묵화같은 느낌을 주는 흑연은 불투명함을 대변한다. 플라스틱처럼 흡수력이 없는 매끈한 표면 위에 칠해진 안료는 바탕의 가로결 무늬의 층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곤 한다. 그것은 액체라고도 고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의 대상을 표현한다. 


자연이나 무의식을 포함한 많은 것을 코드화 되어 즉시 읽혀지고 소비되기를 겨냥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렇듯 왜곡과 변형의 과정을 길게 늘이는 것은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다양화하기 위함이다. 중심은 하나지만 주변은 여럿이다. 중심을 만드는 것은 주변이라고 하는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많은 중심 또는 가변적 중심이 있는 예술은 감성 뿐 아니라 사유의 첨단에 서있다. 김신영의 작품에는 보는 각도를 달리할 때 극적으로 달라지는 이미지들이 많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나중에 불확실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은 처음부터 존재한다. 확실성/불확실성은 맥락에 따른다. 맥락은 중간에서 명확해진다. 카프카는 ‘사물들이 자신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근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중간쯤에 위치한 어느 지점을 통해서’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신영은 처음과 마지막 보다는 중간을 강조한다. 




<Lookinto it>, 7.7cm x 15cm x 15cm, 슬라이드위에 드로잉,나무 슬라이드뷰어에 설치,2013


 

<IcelandicSwimming Pool> , 41cm x 31cm,종이위에 흑연,매트미디엄,2015



설치전경



처음과 마지막은 불확실하지만 중간이라는 매개 고리는 합리적이다.  딱 맞아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나무틀처럼 말이다. 합리적 구조는 비합리적인 것을 품고 있다. 합리에서 합리가 불합리에서 불합리가 나올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관심도 끌지 않을 것이다. 매개과정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상에 대한 지각과 기억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지금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켰던 고전과학의 시대가 아니니 시공간 복합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상 뿐 아니라 그림이나 설치 작업의 출발이 되곤 하는 사진들은 그자체가 특정 시공간을 오려낸 것이다. 정보혁명 사회로 진입하면서 자연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사진적 대상이 되어, 현실은 오려진 것에 또 다른 맥락을 부여한다. 단순과 복합, 확실과 불확실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뫼비우스 띠같은 현실이 출렁거릴 때 마다 자리를 바꾼다. 김신영은 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를 3차원적으로 연출할 때 빈 공간이 많이 드러남을 인식한다. 


그녀는 ‘사진 자체는 구멍이 많다’고 말한다. 틈이 벌어진 이 이상한 공간은 사진적 현실을 소격시킨다. 설치작업에 활용하는 잠망경은 원래 수면 아래의 배(잠수함)가 위를 볼 때, 정상적으로 보면 안 보이는 이미지를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 온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미지를 보는 방식 또한 직접적이기 보다는 매개적임을 알려준다. 김신영의 작품에서 매개는 중성적이다. 그것은 변질된 현실이나 진실의 왜곡, 불가지론의 문제이기 보다는, 실재가 구성되고 해체되는 합리적 과정을 말한다. 수집된 사진이나 찍은 사진이 오리기나 접기를 포함한 여러 장치를 통해 변형되는 작품에서 원근법적 공간은 그 빈틈을 벌려 나간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 수 백 년 간 재현적 공간의 원형이 되었던 원근법적 공간 자체가 특정 세계관에 의한 짜깁기 이므로, 틈은 벌려질 수 있다. 김신영의 작품에서 이미지에 섞여 있는 하얀 도형들은 그러한 틈을 형태화한 것처럼 보인다.




<평행한 이미지>,28cmX30cmX215cm, 미송합판,거울,식물, 2016



<평행한 이미지>(부분)



.<내려다보는 >, 244cm X 49cm X 180cm, 미송합판,각재,아크릴거울, 2016



하나의 정점을 중심으로 배열된 질서가 사라질 때 불확실한 상황이 남는다. 이 불확실한 상황은 예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사유를 이끌었던 과학적 세계관에도 선명하다. 그것은 불확실함만이 확실하다는 역설이다. 작가란 이 불확실함을 삶의 공포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유로운 유희로 만들 수 있는 존재이다.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고전 과학에는 정점(定占)과 좌표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체계에서는 누구나 정점에 닻을 내리고 모든 것을 정점으로 회부함으로서 세계의 표상들을 사유하고 증명하고 조합하고 실험하고 조직하며 세계를 조감하고 관찰했다. 그것이 인과율의 단일성을 전제한 세계의 항구성 및 합리적 안정성을 만든다. 그러나 ‘총체성이 계획적으로 조직되는 체계의 시대’(미셀 세르)는 점차 종말을 고한다.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진 현대미술 자체가 이러한 종말의 이미지들이다. 김신영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빈 공간의 틈입은 기존의 표상적 세계를 소격시킨다. 거기에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수많은 점이 있다. 


수영장 시리즈에 나타난 물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입자들만큼이나 말이다. 원자론의 입자를 생각하게 하는 이 입자들은 허공 속에서 격렬하게 운동하면서 변화한다. 김신영의 작품에서 견고한 태산은 티끌을 모아 만든 것 같다. 반대로 티끌같은 존재는 기념비적--작가는 슬라이드 크기의 작은 상자를 영화관처럼 만들기도 한다—일 수 있다. 유령처럼 등장하는 빈 공백들은 원근법으로 대변되는 균질적 공간에 이질적 공간을 삽입한다. 원근법은 특정 시대의 관습일 뿐 실재의 다양한 면모를 포착하지 못한다. 김신영의 ‘이미지를 흘려보내는 장치들’은 운반 외에 운반을 통한 변환을 강조한다. 그러한 방향성은 고정된 점을 중심으로 배열된 질서를 재현하는 대신, 좀 더 가능성 있는 상황으로 열어두기 위함이다. 충돌, 침입, 극적인 전환이 자주 일어나는 이 세계는 상대적이며 질서나 조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김신영의 작품은 다가올 세계에 대한 기대가 있으며, 그것은 더 큰 질서를 생성하기 위한 잠재성을 말한다. 

 

출전; 고양창작스튜디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