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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 시선의 간극에 존재하는 나

이선영

시선의 간극에 존재하는 나

    

이선영(미술평론가) 

  

다소간 어두운 가운데 조명을 받고 있는 이영희의 작품은 마치 연극 무대같은 분위기가 있다. 빈 의자와 탁자, 벽에 걸린 액자들은 누군가의 방을 암시한다. 알록달록한 무늬의 긴 의자는 부재의 자리지만, 탁자 위 컵에 담겨 있는 티백은 방금 이 자리를 떠난 또는 곧 들어올 것 같은 상황을 예시한다. 주인공은 사라지고 사물들--작가는 그냥 물건과 나의 물건인 사물을 구별한다--만 현존한다. 사물은 주인공을 대신하여 말한다. 아니, [How about you?]라는 제목의 이 설치 작품은 말하기 보다는 묻는다. 연극적으로 연출된 사물들은 ‘나는 이렇다, 너는 어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전시공간을 그녀의 방, 또는 내면공간으로 본다면, 작가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의하면 그녀의 자리는 매우 화려하다. 비록 새 의자가 아니라 버려진 것을 예쁘게 포장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의자의 꽃무늬와 한데 어울리는 찻잔도 예쁘장하다.

 



How about you?

porcelain, photograph, bench, fabric, printed matter, dimensions variable, 2016



EARTHEN_porcelain, printed matter, fabric, 가변설치, 2016



그러나 이 찻잔은 당연히 이 도예가가 만들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배반한다. 그것은 시장에서 사온 싸구려 기성품이다. 소비자가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량생산된 예쁜 컵들은 굳이 도예가가 그런 것들을 만들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기성품이 많이 사용된 이영희의 작품은 도예 특유의 물성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작가로서의 사유를 요구하는 상황에 대한 자의식이 깔려 있다. 탁자 위 찻잔에 담겨있는 티백은 흙으로 만든 차, 즉 흙탕물이다. 작가는 보이는 모습과 실제 사이를 조금씩 비틀면서 자신을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기성품의 세팅과 달리, 벽에 걸린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진 도자는 자신의 진면목을 말한다. 그 작품의 원재료는 작가의 언니가 사용하다 준 낡은 이불이다. 컵은 물론이거니와 이불조차도 대량생산된 물건들로 넘쳐나는 시대에 10년이나 되었다는 이 이불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0년 된 이불은 작업을 해온 세월과도 겹친다. 작가는 이 낡은 이불로 뜨개질 형식으로 꼬아서 기본 형태를 만들었다. 꼭 짠 빨래처럼, 원래 이불보다는 단단해지지만 그렇다고 가마에서 불타 사라지는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작품은 천이지만, 이전작품에서 작가는 스폰지같은 재료를 사용하곤 했는데, 그것은 깔개나 덮개처럼 자신의 자리를 기억하는 재료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용되는 몸에 직접 닿는 천이나 스폰지같은 완충재는 몸의 일부로 여겨진다. 스폰지나 천은 흐물흐물한 재료지만 소성하면 반영구적으로 치환된다. 두텁게 꼬은 이불에 흙을 덮어서 가마에 들어가면, 이불은 모두 타고 흔적만 남는다. 마치 화장(火葬)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살과 비교될 수 있는 이 부드러운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단단한 것에 영구적인 기록을 남긴다. 여기에서 도예는 삶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고착시키는 매개체로 활용된다. 




Illustion-과시_흑경, LED, 천_60x50x4cm_2009



Memory_porcelain_130x105x15cm_2013



이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이보다 이 세상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 흔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천이나 스폰지를 젖은 채 사용한다. 그러면 크랙은 좀 더 심하게 남겨진다. 물을 먹은 부드러운 재료는 가마에서 부서지면서 복잡한 균열을 남긴다. 균열은 완성된 도예작품에서 금기시되는 요소지만, 작가는 극복해야할 과정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운다. 화가들이 회화로서의 자기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캔버스에 물감을 줄줄 흘리는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오점은 특징이 된다. 무수한 반복 속에서 차이가 된다. 그렇게 해서 주름으로 가득한 신체를 기록한다. 그 밖에 흙이 소성하면 줄어들어 든달지, 구멍을 뚫지 않으면 터진달지 하는 흙의 속성은 위축되거나 숨구멍이 필요한 인간적 상황과 비교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수천도의 초고온에서 견디며 흙을 자기로 변화시키는 도예는 단련의 과정을 상징할 것이다. 


이러한 단련과정에서 망친 것들은 보통 깨뜨려지지만, 이영희는 그것이 증거인멸이라고 본다. 못나면 못난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심지어는 그 못나거나 약한 모습을 적극적으로 내보인다. 자신에 대한 기록은 솔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이 기록으로서 남으려면 또 다른 형식이 요구된다. 요컨대 독특한 기록만이 시간의 시험을 이겨내고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 한편 그것은 자신을 분열시키는 가학적인 면모라기보다는 거울--이영희는 이전 작업에서 거울이라는 소재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적 상황을 표현하기도 했다--을 통해서만 통합될 뿐인 조각난 신체에 그 본모습을 찾아줄 뿐이다. 자신의 신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낡은 이불은 흙, 불과 결합하여 균열이 가득한 초상으로 거듭났다. 이영희에게 작업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물이다. 작가는 살아가는 이유와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일치시키려 한다. 




ing_earthenware_70x65x9cm_2016



C-wave_porcelain, wire mesh_62.5x20.5x7cm_2016



Paradox_porcelain, wire mesh_42.5x34x40cm_2016



Prime_porcelain, washer_69x52x13cm_2016



Substitute_Brouwn clay_71x56x16cm_2012



Pendency_black earthenware_20x30x5cm_2014



때로 평행선을 달리는 이 두 가지 만만치 않은 과제는 완전한 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수렴점을 향한 노력을 낳는다. 작가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업이라는 고독하고 힘든 과정을 자신의 삶과 온전히 동일시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작업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들이 강구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작가가 된다. 어쨌든 작가에게 어떤 급을 매긴다면 그러한 동일시의 강도로 봐야하지 않을까. 작업과 작품은 자신의 삶과 동일시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이지만, 양자 사이에는 타자는 물론, 자기 자신도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가령 작가에게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자신의 스타일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다. 이영희에게도 그러한 스타일의 작품이 있어서 그것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또다른 작품으로 표현한 적도 있다. 하나의 타입으로 굳어진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변신을 힘들게 하는 요소이다. 


더 나아가 예술가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도 천차만별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의 경우 예술에 기대될 법한 피상적인 화려함에 대해 말한다. 일반 관객들은 거의 전쟁터와도 같은 작업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들은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에 전시된 작품과 전시 개막일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작가만 본다. 또한 그들이 어떤 심신의 고통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지도 알기 힘들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 흙으로 사진을 포함한 액자작품 외에 또 다른 벽에 붙어있는 설명적 요소가 있는 자료들은 흙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알려준다. 이미 있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이의 고통은 출산의 고통 정도와 비교될만하다. 이 고통이자 희열의 과정들은 창조나 천재 등과 같은 낭만주의 신화로 코드화되어 소비될 뿐이다. 이영희 작품은 자신이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 사이의 간극을 전면화한다. 물론 그것은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동화_거울, 천_180x50x5cm_2010_1



동화_거울, 천_180x50x5cm_2010_2



이러한 간극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징적 우주(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작가나 작업의 경우 세상의 몰이해의 문제는 매우 크다. 이 문제는 근대 이후 예술의 상수가 되었다. 이러한 간극은 동시에 일반인/예술가, 노동/예술, 상품/작품의 차이를 낳는다. 작품에서 ‘너는 어때?’라고 묻기는 했지만, 이영희에게 자신은 흙만큼이나 불확실한 존재이다. 그러나 불확실하다고 해서 가상은 아니다. 그것은 실재이다. 정보혁명 사회에서 가상은 끝없이 상찬되기는 하지만, 인간의 육체나 대지 같은 것은 여전히 어떤 코드로도 환원될 수 없는 실재계에 속한다. 몸은 이 땅(흙)에서 생겨나서 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크 라깡의 개념 틀에 따르면, 실재는 상상도 상징도 아닌 무엇이다. 실재는 상상이나 상징으로부터 배척된 것이지만, 강력하게 현존한다. 피터 비트머는 [욕망의 전복]에서 라깡이 말하는 실재란 불가능 한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같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재는 비규정적이고 포착하기 힘들고 논리를 벗어나는 장소에 있다. 라깡의 체계에서 실재계는 표현불가능의 영역,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어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정신분석학과 함께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기술의 하나다. 주체의 육체성과 흙이라는 두 실재를 만나게 하는 이영희의 작품이 특히 그러하다. 작가는 여기에 타자의 시선이라는 또 하나의 차원을 중첩한다. 내가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와의 괴리 사이에서 펼쳐지는 게임의 장이 연출된다. 이 무대에서 타자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이라는 욕망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피터 비트머는 라깡이 개인에게 속한 어떤 것은 타자(프로이트의 이드나 무의식에 해당)를 경유해야만 지각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언어자체가 타자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영희의 작품 속 균열 가득한 흙/육체의 덩어리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표현한다. 이 간극은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만큼이나 채워지기 힘들다. 그러나 그 간극을 최대한 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때로는 그 간극에서 유희하는 이들이 바로 예술가일 것이다.  

  

출전; 클래이아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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