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윤호 / 움직이는 화이트 큐브

이선영

움직이는 화이트 큐브

  

이선영(미술평론가)

  

올해 4월 부산 양정동의 재개발 지역에서 시작된 김윤호의 [언덕위의 하얀 집] 시리즈는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재개발이 본격 시행되면 마을과 함께 사라지는 작품이다. 그것이 수개월부터 길게는 수년까지 진행 중일 수 있는 이유는 살아있는 공간, 즉 삶의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 위의 마을은 재개발의 단계에 들어선 곳으로, 이러한 불안정한 장소에서의 작업, 대개는 공공예술 작업은 찬반양론이 맞서 있다. 반대 측은 곧 사라질 곳에다 크던 작던 공공기금이 투입되는 것은 낭비라는 주장을 한다. 또한 개발이익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민 중 개발을 촉구하는 측은 이런 문화행위가 개발을 지체시킬 수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만약 이곳이 작품을 통해서 명소라도 되면, 마치 빌딩 짓다가 유물이 나와 그 근방의 개발이 올스톱 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 개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쪽부터 무너지면서 당장이라도 될 듯하다가도 몇 년째 방치되는 곳도 많다. 






언덕 위의 하얀 집 전시전경



그렇게 되면 그곳을 떠났지만 곧 돌아올 사람들이나 더 사정이 안 좋아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은 유예된 삶을 살게 된다. 후자는 낡고 부서진 집을 보수하지도 못한 채 그냥 눌러 앉아 살게 된다.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라는 극단의 논리는 조금씩 고쳐가며 사는 소박함을 저버린다. 저 멀리서 점령군처럼 서 있는 고층 아파트를 바라보며 이곳의 삶을 유령화 하는 것이다. 김윤호는 반쯤 폐허가 되어 있는 그 지역의 한 주민의 집 일부를 제목 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만들었다. 그가 붙인 제목은 동화속의 한 장면 같은 느낌으로 역설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러나 산동네가 ‘언덕위의 하얀 집’같은 로망을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경우는 꽤 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초반부터 불어온 대안의 공공예술을 통해 그렇게 가꿔지고 때로 문화적 소비의 대상으로 단장된 마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실천이 정작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 어떤 만족도를 가지는지는 검증해봐야 할 문제다. 구경거리가 된 삶은 구경하는 삶만큼이나 주체적이지 못하다. 


김윤호가 부산지역에서 찾아낸 이 동네는 재개발 단계에 진입해 있기는 하지만, 약 2년 정도는 더 있어야하는 곳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 과도기적인 공간을 작업 대상으로 삼았다. 주류로부터 벗어난 예술은 과도기적인 공간에서 피어나곤 한다. [언덕위의 하얀 집] 시리즈는 찢어진 천막에 셔터가 내려진 공간을 하얗게 칠하고 프로젝트 내내 일정주기로 가서 사진을 찍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전체가 아닌 부분을 칠해 원래 있던 공간과 차이를 둔 후, 원래 공간이 가졌던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 물론 완전한 정지는 아니다. 그의 작품이 알려주듯이 하얀 칠 부분도 시간의 흐름을 타고, 아니 주변보다 변화의 속도는 더욱 클지 모를 변화에 가담한다. 그러나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그는 이 하얀색을 미술계의 ‘화이트 큐브’와 비교했다. 화이트 큐브 역시 삶으로부터 건져진 것들이 예술로 포장되어 안치되는 곳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맥락이 생겨난다. 미술사가 그 결과 아닌가. 김윤호는 반대로 삶의 자리에다 화이트 큐브라는 추상적 공간을 상징적으로 끼워 놓고자 한다. 








염포시장에서 있었던 [염포시식코너] 중에서



화이트 큐브에서 전시되는 작품들이 정작 그 공간에서 충분히 소통되지 않으며, 대부분 사진이나 도록으로 남은 채 제 2,3의 소통 회로에 투입된다는 현실이 김윤호의 풍자적인 작업을 합리화한다. 특정 집을 선택—공공영역에서의 작업은 그러한 장을 만들기 위해 섭외하고 설득하는 모든 과정 또한 작업의 일부가 된다—해서 색을 칠한 것 자체도 작품이지만, 그에 대한 기록물은 또 다른 전시공간에서 소통되기 때문이다. 건물 안쪽, 그러니까 실내는 무엇인가를 담아내면서 유사 화이트 큐브에 대한 비유를 더욱 그럴듯하게 한다. 손이 닫지 않은 천정 부분은 일부러 남겨두고, 칠해진 공간은 폐지를 수집해서 쌓아놓은 창고로서 원래 역할을 수행한다. 그가 칠한 하얀색은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는 내용물을 색다르게 보이게 한다. 그는 하나의 장을 만들어놓고 삶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사진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괄호 치기, 또는 프레임 화 과정으로 삶을 반성적 차원에 재배치한다. 


과학자가 미생물을 관찰하기 위해 현미경을 보고 천체를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을 보듯이, 삶을 마주한 작가에게도 어떤 형식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공간을 선택해서 칠한 것이 전부인 작품에서 그 형식은 최소를 향한다. 그는 ‘하얗게 변해버린 창고에서 폐지는 더욱 빛난다’고 말한다. 하얀 내벽은 매일 달라지는 내용물을 특화시킨다. 그의 작품은 예술이 삶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님을 알려준다. 11월 중순부터 레지던시 근처에서 진행하는 최근 작업 [염포시식 코너]는 삶의 공간을 가시화하는 일 뿐 아니라, 그곳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프로젝트다. 김윤호는 요리를 택했다. 이 엄청난 탐식의 시대에 대단한 레시피를 가지는 것은 아니고, 삶은 감자같은 간단한 메뉴로 이루어 졌다. 시장에서 만나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뭔가 만들어 먹는 내용이다. 보통, 음식 나누기는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기 위해 주민과 친해지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이루어지곤 하는데, 김윤호는 그 과정을 전면에 놓았다. 이 프로젝트는 실시간으로 공유된 체험과 그것을 담은 사진이 전부다. 








염포시장에서 있었던 [염포시식코너] 중에서



울산 북구 염포동에 있는 이 작은 시장은 어느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사양화되고 있는 공간이다. 작품 [언덕위의 하얀 집]이 진행되고 있는 마을처럼 황량한 장소에서 작가는 조리대를 끌고 가 상인들이나 마실 나온 할머니들이 보기에는 서툴기 그지없는 요리를 시작한다. 만들어진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물론, 요리가 더 개선되기 위한 팁을 제공받기도 한다. 그들은 시식대를 중심으로 일시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그 지역에서 구입한 재료로 무엇인가 만들어서 그 지역사람들과 함께 소비하는 것은 소박해 보이지만 세계화 시대에 상징적인 행위이다. 대형마트에서 1+1으로 유혹하며 과다소비를 부추키는 상품들은 보다 싼 임금을 조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라의 출처를 가진 것인가. 그것들은 얼마나 먼 곳으로부터 온 것이며, 얼마나 많이 지역경제를 파괴하고 있는가. 예술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나? 올 한 해 동안 엄청나게 많이 열렸던 비엔날레들에서 먼 곳으로부터 온 것들이 미술계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가. 공공영역에서의 김윤호의 작업은 아직 시작 단계지만 방향성은 정확해 보인다.      


출전; 울산 북구 예술창작소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