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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 히라타 / 격세유전적인 예술작품

이선영

격세유전적인 예술작품

  

이선영(미술평론가)

  

동경 태생으로 2014년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 리카 히라타(Rika Hirata)는 ‘빛나는 물에서 사라져가는 뼈처럼 나선형 속에서 그녀는 행복하게 되는 꿈을 꾸다’라는 긴 부제를 가진 첫 개인전을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었다. 많은 키워드가 포함된 복잡한 전시부제는 그녀가 앞으로 해야 할 작업이 더 많은 의욕에 찬 젊은 작가임을 알려준다. 많은 작품에 선명한 물의 이미지는 그러한 포괄성과 유동성을 상징한다. 설치작품에서 물이 직접 나오는 작품도 있지만, 잠재적인 움직임으로 충만한 작품에는 물로 상징될 수 있는 생명의 근원, 집단 무의식, 유동성과 변모(metamorphosis)의 이미지가 있다. 전시부제에 나오는 ‘나선형’이라는 단어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것을 말한다. 직선의 운동이 아니라 영원히 회귀하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이다. 이러한 원초적 이미지는 신화와 종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물은 잠재성 전체를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You Are Me II
size:53cm×45.5cm / media: mixed media / age:2016



그에 의하면 ‘물은 원천이자 기원이며 존재의 모든 가능성의 모태이다. 물은 세계 전체의 기초이다. 물은 무정형과 잠재성의 원리이자 모든 우주적 현현의 기초이며, 모든 형태가 발생되는 원초적 물질을 상징’ 한다. 물론 물에는 창조 뿐 아니라 파괴적인 이미지 또한 강력하다. 즉 물은 ‘대홍수에 의해서 다시 그 형태 속으로 되돌아간다.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가정한다. 물에 잠기는 것은 형태의 해체, 선(先) 존재의 미분화된 양상으로의 복귀에 해당된다’(엘리아데).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해체는 새로운 탄생이 수반한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리카 히라타의 작품에서 어디로 향할지 모른 채 끝없이 나풀대는 촉수는 나와 자연, 그리고 우주를 잇는다. 이러한 연결은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이다. ‘난 셀 수 없는 생명의 연속의 결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기적과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주어진 삶의 조건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사고가 더 충격적일 것이다. 지루한 일상을 잠시 환기시켜 줄 수 있는 사이비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적은 일어나 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말이다. 존재에 대한 이러한 예민한 감수성이 리카 히라타의 작품을 추동하고 있다. 거의 종교적이라고 할 만 한 이러한 각성은 격세유전적인 생명의 이미지가 있는 작품들을 낳았다. 언제 시작되었을지 모를 우주의 충격파는 지금 여기의 자신을 관통하고 있다. 작업을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도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작가에게 예술작품은 이러한 힘을 분명히 하고 증폭시키는 매개물이 된다. 예술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하는 영역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그들만의 상상의 세계에 빠져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부류로 간주되곤 한다.




You Hear the Wave of God Inside Membrane
size: 200cm×260cm / media: mixed media / age: 2014


Two Spirits Under the Water
size:97cm×162cm / media: mixed media / age: 2014



the Peace of Gong Inside a Girl
size:72cm×116cm / media: mixed media / age:2016



억겁의 시간을 거스르면, 별의 먼지—인체를 이루는 기본 원소인 산소, 탄소, 질소, 수소, 황, 인은 은하 중심부를 이루는 물질과 같다고 한다—로부터 탄생하여 진화해온 인간, 그 유전자에 내재해 있을 이러한 힘의 표현은 충만함 뿐 아니라, 잔혹함 또한 포함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명과 우주의 드라마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며, 영원히 지속될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표현하는 리카 히라타의 작품은 이질적인 것들의 뒤섞이는 도가니로 나타난다. 출렁이는 선 사이의 구별되는 색들은 차이들의 표시이며, 복잡한 형태로 들끓는 작품들에는 많은 차이들을 포괄하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어디선가 생겨난 줄기들은 서로 엉키면서 새로운 텍스트를 짜고 다시 풀어헤쳐져 또다른 텍스트를 짠다. 무에서 생겨나거나 있던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 작은 크기의 그림들은 보다 조밀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며, 큰 작품들에는 형태들의 변모가 가능한 공간이 있다. 


관객이 보기에 좀 높은 곳에 걸린 그림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자연과 우주의 비밀만큼이나 미지의 자신과 작품에 대한 암시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라는 점에서 예술가는 과학자 못지않은 열정을 가진다. 이러한 열정이 나름의 방식을 탐구하게 하며, 그것이 예술의 형식이 된다. 형식은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서 온다. 형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내용에 대한 형식인 것이다. 리카 히라타의 작품은 생명의 기원부터 자아에 이르기까지 광폭의 관심사를 아우르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것들이 많지만, 예술만이 이러한 광폭의 관심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된다. 공중에 설치된 작품들은 천을 자르고 그 위에 그린다음 꿰매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표면의 형상들을 자세히 보기 힘들 높이에 매달려 있고, 바닥과 천장을 잇는 투명 실 안에 있다. 자아-자연-예술작품 복합체는 관객과 약간의 비밀스러운 거리감을 가진다.


 


The Blue Spirit in Self
size:230cm×130cm×130cm / media: mixed media / age: 2012




Good Night My Dearest. I'll Never Let Anyone Bother Your Dream Even If You Were Merciless
age: 2014 / media: sheep-skin, pig-skin



그러나 리카 히라타의 작품은 무에서 무로, 무의미에서 무의미로 전전하지 않는다. 자유롭다 못해 자의적인 흐름은 맹목에 불과하다. 그녀의 작품에 선명한 물의 이미지에는 유동성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더 두드러진다. 그것은 특정 물질인 물이라기보다는 일련의 흐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 상상력을 추구했던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을 남성과 물을 여성과 비교한 바 있다. 물의 유동성은 여성성과 관련될 수 있다. 이러한 함의를 철학적으로 극대화시킨 페미니스트 뤼스 이리가레는 [사랑의 길]에서 ‘삶의 근원은 항상 흐르고 밖으로도 흐른다. 죽음과도 같은 경계선이 없이 어디나 흐르는 내 삶’을 아름다운 에세이로 표현한 바 있다. 뤼스 이리가레는 몸을 유체의 움직임과 비교한다. ‘내 몸은 언제나 흐르고 움직이는데, 이 몸은 네게 피와 우유, 공기와 물, 그리고 빛을 가져다준다. 때로 너를 가득 채워 만족시키기도 하지...’ 


몸이 정신보다 더 유연할 수 있다는 사유는 몸이 여성을 포함한 타자의 대명사로 부각된 현대문화의 흐름을 포함한다. 그것은 정신에서 몸으로 평행 이동할 뿐인 또 다른 이원론을 넘어서, 정신을 포함한 몸이라는 하나의 실재로 수렴된다. 리카 히라타의 이전 작품 목록에는 동물의 가죽이나 점토 등을 활용하여 경계 없는 몸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 발견된다. 가죽이든 점토판이든 어떤 판을 오려내서 자유롭게 연결하는 방식은 캔버스 천에도 적용되었다. 그것은 표면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실체들이다. 입체작품에서 앙포르멜 형태를 보완하는 구조의 감각은 두드러진다. 작가는 ‘내 안에 균형과 불균형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미지의 형상들은 위로 솟구치는 삼각 형태를 통해 보다 분명한 운동성을 보여준다. 뭉글거리는 지속의 과정은 도약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생명을 이루는 물질들의 존재만으로 생명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긴밀하게 조직되어야 하며, 이때 도약은 필수이다. 물질에서 만들어진 정신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a Mold
size:70cm×100cm×40cm / media: ceramics / age:2012



Playing with a tiny creature
size:12cm×12cm×12cm / media:ceramic / age: 2013


예술이 불경하게도 창조와 비교되는 이유는 이러한 도약의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화나 회화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에 비해 전시장 바닥이나 모서리에 설치한 오브제 작품들은 보다 느슨하다. 사과, 밧줄, 돌, 나무 등 무엇에 쓸지 모르지만 자신의 무의식과 조응하여 끌어 모은 오브제들이다. 워크샵 때 발표한 도쿄와 청주의 사진 작품들 또한 무의식의 수집품 같은 느슨함이 발견된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향해 긴밀하게 조직되어 있기 보다는 병렬되어 있다. ‘그리고’나 ‘또는’으로 연결된 병렬의 어법은 명확한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범위 또는 의미가 있는 자리를 암시할 뿐이다. 이러한 어법은 분열의 위험이 있지만, 의도와 목적만을 생각하는 작업은 자유롭지 못하고 결과도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설정된, 지나치게 전략적인 작품들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보는 사람한테도 스트레스를 주는 자유롭지 않은 예술은 존재 의미가 없다. 


사물 표면 위에서의 표류는 새로움 또는 이질성을 위한 창구가 되어 줄 수 있다. [My Adam 's Apple  'invisible Voice']라는 제목, 그리고 ‘사과는 아담의 목젖’이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에 기대어 본다면, 예술보다는 사물의 언어에 귀 기울였던 초현실주의 오브제의 어법을 떠올리게 된다. 예술과 달리 사물은 침묵한다. 특히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취해진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침묵하는 사물의 언어를 듣기 위해서는 [사물들의 편]의 저자 프랑시스 퐁주처럼, ‘사물들 내부의 뚜껑을 열고, 그 두께 속으로 여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작가란 이 두께를 만들어내는 자이고, 관객은 이 미로 같은 회로 속에서 즐겨 방황할 것이다. 침묵의 전략을 통해 수수께끼처럼 다가오는 오브제 작품들은 화이트 큐브의 구조에 많이 의존한다. 마치 옆방에서 새어 나온 듯이 배열된 오브제나 모서리로부터 생성되는 듯한 형태들이 그것이다.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 설치 전경



큰 전시장에 딸려 있는 작은방은 설치와 드로잉들로 채워졌다. 전시장 모서리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텍스트와 드로잉, 그리고 마치 그곳을 향해 가듯이 물위에 배치된 오브제들은 작은 방의 형식에 어울리는 작가의 내면풍경에 해당된다. 회화나 설치작품과 달리, 드로잉은 매일 매일의 일기처럼 가볍게 쓸(그릴) 수 있다. 재료나 방법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맘속에 품은 것은 바로바로 꺼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자체로 서있기는 취약하다. 의례껏 그림이란 벽에 걸려있기 마련이지만, 이 경우는 펼쳐진 책의 한 면 같은 느낌을 준다. 4개의 면이 마주치는 모서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한정 지워질 수 없다. 경계들이 마주치는 그 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끝없이 생성된다. 반대로 그곳으로 끝없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 위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프레임을 벗어난 사물들이다. 이것저것이 통제 선을 벗어나 비죽비죽 튀어나온 그것들은 난파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 속 사각 프레임은 배처럼 무엇인가를 담아 이동시킨다. 그러나 담는 것도 이동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리카 히라타의 예전 작업에서 지나치게 입구가 크거나 바닥이 좁은 그릇처럼 말이다. 어떤 ‘그릇’들은 무엇도 담을 수 없을 만큼 찌부러져 있기도 하다. 사물들은 프레임을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표류한다. 무엇에서 벗어나 이동 중인 듯한 그것들은 ‘이룰 수 없는 희망, 상처로 인한 해체’ 등을 표현하며, 뚜렷한 좌표를 가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작품이란 작가가 주도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예술은 영감에 가득 찬 지름길이나 발견적 사건이 많은 우회로가 있을 뿐, 주어진 규칙에 충실한 알고리즘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술은 극단적이다. 동시에 융통성이 있다. 양이 질로 전화하는 순간, 오랜 기다림, 뜻밖의 해결책 등등이 가득한 것이 예술이다. 방안의 드로잉들을 아우르는 제목이 [유전자의 일기]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GPS 없이도 자기가 가야할 방향을 알고 있는 철새처럼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출전; 청주 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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