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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 / 재탄생을 위한 죽음의 시공간

이선영

재탄생을 위한 죽음의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장 안의 전시장, 또는 방안의 방으로 연출되는 송수연의 작품 [Death Room for the living]은 어두운 곳으로 진입해야 하는 비밀스러움이 있다. 또한, 그것은 누군가의 두뇌와 육체가 집약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작가가 ‘작품 전체는 내 마음을 시각화’라고 말하고 있듯이, 누군가의 내부로 들어가는 느낌도 있다. 가령 한쪽에 구멍이 나 있는 어둡고 오목한 공간은 자궁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무 골조와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모성적이다. 이 자리는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시공간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순방향으로도 역방향으로도 흐르기 때문에 진보와 퇴보, 승화와 퇴행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거기에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직선적 시간의 배후의 시간이 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이 근원적인 시간은 죽을 수밖에 없음으로부터만 이해된다고 말한다. 근원적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종말이 아니다. 




(참고작품) Death room for the living(부분), color on redclay, 240×210cm, 2016



송수연이 연출한 자리는 산자와 죽은 자, 그리고 신과 인간이 함께 있는, 타자들이 공존하는 공동의 공간이다. 작가가 공동체를 호출하는 것은 지금 여기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희망에서 비롯된다. 희망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시간 속에서 시간 너머로 나아간다’(레비나스). 시간은 희망과 관련되며, 그 매개가 되는 것은 타자이다. 그것은 나와 너 할 때의 그 타자부터, 신이라는 절대적 타자, 삶의 타자인 죽음까지 아우른다. 작품 [Death Room for the living]은 계몽의 빛 아래 모든 것이 단번에 파악돼야 하는 근대의 이상적 시점을 우회시키는 느릿한 시간성을 도입한다. 나무 골조로 이루어진 어둑한 공간에 촛불이 켜져 있고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는 이 명상적인 장소는 바로크 시대의 알레고리 그림처럼 보는 것 뿐 아니라 읽어야한다. 두려움과 맹목을 퍼뜨리는 어둠에 눈이 익을 무렵 하나 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흙 판에 그려진 이미지들이다. 


인터페이스에서 잠시의 관심을 끌고 (또는 그 조차도 없이)훌훌 지나가버리는 정보의 시대에 역행하여, 작가는 반석위에 새겨져 있는 텍스트/이미지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벽의 한 면마다 위아래로 빼곡히 붙어있는 그림들은 고분 벽화의 느낌이다. 일종의 (건축적)모듈로 작동 되는 22개의 그림은 입구를 제외한 모든 면을 채우는 내벽들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림이라는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을 설치의 형식으로 연출한다. 오래된 것(고대)은 빠르게 낡아버린 새로움(근대)을 건너뛰고 최신(근대이후)의 것과 만나는 것이다. 고분 벽화 분위기의 작품은 박물관의 시원이 무덤이라는 사실도 일깨운다. 벽화의 아치형 프레임은 교회 건축도 떠올린다.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의 역사]에서 성화(聖畵)상의 파괴를 주장하는 교회를 제외하면, 모든 교회들은 개인적인 전기와 비문과 초상을 보존하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말한다. 무덤은 종교적 장소가 되고, 곧이어 박물관과 미술관이 되는 것이다.




Space for Individual-Death Room for the living(in microcosm), mixed media, 1_10 scale Miniature of exhibition work, 2016-2017



송수연이 연출한 종교적 공간은 신화와 종교가 예술과 분리불가능 했던, 즉 삶과 일체화된 시대를 가리킨다. 물론 그러한 총체화나 일체화란 그 시공간의 맥락에 의한 것으로 그 맥락을 벗어나면 파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고, 작가의 의도가 총체적으로 관철된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도 과거는 지금보다는 총체적이다. 총체의 시대를 호출하는 것은 이미지가 그저 이미지일 뿐임을 요구하는 근대적 자율성에 거스른다. 근대적 자율성은 (생산성의) 진보와 함께 적지 않은 죽음의 징후를 남겼다. 신과 인간, 예술 등의 죽음이 논해지던 시대가 바로 자율성이 역사적으로 성립된 근대였다.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정점을 찍었던 1998년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인 작가에게 죽음의 문화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인 동시대의 코드다. 송수연에 의하면 죽음이란 '단순히 자연적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 이성, 문명, 진보에 대한 믿음의 죽음'을 말한다. 


짧은 시간 발전주의의 몸살을 앓아온 우리사회의 모순은 많은 죽음을 낳았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인 파편화가 아니라, 총체적인 시점을 담보할 수 있는 형식이 요구된다. 현 사회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생과 사, 과거와 현재(또는 미래), 개인과 집단을 아울렀던 특정한 관습적 형식에 대한 관심을 낳게 했다. 그녀가 도상으로도 차용하고 있는 신화와 종교는 그것이 극복됐다고 여겨졌던 근대에도, 그리고 근대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호출되곤 했다. 지엽적 형식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삶의 보편성이 문제시될 때 시원으로의 소급은 요구된다. 이러한 소급은 역사적 퇴행이 아니라, 불가피한 리얼리즘의 문제이다. 정지되어 있는 무덤 뿐 아니라 이동하는 도구인 상여나 배의 역할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은 익숙함과 중독으로 인해 때로는 편안하고 아늑하게도 느껴지는 죽음의 문화에 순응하지 않는다. 죽음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긍정되어야 한다. 



(참고작품) SPACE FOR INDIVIDUAL-TiPi, 2011, H170cm Ø 120cm, Leatherette, Bamboo



예술은 한갓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시 태어남을 위해 봉헌되었다. 삶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은 예술에 대한 냉소주의나 기능주의적 해결책, 또는 심미주의—특히 심미주의가 죽음을 달작지근하게 미화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로 함몰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가능한 삶의 실제적 조건을 만들어가려는 소박하면서도 야심찬 욕망으로 이어졌다.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의와 도덕이 깔아뭉개지고 있는 시국적 상황에서 먼저 애도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수년간 전시장 안팎에서 진행해오면서 여러 버전을 가지고 있는 작품 [Death Room for the living]은 어둡고 묵직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바깥에서의 문화적 행동의 산물이며, 전시공간에서의 관람에 맞게끔 다시 배치되었다. 상여나 배처럼 여기와 저기를 잇는 그것들은 한곳에(또는 하나의 상징에) 뿌리박은 영구적인 기념비가 아니라, 가건물처럼 조립될 수 있는 틀을 가진다. 


갱생을 희망하는 개인을 위한 제의적 공간은 유목민의 막사를 닮은 이전 작품 [space for individual-TiPi](2012)처럼, 어디에서든 재구성되어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문화라는 질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힘이 필요하지만, 젊은 작가에게 그것은 더 이상 민족이나 민중, 대중 같은 이전 시대의 집단을 말하지 않는다. ‘Space for Individual’ 시리즈의 하나인 이번 작품은 개인 하나하나가 깨어야 함을 강조한다. 아치형 프레임에 안치된 벽화 속 인물들은 개인이면서 집단이다. 입구를 제외한 면을 균등하게 나눠 그린 22개의 벽화 스타일의 그림에는 보살과 나한이라는 개념을 지금의 상황에 빗댄 내용이 담겨 있다. 작품 속 보살은 ‘자신을 희생시켜 대중을 구원하는 실천’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가져야 할 이타심’을 상징하며, 나한은 ‘현실의 번뇌와 업에 얽매여 있으나, 더 나은 우리 세상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개인의 실천의지’를 표상한다. 




Space for Individual-Death Room for the living 01(one of the paintings inside), color on a mud-plastered panel, 90×60cm, 2016-2017



Space for Individual-Death Room for the living 02(one of the paintings inside), color on a mud-plastered panel, 90×60cm, 2016-2017



보살과 나한은 전통적 도상에서 취한 상징물들을 가지고 있지만, 현대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가령 ‘중생의 번뇌와 장애를 없애주는’ 보살인 제개장은 하얀 깃발을 들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며,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 이끄는’ 보살인 관세음은 화관에 감로수병을 들고 있는 섹시한 모습이다. 나한에 해당하는 이들은 세월호 사건에 희생된 학생들, 진실을 파는 잠수부들, 팽목항의 유족들, 밀양의 송전탑 반대 할머니들, 고공 시위 중인 쌍용 자동차 노동자 등이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모순을 대변하는 사건사고의 희생자들이다. 촛불집회 하는 사람들 뒤에 보이는 청와대, 용산참사와 물대포 사망사건을 병렬시킨 작품은 민초들의 고난을 야기한 적대세력을 암시한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이 지루한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지배계급의 방어망이기도 한 얼어붙은 체계의 미로를 깨부수려는 민초들의 의지다. 모순의 정점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동서고금의 종교적 형식들은 죽음을 담아왔다. 


인류학의 전통처럼 송수연의 작품에도 종교와 죽음은 친숙하다. 니겔 발리는 [죽음의 얼굴]에서, 말리노프스키를 비롯한 인류학자들이 죽음을 모든 종교의 기원으로 보았다고 인용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가 모든 문화의 시원이라고 보았다. 종교의 후예인 예술 또한 이러한 관점을 일정부분 공유할 것이다. 여기에서 죽음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집단적인 삶으로 다루어진다. 송수연의 작품은 현재진행형의 시대적 모순을 기입함과 동시에,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참여를 열어 두었다. 나한의 캐릭터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진 등을 작가에게 제공하고 그들의 염원이 작품화되기를 원했다. 2015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수집된 자료에는 귀여운 아기 사진들을 비롯하여 가족사진이 많았는데, 그것은 시대의 위기가 가족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개인의 안녕과 그것이 미래까지 지속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염원들이 발견된다. 


꼭두행렬, 소양 2교, 2016년 11월 4일



꼭두행렬의 시민들. 소양2교, 2016년 11월 4일



꼭두행렬의 꼭두, 소양 2교, 2016년 11월 4일



송수연의 작품에는 전시장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돌아다니던 것들이 다시 전시장에 설치되는 식의 호환성이 돋보인다. 그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고심해왔던 작가의 선택이다. 2016년 11월에 춘천의 소양강 근처에서 행한 송수연의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더 행복한 세상을 위한 꼭두들의 흥겨운 행진’이라는 주제로 상여와 함께 꼭두 행렬을 구현했다. 그것은 일종의 장례식이다. 장례식을 통해 ‘죽은 자는 살아있는 기억으로 변형’(레비나스)된다. 즉 죽음에 대한 제의는 ‘깊은 의미의 드러냄’(바타이유)을 말한다. 작가는 500명이 넘는 춘천시민들에게 행복에 대한 질문을 받아서 상여 내부에 붙였다. 상여의 장식인 꼭두 인형들과 함께 강을 건너는 의식은 시민들이 ‘정의와 도덕이 살아있는 우리의 내일을 모색하며 즐거운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에서 죽음의 의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기에 축제적이다. 


그러나 참여자들을 하나 되게 했던 사건의 비극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들로부터 기부 받은 304개의 인형은 세월 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숫자가 되었다. 죽음은 애도하는 공동체를 낳는다. 장례는 죽은 자 뿐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 사이를 이어주는 의식은 남아있는 자들의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니겔 발리의 [죽음의 얼굴]에 의하면, 개인의 죽음이란 그가 속한 전체 집단이 위협을 받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구성원 모두가 결속력을 과시하기 위해 함께 자리한다. 즉 장례식은 ‘죽은 자보다 산자를 위한 의식’(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송수연의 작품에서 분명하듯, 애도를 희망으로 전환하는 것은 종교, 예술, 그리고 정치가 공유할 수 있는 목표이다. 죽음/시간에서 작가가 강조하는 부분은 희망이다. 보살이나 나한이라는 동양의 도상은 직선적이거나 종말적 세계와는 거리가 있으며 기복의 성격이 짙다. 




꼭두행렬의 상여내부, 2016년 11월 4일



꼭두행렬의 기부된 인형들, 소양 2교, 2016년 11월 4일



개인의 또는 집단의 기복이 아니라, 개인이자 집단(다중)의 기복이다. 그러나 종교적이되 종교인은 아닌 예술가에게 현재의 소외에서 벗어나려는 집단적 희망은 어디에 새겨지는가.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희망은 문화에 새겨 진다’고 보았던 블로흐를 높이 평가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시간은 '자신의 종말을 향한 존재의 기투'(하이데거 처럼)도 아니고, '부동의 영원성에 대한 이미지'(플라톤 처럼)도 아니다. 시간은 미완의 현실화이며 성취의 시간이다. 레비나스가 해석하는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에 의하면 문화 속에서라야 완성된 세계가 예감된다. 역사에 필수적인 희망은 문화 속에 기입된다.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으로서의 유토피아의 미래, 도래할 세계에 대한 봉헌으로서의 주체성을 말한다. 송수연의 [Death Room for the living]은 그러한 주체성의 탄생, 또는 재탄생을 위한 공간일 것이다. 

  

출전; 춘천 창작공간 아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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