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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 세상이라는 그림 속으로의 산책

이선영

세상이라는 그림 속으로의 산책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지영의 작품에는 도시 산책자의 관점이 녹아있다.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거의 하루 종일 작업하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작업실 인근의 아파트촌이나 뒷산, 옆 동네 등등 발길 닿는 대로 다니며, 때로는 울산의 야경이 잘 보이는 작업실 옥상에서 눈으로 산책 한다. 울산에서 제작된 최근 작품들에는 매일의 심상이 여러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책 장소들은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된다는 의미를 넘어서, 납작한 매체인 그림에 통풍감을 부여한다. 불연속성이 산재한 작품 안에는 여러 바람 길이 나있다. 작가에 있어서 산책의 생활화는 다른 삶을 배제하고 작업에만 매진하는 이에게 종종 보이는 밀폐감을 줄여준다. 걷기는 그자체가 생각을 활성화시켜준다는 과학적 연구가 있다. 또한 걷기는 환경에 대한 감수성 고양시킬 것이다. 일상적 삶에 매몰되어 무디어지지 않게 날렵하게 갈아줘야 하는 것이 예술적 감성과 사유이다. 그렇지 않다면 매일 다니는 그곳들은 기계적 반복의 장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원상떼빌  종이에 드로잉, 콜라주  138.5 x 150cm  2020



염포동  종이에 드로잉, 콜라주  141 x 150.5cm  2020



반복에서 생기는 이러한 갱신 효과는 작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매일 앞에 서 게 되는 화폭이 미지의 대륙으로 다가오지 않는 자는 작업을 지속할 수 없다. 물론 갱신은 가장 좋은 경우이고, 자신이 좋아서 시작했던 삶이 질곡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제 자리 걸음하거나 심지어는 퇴행하는 듯한 불안감도 따른다. 자기 주도형의 자유로운 작업을 선택한 삶에게 뒤따르는 위험이 있다. 자유의 길에는 불안과 긴장이 동행하기 마련이다. 김지영에게 산책은 그림의 소재를 구하기 위한 방편이라기보다는 그자체가 작업 과정의 일부다. 작가는 산책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에 상응하는 어떤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산책이고 산책은 그림인 셈이다. 양자는 뫼비우스 띠처럼 연동된다. 관객 또한 산책하듯이 화면 안을 소요할 것이며, 볼 때마다 다른 것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작품은 그렇게 되기에 충분할 만큼 복잡하다. 장소명이 드러난 작품명은 관객과의 교감을 겨냥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경은 고정된 정점(定點)에서 앞에 펼쳐진 것들을 일망으로 포획하는 방식과 거리를 둔다. 정점은 고전주의 방식이며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질서 잡힌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기준에 의거하면, 김지영의 작품은 터무니없이 무질서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각적 체험은 그리기 뿐 아니라와 붙이기 등을 통해 표현한다. 새로운 것은 수시로 끼어들어 화면 여기저기에 쌓인다. 캔버스가 아닌 종이, 그것도 색종이와 프린트 테이프 등이 가세한 여러 평면의 조합, 드로잉이라는 방식 등등은 여러 시점을 구현한다. 캔버스 대신에 부담 없는 종이가 선택되었지만, 흰색이나 누런색의 드로잉 종이 보다 더 부담 없는 재료로 선택된 것이 15x15cm 크기의 색종이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맞게 색을 선택하기에 시공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화면에 붙일 때는 조화를 생각한다. 패치워크나 이미지가 새겨진 테이프를 활용하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집으로 가는길  종이에 콜라주, 드로잉  70.5 x 80.5cm  2018



  종이에 꼴라주, 드로잉  50.5 x 60cm  2018



자연 한 가운데서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할 때는 피아노 건반 모양의 테이프가, 옆 동네를 산책할 때는 도로가의 사람들이 그려진 테이프가, 하루의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풍경에서는 퇴근 후 한잔하자는 왁자지껄한 이미지가 프린트된 테이프가 사용된다. 화면에는 색종이나 프린트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생기는 흔적이 남는다. 김지영의 작품은 시공간의 경험이 쌓여가는 과정이 있다. 최근 작품 [염포동](2020)은 산책자의 시점이 적용된 것으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변화무쌍한 느낌을 자유롭게 툭툭 던지듯이 표현한다. 일점 원근법의 정지된 외눈박이 시점이 아니다. 종이 위에 드로잉과 꼴라주로 표현된 복합적 시점은 통시적이기보다는 공시적이다. 그것은 소리처럼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작가는 관념 보다는 그때그때의 현장감을 중시하지만, 사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소리는 녹음한다.


작가의 체험에 의하면,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드로잉을 잘 안하게 된다. 사진을 찍어왔더니 그것을 그대로 그리려하게 됐다는 것이다. 사진 찍느라 정작 그곳에서의 체험이 휘발된 경우가 많다. 작가는 오감과 기억, 그리고 상상을 이용해서 자신이 던져진 시공간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유동적 화면에서도 자연과 인공은 기하학적 구조와 자유로운 선적 흐름으로 구별된다. 작품 [성원 샹떼빌](2020)은 아파트들이 화면의 중심에 있지만 작가가 통과하는 여러 지형지물 중의 한 무리일 뿐이다. 한국은 온 국토가 아파트 천지지만, 세계 굴지의 자동차 제조사가 있는 지역의 아파트는 좀 더 규격화된 삶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한꺼번에 이동하는 출퇴근 시간대의 노동자들을 표현한 작품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찍어내는 리듬이 삶 또한 지배한다. 소비는 생산과 달리 자유로울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지만, 그 또한 생산의 패턴 및 주기에 연동된다. 




  종이에 꼴라주, 드로잉  50.5 X 60CM  2018



  종이에 콜라주, 드로잉  40 X 50cm  2018



예술은 획일적 생산/소비의 방식이 아니고도 삶이 영위될 수 있는 다른 길을 보여주지만, 그 길은 안전하고 편리한 삶 지상주의 속에서 주변화 된 오솔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우회로는 모두가 통과하려는 대로가 막혔을 때 지름길이 되어줄 수도 있다. 물론 다니던 길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다. 고속도로든 오솔길이든 확실한 길은 없다. 현대적 시스템은 확실성만큼이나 불확실성을 높여나간다. 예술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새로움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 작가는 아파트촌에 사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단지 내 공원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작품 [동네 한바퀴](2020)에서 처리되지 않은 여백같은 공간은 작가가 통과했을 동네 한 바퀴의 여정을 다양한 차원에서 담을 수 있는 넉넉한 장이다. 작품 [집으로 가는 길](2018)은 산으로 보이는 능선, 짙은 아스팔트 길, 일정한 간격으로 창이 난 건물 등등이 보이는 풍경이다. 


검은색 얼룩으로도 보일만한 양팔을 든 인물이 화면 안쪽으로 나아가면서 관객의 시선을 내부로 끌어들인다. 작품 [염포동 뒷산](2020)에서 드로잉은 그자체가 산책처럼 보인다. 드로잉도 산책처럼 늘 같은 길을 가지만 만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나날의, 매순간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산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작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능선이나 나뭇가지 등이 느슨하게 그어져 있는 사이로 꼴라주 된 사각형이 있다. 그것은 그림 속의 또 다른 그림, 공간 속의 또 다른 공간, 그리고 시간이다. 꼴라주는 화면의 연속성을 끊어내고 다른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메모지를 활용하여 글을 썼던 프루스트의 예를 들면서, 선형적 서술을 넘어선 현대적 실험을 분석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프루스트는 도입부 속에 끝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렇게 소설의 끝이 시작을 생성하는 식으로 구상된다.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은 첫 권의 첫 장을 쓴 직후에 씌여졌다’(프루스트) 




프랑크푸르트 풍경  캔버스에 유화, 연필  180 x 160cm  2016



 무리의 움직임_01  캔버스에 유화  180 x 160cm  2016



소리에 대한 김지영의 감수성은 동시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했다. 시각과 달리, 소리는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들려온다. 과학적 원근법이 적용된 풍경이 앎을 통한 지배와 소유를 지향한다면, 동시성은 생성 및 소멸과 비교될 수 있다. 그림으로 치면 사실주의적 재현에 해당되는 선형적 서사를 해체하는데 있어 소리가 가질 수 있는 위상을 강조하는 [글쓰기와 차이]는 ‘귀는 대상 쪽으로 실제로는 돌아서지 않으면서 신체의 내적 진동의 결과를 지각한다. 그런데 그 진동에 의해 제 모습을 과시하거나 노출하는 것은, 물질적인 형체가 아니고 영혼으로부터 오는 최초의 관념성이다’(레비나스)라는 말이 인용되어 있다.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의 선율로 포괄하려는 것 자체가 억압적이다. 김지영의 작품에서 꼴라주의 방식은 동시적 공존을 표현한다. 작품 [01.18.19 공원산책](2018)에는 화면의 지배적인 형태가 존재한다. 아이가 그린 여자 얼굴같이 눈썹과 붉은 입술, 그리고 양손이 보이는데, 그것은 자잘한 현대인의 일상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주물럭거리는 존재가 연상된다. 


거기에는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공업도시 울산에서 가능했던 상상력과 추리가 반영되어 있다. 종이에 드로잉과 꼴라주를 하기 전에는 주로 유화를 그렸다. 캔버스와 달리 종이에 연필로 선을 그었을 때 심리적으로 자유로웠다고 작가는 말한다. 종이는 흰 캔버스에 비해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작가는 흰 캔버스를 벽과 비유한다. 반면 종이는 가벽같이 쉽게 떼고 붙이고 하면서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다. 요즘 그림은 유화의 무게감을 떨쳐내고 사전 계획도 없이 시작한다. 완성의 기준도 ‘더 이상 쏟아낼 게 없을 때’가 그 시점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리고자 하는 본능이 반영된 자유로운 낙서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어릴 때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벽에 낙서를 하며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 점차 커가면서 그 표현욕구가 사라진다’고 지적한다. 드로잉이든 유화든 도시를 보는 관점은 지속적이다. 유화 작품 [시내에서 ](2016) 시리즈에서 작은 형태들이 모여 있는 영역은 군중의 이합집산이 연상된다. 




시내에서_02  캔버스에 유화, 연필, 오일바  220 x 200cm  2016



숨바꼭질  캔버스에 유화  65 x 45cm  2013



도시 구조물들은 작가의 생각과 느낌이 담긴 붓질로 직선성을 상실한다. 고층건물들 사이로 난 고가 도로가 보이는 작품 [프랑크푸르트 풍경](2016)에서 회색빛 도시 사이에 약간의 녹색 물감자국이 자연을 표시할 따름이다. 대도시 이미지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작가는 도시에서 집단을 본다. 도시가 집단으로 간주되는 것은 작가가 그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도시의 산책자를 넘어서 도시의 ‘고독한’ 산책자의 시점이 편재한다. 화면 가득한 작은 사각형들이 유형화된 삶을 표현하는 [집단이동](2016), 생산과 소비의 주기를 공유하는 대도시 군중에 대한 인상을 표현한 [무리의 움직임](2016), 같은 틀로 찍어낸 둥근 형태들이 있는 [집단모임](2016) 등이 대표적이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요즘의 시점에서 볼 때 이러한 집단성은 사회적이기 보다는 묵시록적이다. 그러나 도시의 반대 항이라 할 수 있는 자연이 대안의 별천지 인 것은 아니다. 


유화 작품 [2012년 가을](2012), [숨바꼭질](2013), [꽃샘추위](2013) 등에는 구체적 형태를 느낌으로 지워버린다. 감정 이입된 자연이다. [쓸쓸한 숲](2013), [겨울](2014), [거센 바람 불던 날](2014), [춤추는 나무](2015), [우울한 여름바람](2015) 등은 칙칙한 색조에 자연의 이미지가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으며, 심상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자연이다. 김지영의 작품에서는 자연 또한 도시풍경만큼이나 불연속적이며, 꼴라주가 아닌 유화로 그려졌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자연이든 도시든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에서의 유기적인 조화에 대한 이상을 21세기의 작품에서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저자를 포함한 현대의 철학자들은 해체는 나중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음을 강조한다. 일상의 삶에 정주할 수 없는 존재, 낯선 시공간에 던져진 현대의 화가는 전체라고 간주된 이상적 상에 내재된 균열의 틈새에서 작업한다. 현대의 화가는 여기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을 기록할 따름이다.   

 

출전; 북구예술창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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