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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진 / 이상을 향한 비상

이선영

 이상을 향한 비상

  

 이선영(미술평론가)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 같은 밀착 의상을 입고, 만화 캐릭터처럼 얼굴이 큰 한유진의 작품 속 인물은 지상의 크고 작은 걱정거리를 일소하는 희망적 존재다. 다소간 평면적인 큰 얼굴은 눈썹의 각도나 눈의 크기 등 조그만 변화에도 다른 분위기와 이야기를 전달해 준다. 날개를 달고 때로 부처같은 포즈를 취하기도 하는 ‘가릉빈가(迦陵頻伽)’는 날개가 있지만 아직 날지는 못하는 가능성이 현실화되지 못한 불안한 존재다. 가릉빈가는 여러 작품에서 동질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 비상(飛上)을 꿈꾼다. 민화적 양식을 취하는 한유진의 작품이 길상(吉祥)적 의미를 가진 것과 맥락이다. 작가에 의하면 가릉빈가는 ‘길조를 의미하는 상상 속의 새’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극락정토에 사는 새로 머리에는 여인의 얼굴, 몸은 새, 손은 사람의 손, 발은 새의 발을 하고 있다’ 한유진의 작품에서 길조는 모란과 함께 하면서 효과를 발휘한다. 좋은 것에 좋은 것이 더해져 부귀영화, 극락 같은 지상적 존재의 희망이 투사된다. 




 2017-1, 린넨천에 채색, 은박, 85x255cm (85x85cm, 3) 2017

   


飛上2013-1, 린넨천에 채색, 80x80cm, 2013



비상을 꿈꾸던 젊은 시절의 소망이 담겼지만, 요즘같이 어려운 시국에는 사회적 확장성을 가진다. 작가가 선호하여 체택하는 고풍스러운 양식은 개인을 넘어선 인류의 소망을 담았다는 점에서 신화적이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신화란 인간의 정신구조 속에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하나의 영상’이라고 정의 한다. 한유진의 작품에서도 꿈꾸어지는 이상은 마치 황금시대처럼 ‘어떤 안정된 전체감을 인간에게 제공하며, 슬픔을 축제에 의해 해결할 수 있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영혼의 지배력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태의 사회’(레비 스트로스)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존재하지 않는 사회상태’(루소)에 관한 모델이기도 하다. 한유진은 ‘신세계’라는 작품제목을 통해서 이상사회의 모습을 과거에 국한시키지는 않는다. 만약 그것이 과거와 유사해도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납작코에 날렵한 눈, 모란 무늬의 의상은 동양 출신임을 알려준다. 코믹하면서도 귀여운 인물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 한 창작물이지만, 민화의 다양한 소재와 기법을 차용한 작품은 만화를 닮은 현대적 민화다. 


민화가 궁중예술을 해학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라면, 한유진의 민화 또한 변형 및 창작의 요소가 있다. 민화 자체가 민중들의 기복과 관련된 만큼, 창작 민화 또한 전통적 상징을 공유한다. 가릉빈가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무늬 옷을 입었으며, 홀로 또는 여럿이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어떤 모란은 화려한 색이 빠져있거나 신기루 같은 막에 가려져 있다. 색이 빠진 모란은 작가가 박물관에서 본 하얀 호분으로 그린 모란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작가의 연구에 의하면, 색이 사라진 모란은 ‘소병, 즉 장례식 관을 가리고 제사상을 차린 후 뒤편에 놓는 용도로 활용된 병풍’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죽음 이후에도 모란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상징, 즉 현세의 평안이 내세까지 이어지기를 기원함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실체가 사라진 하얀 형태는 ‘헛된 꿈’을 상징하게 될 터이다. 모란으로 상징되는 희망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그때 저기에 있다. 




迦陵頻伽-2020-1, 린넨천에 채색, 80x48.5cm, 2020



2017-2, 린넨천에 채색, 117x60cm, 2017



新世界2019-1 린넨천에 채색, 121×60cm, 2019



迦陵頻伽 2019-1, 린넨천에 채색, 은박, 45x34cm 2019



이 막연한 거리는 다양한 시도를 낳게 한다. 당돌하고 씩씩해 보이는 가릉빈가는 잃어버린 꿈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상을 꿈꾸다’--2010년 첫 개인전 이후, 연이어 열린 4번의 개인전 부제이기도 하다—는 그러한 희망을 말한다. 밑층에 화려한 색의 형상이 잠재해 있는 작품 [花](2017)는 하얀 베일, 또는 거품 같은 막이 덮여있다. 꽃의 실루엣을 가진 허연 막은 답답할 수도 아련할 수도 있지만 부재/현전의 관계를 암시한다. 정사각형, 가로로 또는 세로로 긴 여러 규격이 있다. 붉은 톤, 푸른 톤의 밑층을 가지는 화면은 여러 방식으로 조합되어 걸리곤 한다. 꽃 ‘花’자의 의미에는 모란이 포함되어 있다. 전통적 상상 속에서 모란은 그냥 여러 꽃 중의 하나가 아니라 대표성을 지닌다. 모란은 가릉빈가에 입혀져서 정지된 상징을 넘어서 행위에 동참한다. 대중문화의 영웅들이 입는 쫄쫄한 의상처럼 가릉빈가도 활동적인 캐릭터이기에 행동 표시가 확실히 나는 의상이 채택됐다. 


작품 [花 2017]에서 가릉빈가는 구름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자세다. 중앙과 마찬가지로 정사각형의 작품 두 개가 양옆에 배치된 이 작품에서 뭉실뭉실한 형태는 바로 모란이다. 가릉빈가는 모란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작품 [비상 2013]에서 보이지 않은 장애물을 뜀틀 넘듯이 힘차게 건너뛰는 가릉빈가에게서는 태양과도 같은 에너지가 뻗쳐 나온다. 하지만 회색빛 배경의 [가릉빈가](2011)는 날개가 꽁꽁 묶인 채 화가 잔뜩 난 모습이다. 가릉빈가의 행위는 부처의 수인(手印)처럼 섬세하기도 하다. 작품 [가릉빈가 2019] 한 쌍은 가부좌에 수인을 한 인물이 은색, 금색 모란을 하나씩 들고 있다. 최근의 [가릉빈가](2020)에서 모란은 머리 위에서 자란다. 가릉빈가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란의 화신이며, 그에 걸맞게 행동한다. 인물들이 여럿 나올 때 작가는 연출가의 입장에서 다양한 상황을 전달한다. 모란 안팎의 그들은 때로 부귀영화를 쟁취하기 위해 부질없는 경쟁을 한다. 




2017-5, 장지에 채색, 100x100cm, 2017



2020-1, 장지에 채색, 72x106cm, 2020



2020-2, 장지에 채색, 90x120cm, 2020



2018-1 장지에 채색, 150x200cm, 2018



2018-2 장지에 채색, 91x91cm, 2018



양극화에 의해 부가 더욱 귀해진 시대 부귀를 누릴 신세계는 밝지만은 않다. 작품 [신세계 2019]는 산, 구름, 물 등 동양적 유토피아의 요소가 두루 배치되어 있지만, 거센 물살에 잠겨가는 집이나 탈색된 모란들은 불길한 징후를 보인다. 작품 [신세계 2012]에도 대홍수같은 재난 속 기울어지는 집 등이 종말론적이지만, 민화 특유의 밝음이 깔려 있다.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도 인물이 중심을 잡아주곤 한다. 가릉빈가는 언제나 화면 중심에 나타나며, 대개 배경은 단색이어서 존재감이 부각된다. 가릉빈가는 이상향을 찾지만 그것은 행복의 파랑새처럼 이미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신 안에 말이다. 가릉빈가가 수행하는 수도자같은 모습을 자주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면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그것은 낙원처럼 세계의 시초이자 중심이 된다. 신화학자 진 쿠퍼에 의하면, 중심은 ‘전체성, 순수한 존재, 만물의 기원, 우주 축, 모든 사물이 그 주위를 도는 한 점’이다. 낙원 또한 그러하다. 


낙원은 ‘모든 가능성을 합한 점, 성스러운 공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곳이며, 소우주와 대우주의 교차점, 모든 대립물이 사라지는 화해의 점’(진 쿠퍼)이기 때문이다. 대개 식물이 그런역할을 해왔고, 한유진의 경우 모란이 그렇다. 작품 속 주인공은 이미 모란과 일체화되어 있다. 작품 속 모란은 낙원에 빠지지 않는 풍요의 나무 같은 위상을 지닌다. 날개달린 인물들은 그들보다 거대하게 표현된 모란 안팎에 배치된다. 자크 브로스는 [나무의 신화]에서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의 예를 든다. 에덴동산은 서구의 대표 신화지만 완벽한 이상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생명의 나무가 존재한다는 발상은 한유진의 작품 속 모란 또한 이러한 보편적 상징 속에 위치하게 한다. 신화학자 진 쿠퍼에 의하면, ‘에덴동산/정원의 한가운데서는 생명의 나무는 원초의 낙원 상태가 가지는 완전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어마어마한 풍부함의 상징이다. 한유진의 작품 속 그러한 풍요로운 생명의 나무는 수많은 꽃이 뭉쳐져 원형을 이루고 있는 [花 2017-1]에 선명하다. 




2017-4, 장지에 채색, 100x65cm, 2017



2018-3, 장지에 채색, 70x87cm, 2018



2018-5, 장지에 채색, 126x110cm, 2019



[花 2017-2]에서 화면의 중심에서 자라나는 나무는 그 아래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다. 작가는 세상을 어둡게 보지만, 칙칙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자의식이 투사된 캐릭터는 어두운 상황에도 불과하고 물심양면으로 고군분투 한다. 아름다운 색과 상징적 도상이 가득한 작품은 밝고 몽환적이다. 그자체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산, 구름, 물 같은 도상에는 형태를 만들 때 다른 색으로 외곽선을 둘러 밋밋함을 방지하기도 한다. 자연문양이 자세히 그려진 이전의 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중층적 작업에서 펄이나 은박 등 빛나는 재료도 사용하여 화면을 환하게 만든다. 전면(all over) 구도는 각각의 화면을 설치적인 방식으로 유연하게 배치할 수 있게 한다. 걱정스러운 세태를 상징하는 침수 이미지는 형식적으로도 관철된다. 호분 물감 농도를 진하게 해서 떨어뜨려 판을 흔들어 장지 위에 얼룩지거나 흘러내리는 느낌은 화사함 속의 멜랑콜리를 느끼게 한다. 


차고 이지러지는 성질을 가지는 달 또한 양면성을 가진다. 작가는 ‘주기적이고 항구적인 달의 운동은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영생(永生)의 존재로, 생성-죽음-재생이라는 윤회의 이미지로 인식’ 되어졌음을 말한다. 작가는 ‘민화의 십장생도(十長生圖)에서 달과 함께 장수를 상징했던 구름을 같이 그려 넣어, 상서로운 의미를’ 더하였다. 달은 근현대에 와서 전형적이 된 선적 시간이 아닌 순환적 시간을 상징한다. 동서고금을 통 털어 순환하는 시간개념은 즉 창조, 완성, 쇠퇴, 멸망, 부활의 끊임없는 주기를 따랐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달의 주기가 이러한 시간의 순환개념 형성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하면서, 끝없이 회전하는 시간과 우주의 개념은 이상향의 신화들 사이의 뚜렷한 공통점이라고 말한다. 린넨에 채색한 작품 [月](2012)에서는 둥근 달 위에서 한쪽발로 중심을 잡고 서있는 인물이 마치 달의 여신 같은 모습이다. 달이라는 소우주에는 여러 인물들이 여러 자세로 상호작용한다. 




 -2018-2 린넨천에 채색, 78x50cm, 2018




-2, 린넨천에 채색, 80×40cm, 2012

 




                                迦陵頻伽-1, 린넨천에 채색, 91x73cm, 2011




인물들은 큰 머리 때문에, 특히 아이들을 포함한 공공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해왔던 작가의 이력에 비춰보면, 어린이로 보이지만 나이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었지만 성별은 드러난다. 자신을 투영했지만 작가와 닮지는 않았다. 길상, 기복, 또는 희망사항은 부재를 통해 말할 따름이다. 가릉빈가는 팍팍한 현실을 돌파하려는 과정에서 무릉도원을 꿈꾼다. 작가의 키워드 중 하나인 ‘비상(飛上)’은 부정적인 지금 여기로부터의 도약을 말한다. 초월적 비전속에 여러 종교가 떠오르지만 한유진의 작품 세계와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이다. 도상 하나하나가 상징적인 민화와 마찬가지로 작품 속 산, 물, 구름, 달, 해, 모란, 새의 모습을 한 인간 등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풍요와 안녕을 원하는 상징적 우주이다. 작가의 희망사항이 투사된 환상의 세계는 2019년 전시제목처럼 ‘꿈의 정원’을 이룬다. 정원은 두려움이나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자연을 상징한다. 


한유진이 바라는 낙원은 정원인데, 그 또한 많은 전통문화에서 공유된다. 진 쿠퍼에 의하면 많은 전통문화에서 낙원(paradise)은 ‘둘러싸인 정원’, 정원을 이루고 있는 섬, 또는 ‘녹색의 섬’이다. 진 쿠퍼에 의하면 낙원이란 ‘원초의 완전성과 황금시대의 상징이며 우주의 중심, 태고의 더럽혀지지 않은 무구함, 지복, 신과 인간, 그리고 모든 생물의 완전한 교류’를 의미한다. 한유진의 작품 속 주인공 가릉빈가 자체가 모란과 새 등 동식물과 합체된 상태이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그 어원에서 드러나듯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곳’(토마스 모어)이기도 하다. 그 자체가 이상주의적인 예술은 유토피아적 사고와 가까웠다. 예술은 ‘예술언어를 변화시킴으로서 사고 형태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고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서 삶의 모습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로버트 휴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고는 예술 언어를 현실과 등치시킨다는 점에서 관념적, 또는 이상적이다. 




 花 2013-1, 린넨천에 채색, 90x110cm, 2013



 新世界2012-2, 린넨천에 채색, 117x80cm, 2012



1-3, 린넨천에 채색, 54×135cm, 2012


                                   雲-1, 린넨천에 채색, 110x90cm, 2011



하지만 코드화가 보다 넓고 깊게 현실을 잠식하는 정보혁명 사회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 ‘전위’라는 단어가 문화예술 영역에서 사용된 바와 같은 맥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이 19세기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였던 생시몽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유토피아적 사유는 개인의 소망을 넘어서 집단행복의 추구로 변화할 때 정치적, 혁명적 함의를 띄곤 한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예술적 카테고리로서 ‘예측된 상’을 설정하고 예술영역에서 나타나는 유토피아의 요소를 해명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백일몽, 판타지 등은 유토피아적 요소를 지닌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이 떠오르듯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모란 향기 가득한 곳을 꿈꾸는 가릉빈가는 예술적 상상력과 이상향에 대한 관념을 만나게 하며, 대중문화의 영웅들과 비교해도 될 만큼 친근성을 갖추고 있다. 


출전; 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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