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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전 / 거대한 시간 주기에서의 위기와 구원

이선영

거대한 시간 주기에서의 위기와 구원 

새천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전 (2020. 10. 20 - 11. 20, 갤러리 바톤)


이선영(미술평론가)


  

‘새천년이 얼마 지나지 않은(A Little After The Millennium)’이라는 전시부제는 그토록 많이 회자되었다 사라진 ‘새천년’이라는 단어를 호출한다. 집중적 소모에 의한 진부화는 모든 상품은 물론 개념의 운명이다. 20여년이나 지난 시기였지만, 새천년을 앞두고 엄청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굴드에 따르면 자연에서는 1000이라는 숫자를 적용하여 시간을 구분 지을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다. 과학자의 관점에 의하면, 그것은 자연에 인간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어원적으로 밀레니엄이란 1000년의 기간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려진 어떤 부족신의 찬란한 천년통치를 말한다. 즉 밀레니엄은 통상적인 역법의 가치중립적 의미가 아니라, 종말이나 축복에 대한 종교적 비전과 관련된다. 1000이라는 숫자는 예수의 재림과 심판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 즉 인간의 마지막 시간’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합리적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종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들이 편재한다. 새천년이 도래할 때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물론, 구제불능의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견들이 있었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냉전의 종말 등 20세기의 역동적 역사에 비한다면, 나름대로 큰 변화 없이 잔잔하게 21세기가 전개되는가 싶더니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돌고나서야 비로소 새천년에 대한 각성이 생겨났다. 전 세계는 좁아질 대로 좁아졌는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좀비가 될 수 있다니!  그럼 최초의 밀레니엄은 어땠을까. 역사가들은 최초의 밀레니엄, 즉 1000년 무렵에 요한 계시록의 영향으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조르주 뒤비에 의하면 이러한 불안 심리는 당시 동방에서 몰려온 유목민의 침략과 겹쳐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그에 의하면 이질적인 것은 공포스럽게 여겨졌고, 종말의 증후로 보여졌다. 신은 항상 자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굳게 믿었기에, 자연현상에서 조금이라도 상궤를 벗어나는 기미가 있으면, 이를 세상의 종말에 선행하는 고통의 시작이라고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밀레니엄이 지난 조금 후의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두려운 타자는 귀환했다. 타자는 이제 자연, 그 중에서도 바이러스 같은 미시적 차원이다. 


코로나가 중국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 간주될 타자를 지목하고 실체화하는데 가세했을 것이다. 주최 측은 이 전시가 ‘밀레니엄에 본격적인 작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예술가들의 지난 20년간의 작품 활동에 대한 회상적 반영’이기도 함을 밝힌다. 세계만큼이나 그 세계 속에서 예술작품으로 상호작용하는 작가의 자의식이 담겨있다. 그 지점에서 이 작가들은 ‘혼돈과 위기의 시대에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서’ 견인해온 ‘진실과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묵시록적 질문에 대해 답하려 한다. 지금 세계가 당면한 가장 큰 재앙인 코로나는 언젠가는 새로운 기술로 퇴치되겠지만, 앞으로도 마땅한 해결책 없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감내해야 하는 돌발변수들이 산재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있다.  그동안의 자본/노동의 대립에다가 생명과 기계와 관련된 문제가 겹쳐져 폭발적인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많은 SF 영화가 지구의 종말적인 모습부터 시작되곤 한다. 그러나 종말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 편재한다. 얼마 전 ‘기계처럼 일하는 삶’이라는 제하의 한겨레 신문 기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지금도 유효함을 주장한다. 


창문하나 없는 작업장에서 하루 16시간 일하던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 이야기가 50년 전 일인데, ‘밀레니엄이 조금 지난’ 요즘에도 하루 16시간 일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들이 있으니 어느 계층에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삶이다. 전태일 열사 사망 50년 주년이 지난 지금도 한해 산재 사망자 숫자가 2020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진정 이러한 숫자에서 묵시록을 읽어야 한다. 양극화가 더욱 가세될 세상에서, 이제 누구도 노동자의 운명이 운 없이 태어난 타자들에 국한되지 않음을 인식한다. 큰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사건 없이도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통계는 ‘새천년 얼마 이후의’ 삶을 극명하게 비춘다. 이러한 일상적 조건에 기후변화 및 제국의 대결을 비롯한 큰 사건 또한 줄줄이 대기 중이다. 20세기 초기 모더니즘에 들뜬 미술가에게 종말의 임박을 알린 세계대전 전야처럼 묵시록의 기호는 선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전시의 작품들은 시대의 소명에 대한 큰 대답을 구하지 않는다. 큰 대답은 이미 예술을 떠난 문제, 즉 정치나 과학기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당면한 묵시록적 위기에 대한 예술의 소박한 대답


이 전시의 대표 이미지로 선택돼 엽서에 담긴 작은 새는 어찌 보편 대단한 지표다. 그것은 새가 살 수 있는 생태계나 새 한 마리를 기르며 살 수 있는 일상의 작은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의 이 작품은 도자기로 만든 새 11마리가 여러 자세와 각도로 나무 봉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하얀 벽에 비치는 그림자는 생명의 존재감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귀여운 노랑 새는 작가가 11년 동안 키웠던 새라는 사연을 알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이러한 감성은 누군가 즐겨 읽던 작은 시집에 언제 끼워 넣은지 모를 낙엽 한 장 주는 부재감과 비교될 수 있다. 먼 훗날 누군가 그 시대는 ‘그런 노랑 새도, 그런 나무도, 심지어는 시집도 있었네’하고 신기해할지도 모른다.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이 많고 사라질 것도 많다. 그렇다면 예술은? ‘새천년’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이 전시는 ‘팬데믹으로 인류의 생활 방식과 사회 시스템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미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대로로 나있는 윈도 갤러리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리암 길릭(Liam Gillick)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처럼 이미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제품을 활용한다. 그가 사용하는 알루미늄이나 플렉시글래스, 그리고 완성 제품인 오디오 기기 등은 작가의 컨셉에 맞게 선택된 것이고 미학적 의도에 의해 재배열된 것이다. 벽에 설치된 32개의 노란색 알루미늄 막대는 간격과 길이가 일정하지만 높낮이를 다르게 배치되어 리듬감이 느껴진다. 고급 오디오 세트 아래에 설치한 플렉시글래스 재질의 판들은 상품과 부딪히기 보다는 공존한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유명 영화감독의 SF 영화 음악이라고 하는데, 너무 작게 들린다. 고 사양 오디오라서 그만큼이라도 들리는지 모르지만, 작가가 오디오의 본래적 기능을 약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은 미래를 담은 프리미엄 급 상품과 예술작품 또는 사물의 동등성을 암시한다. 벽에 걸린 최근 작품은 파이프나 기둥 등 일상에서 사용되는 프레임을 잘라 구성하여 색을 칠한 것으로, 공업 재료에서 기능은 빼고 그 심미적 속성만 부각시킨다.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보라색 말풍선들은 리암 길릭의 노란 막대기들과 잘 어울린다. 헬륨가스가 들어간 말풍선 모양의 풍선은 윈도 갤러리 천장에 가득 붙어있다. SNS가 일상화된 초 연결 사회에서 떠도는 말들을 유희적으로, 그리고 지극히 아니로그적으로 표현한다. 앤 콜리어(Anne Collier)의 작품은 리히텐슈타인이 선택하여 작품화한 유명한 도상이 재차 등장한다. 이번에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작품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실제보다는 사진으로 더 많이 감상되는 유명작품이라는 사실은 그림과 사진의 전후관계를 따지는 것을 무의미하게 한다. 작품 [Filter #3 (Green)]은 화면 가득히 포착된 순종적인 여성 캐릭터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며, 리히텐슈타인처럼 만화의 한 장면 및 화면의 망점이 강조되어 있다. 붓으로 그린 만화에서 인쇄물로, 다시 회화로, 회화에 영감을 받은 사진작품으로 계속 변주 되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초록색 필터를 끼운 모습지만, 그의 작품 목록에는 다른 필터 버전으로도 여럿 있다. 기원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뮬라크의 행진은 무한이 이어진다. 


그는 또 다른 작품에서 눈물 한 방울만을 부각시켰다. 눈물 한 방울이 무게는 상당하여 화면의 추상미를 고조시키는 망점을 지워낼 정도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기계 복제물이 지배할 이미 다가온 미래에서 버려지거나 감춰져야 했던 체액은 다시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기계복제의 시대에 미술작품의 아우라는 사라졌다는 발터 벤야민의 예견이 있었다. 그러나 연금술을 떠오르게 하는 수작업은 아우라를 복귀시킨다. 마커스 암(Markus Amm)은 나무판 위에 물감 및 안료를 여러 번 바른 화면을 보여준다. 화면 가장자리는 다층적 구조를 단면처럼 드러낸다. 비밀스럽고 조심스러운 중층적 작업은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빛의 분위기를 만든다. 흐릿한 모서리는 유기체도 떠올린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은 오로라처럼 미묘하게 색이 번지는 듯하다. 


레베카 워렌(Rebecca Warren)의 작품 [Hot Nike]는 한국적 표현을 쓰자면 떡 주무르듯 만들어졌으며, 색까지 칠해서 금속 조각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브론즈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조각의 대가들이 재료를 다룰 때처럼 자유자재로 다룬다. 머리 부분의 의기양양한 닭 벼슬처럼 붙은 색다른 형태만이 그것이 승리의 여신상임을 알아보게 할 것이다. 하지만 당대 최고 미인이 모델이었을 여신상 대신에 똥배가 튀어나온 마르고 키 큰 여자의 옆모습이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매끈한 좌대는 우툴두툴한 니케의 무대를 만들어준다. 좌대든 상이든 원래 재료를 알기 힘들만큼 표면처리가 돼있다. 예술 또한 더욱 비밀스럽게 숨어든다. 위기의 산물이기도 한 예술은 구원까지는 아니어도 위기의 시대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며, 예술에게 묻는 자에게 대답하려 한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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